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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나는 늘그막에 우리 역사, 특히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나는 새삼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우리나라에는 인도의 네루(Nehru), 베트남의 호찌민(胡志明),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같은 인물이 없을까 하는 의문과 안타까움에 젖곤 했다.

네루, 호찌민, 마오쩌둥, 이분들은 외세 침략자의 대포 앞에 신음하는 조국을 구하는 동시에 자주독립 국가를 세운 지도자였다. 나는 그동안 학문의 깊이가 얕고 재주가 변변치 않은 탓으로, 일흔을 넘긴 이제야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이 두 분 보였다.

하지만 그분들은 해방공간이라는 회색빛 시기에 애석하게도 미욱한 하수인들의 흉탄에 쓰러졌다. 한 분은 상해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이요, 또 다른 한 분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呂運亨) 선생이다. 기자는 백범 김구에 관해서는 그동안 저서도 펴내고 여러 차례 기사를 썼기에 이번 회와 다음 회에서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행적을 간략히 살펴본다.

 
몽양 여운형 선생
 몽양 여운형 선생
ⓒ 몽양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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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태어난 게 아깝다

여운형 : "무엇 때문에 조선인 여운형을 만나자고 했는가?"
일왕 쇼와(昭和) : "과시(果是, 과연) 인물은 듣던 바와 같군. 당신이 조선에 태어난 게 아깝다."

여운형 : "농담할 시간이 없으니 용무가 없으면 돌아가겠다."
쇼와 :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대일본제국을 위해 수고해 줄 수 있겠는가?"

여운형 : "할 만한 일이면 하고, 못할 일이면 못하겠다."
쇼와 : "중국에 간 나의 사신들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는데, 일본 사람을 보내서는 안 되겠으니 여 선생이 나의 사신이 되어 달라."

여운형 : "내가 친일주구로 (중국에) 나타나면 그(중국 지도자)가 나를 살려 주겠는가?"
쇼와 : ":그러기에 당신의 재능과 수완을 믿는 것이다."

여운형 : "친일과 반일은 수화상극(水火相剋, 물과 불로 서로 공존할 수 없음)이거늘, 일본이 조선 민족에게 큰 재난을 들씌우고, 어찌 조선 사람에게 친일을 설교하는 것인가? 나에게 재능과 수완이 없어 그대(일왕)의 마음을 돌려 세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쇼와 : "(노하여)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으나, 너처럼 오만 무례한 자는 처음이다. 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거늘, 나의 명령을 듣든지, 죽든지 한 길을 택하라,"

여운형 : "죽는 것이 무서워서야 어떻게 내가 반일(反日)을 하겠는가? 이 길에서 이미 많은 조선 사람들은 생명을 바쳤거늘, 앞으로도 조선 독립이 이룩될 때까지 민족의 넋을 지켜 죽는 사람들은 끝없이 늘어날 것이다." (이하 생략)

- 여연구 지음 김영사 발간 <나의 아버지 여운형> 115~116쪽 발췌 축약

몽양기념관 전경
 몽양기념관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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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기념관

지난 7월 29일, 서울 종로 '문화공간 온 협동조합'에서 나의 스토리펀딩 후원자와 '차 한 잔' 모임이 있었다. 그날 뜻밖에도 멀리 미국 워싱턴D.C.에 거주하는 신필영 6․15 공동선언 실현 미주 대표위원장이 행사장에 왔다. 그분은 2004년 나와 권중희 선생이 미국에 갔을 때 미주 동포환영회를 열어줬던 분이다. 그분은 요즘도 <오마이뉴스> 를 늘 보신다는 애독자로, 바쁜 일정에도 일부러 참석했다.

그날 그분은 여러 덕담을 한 후, 헤어질 때 내게 경기도 양평에 있는 몽양기념관을 꼭 한번 방문하라고 부탁했다. 나는 2009년 11월, 강원도 횡성군에서 원주시내로 거주지를 옮긴 이후 서울나들이 때는 주로 중앙선 열차를 타고 다닌다. 원주역을 출발한 열차가 양평역을 지나 10분 정도 달리면 신원역이 나왔고, 곧 우측 부용산 기슭에 '몽양기념관 가는 길'이라는 펼침막을 봐왔다. 그때마다 언제 한번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차일피일 미뤘던 터였다.

나는 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한 말씀은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또 지난날 작가회의 고문 시인 이기형 선생을 통해 여러 번 들은 바 있었다. 두 분 모두 해방 공간의 진짜 애국자로, 나라를 구할 분인데 애석하게도 극우세력들의 흉탄에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들려줬다.

몽양 숭배자 시인 고 이기형 선생
 몽양 숭배자 시인 고 이기형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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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 선생은 그런 말씀뿐 아니라 내게 구체적으로 여운형 선생 평전이나 사진집을 만들라는 주문까지도 했다. 하지만 사진 자료 부족과 그분에 대한 공부 부족으로 그 일을 단념하던 차에 이기형 선생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몽양 족친 여상화씨를 만나 다시 그런 부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신 위원장 부탁을 받은 뒤 열차로 그곳을 지날 때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던 차 마침 입동(立冬) 전날, 먼지 묻은 카메라 렌즈를 닦은 뒤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있는 '몽양 여운형기념관'을 찾았다. 그날 원주에서 열차로 양평에 도착한 다음, 다시 전철로 환승하자 네 번째가 신원역이었다. 전철에서 내리자 한강이 보이는 동시에 강바람이 불어왔다.

몽양유묵과 장례식 참배방명록
 몽양유묵과 장례식 참배방명록
ⓒ 몽양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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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벗' 여운형 선생

신원역 앞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 및 기념관 500m라고 적힌 표지와 몽양의 유묵 '혈농어수(血濃於水)'라는 글씨가 벽에 돌로 새겨져 있었다. 그 표지를 따라 가자 곧 중앙선 굴다리가 나왔다. 초행길이지만 계속 생가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 조금도 헤매지 않고 몽양기념관을 찾을 수 있었다.

샛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 길옆에는 '몽양길' '묘골 애오와공원' 등 길안내 펼침막이 나그네를 반겼다. 생가로 가는 어귀엔 먼저 '묘골애오와공원'이 나왔는데, 묘골은 동네 이름이며, '애오와(愛吾窩)'는 '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친필로 쓴 이 글귀를 돌에 새겨뒀다.

몽양기념관 가는 길
 몽양기념관 가는 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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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골애오와공원에 세워진 몽양 부조물
 묘골애오와공원에 세워진 몽양 부조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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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심장부 도쿄에서 토한 몽양어록
 적의 심장부 도쿄에서 토한 몽양어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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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골애오와공원 석벽에는 몽양의 어록을 새겨놨다. '적의 심장부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다'라는 동판 아래에는 "문화정치를 구상하던 일본의 하라(原敬) 내각은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해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대하였다. 적국 일본에서 식민지 청년이던 여운형은 조선독립운동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당당히 역설하였다. 그를 회유하려던 일본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고, 여운형은 국제적인 인물로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됐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그때의 연설 일구가 궁서체로 새겨져 있다.

"우리 민족이 생명을 걸고 주야 분투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진상과 그 의의를 밝히려고 이곳에 왔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당시 몽양은 분명히 '조선독립운동'이라고 말씀했을 텐데 몽양기념사업회에서 되도록 누가 되지 않도록(좌익이라는 누명을 쓰지 않도록) 조선을 한국으로 고쳐진 것으로 보여 그동안 우리 사회의 우경화 현상을 엿볼 수 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곳에 잠시 머문 후 곧 생가로 향하자 몽양길 길섶 돌 위에 새겨진 몽양의 여러 말씀(어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 1945년 해방 후 휘문학교 운동장에서 행한 첫 연설 중에서

해방 직후 휘문학교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여운형 선생
 해방 직후 휘문학교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여운형 선생
ⓒ 몽양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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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당시 입었던 몽양 혈의
 저격 당시 입었던 몽양 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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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장례식 만장
 여운형 장례식 만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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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어록들을 읽으면서 몽양길을 따라 가자 곧 몽양기념관이 나타났다. 몽양기념관 외부 벽은 까만 오석(烏石)으로 아담하게 단장됐는데, 내부 전시실에는 유년시절부터 흉탄으로 쓰러질 때까지의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잘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1947년 7월 19일 서거 당시 입었던 몽양의 혈의(血衣)가 눈에 들어왔다. 꼭 70년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끔찍함에 소름이 돋았다. 그 앞에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후인 '인민장' 장례식 만장(輓章)이 있었다. 만장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들의 당수(黨首) 인민(人民)의 벗 여운형 선생을 살해한 놈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 놈이다."

기념관 한 가운데 의자에 앉은 몽양 선생은 책을 펴고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몽양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몽양 선생은 조국 통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했다.

몽양 선생과 기자의 대화
 몽양 선생과 기자의 대화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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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행적①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음력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어머니 이(李)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훗날 호를 '몽양(夢陽)'으로 지었다고 한다. 조부 여규신(呂圭信)과 종조부 여규덕(呂圭德)은 동학에 가담했는데 두 분의 행적은 어린 몽양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어린 몽양에게 민족자주의 평등한 세상을 꿈꾸게 했다.

몽양은 1900년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뒤, 흥화학교(興化學校)를 거쳐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전신기술을 공부해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몽양은 그 통신원이 일본의 소유로 넘어가자 취업하지 않았다.

1906년, 부친이 돌아가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 모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운 뒤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자 이를 비난하는 집안 및 마을사람들에게 청년 몽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존권은 신성한 것이다. 시대의 조류는 조만간 인간 세계의 여러 모순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이 과거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국가도, 개인도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1907년, 양평 고향집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1910년에는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운 뒤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 학교는 1년 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몽양어록 1
 몽양어록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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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어록 2
 몽양어록 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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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행적②

1911년, 몽양은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조국 광복의 뜻을 펼치다가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중국 난징 금릉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한 뒤 1917년 졸업했다.

1918년, 몽양은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미국 대통령 특사인 크레인에게 조선의 독립청원서 두 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 줄 것을 부탁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다. 그해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몽양은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했다.

그해 11월, 몽양은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로 건너가 하라(原敬) 총리 등 정부요인들과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의 대조선정책을 혹독히 비판해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20년 미 의회 의원사절단 100여 명이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시찰하는 동안, 몽양은 임시정부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1922년 1월, 몽양은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의 사정을 논의했다. 그는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孫文)과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1925년부터는 중국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9년 7월, 몽양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됐다. 그때 몽양은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로 압송됐는데, 국내 언론에서는 그의 압송을 대서특필했다.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재판 결과 몽양은 독립운동 죄목으로 4년간 복역했다.

몽양어록 3
 몽양어록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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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출옥하자 몽양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몽양은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각종 체육대회를 개최 후원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신문에 스포츠란을 만들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를 앞두고 둘째 아들 친구 손기정은 몽양에게 물었다.

"아버님, 이번 올림픽에 나가야 합니까? 나가지 말아야 합니까?"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나가는 것은 원통하지만 나가야 해. 나가서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보여줘야 해."

손기정은 몽양의 당부대로 베를린올림픽대회에 출전해 마라톤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몽양은 <조선중앙일보>에 호외를 발행해 손기정 선수의 쾌거를 국내에 최초로 전했다. 그때 손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제에 의해 <조선중앙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사장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몽양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신사참배나 국방헌금, 징병 권유 따위의 강요를 일체 거부하면서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조선의 치안권을 몽양에게 넘겨줬다. 일본은 실질적으로 조선 민중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몽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몽양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는 보름 만에 전국에 145개 지부가 결성됐다.

이는 우리 민족이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의지와 역량을 보여준 증거였다. 1945년 12월에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몽양은 '조선을 이끌어 갈 양심적 지도자'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 제 1위로 뽑힐 만큼, 해방 공간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몽양 만장2
 몽양 만장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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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 사진자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검색 수집한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선생의 사진과 일제강점기 초기 때의 서울과 시골 풍물을 싣는다.

벽초 홍명희
 벽초 홍명희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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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울 남대문역(서울역 건립 이전)
 일제강점기 서울 남대문역(서울역 건립 이전)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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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 초기의 서울거리
 일제강점 초기의 서울거리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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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초기의 시골 풍경
 일제강점기 초기의 시골 풍경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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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 작성에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발간 <미군정 3년사>가 마침내 출시되었습니다. 1945~1948 미군정기 3년은 '덮어버린 역사' '묻혀버린 역사' '잃어버린 역사' 등으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현대사입니다. 기자는 다음 세대에게 쉬우면서도 정확, 간결하게 전달코자 열과 성을 다해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태그:#여운형,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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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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