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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지방은 한국독립운동의 메카이다. 나라가 망하자 가족과 함께 집단 망명을 단행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 일왕 폭살을 위해 동경 이중교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돼 잔혹한 고문과 옥중 단식투쟁 끝에 순국한 의열단 김지섭,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의열단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일명 황옥 경부사건)의 주인공 김시현은 모두 경북 안동 출신이다. 마찬가지로 경남 밀양은 경북 안동과 비견될 정도로 한국독립운동의 메카이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했을 때 200억~300억이라는 최고의 현상금이 내걸렸던 의열단장 김원봉, 시인 육사의 절친으로 민족혁명당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조선의용대의 영혼! 석정 윤세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된 의열단 최수봉, 항일독립지사이자 대종교 3대 교주인 윤세복 모두 경남 밀양 출신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3대 아리랑 가운데 하나인 밀양아리랑은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과 달리 1930년대 '독립군아리랑'으로 애창되었다. 1940년대 한국광복군에겐 밀양아리랑이 '광복군아리랑'으로 애창되며 공식적인 3대 군가 중 하나가 되었다. 심지어 6・25전쟁기 밀양아리랑은 '파르티잔아리랑'으로 중공군 군가집에도 실릴 정도였다. 그만큼 밀양아리랑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의지를 드러낸 저항의 노래이자 민족성을 담은 노래로 불려졌다. 밀양아리랑이 군가로서 애창된 이유 중에는 따라 부르기 쉬운 음악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국 만주지역에서 투쟁한 항일독립투사들 가운데 밀양 출신들이 유독 많았기에 밀양아리랑이 군가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실제로 1919년 11월 의열단 창단멤버 13명 중에서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이 김원봉, 윤세주,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등 5명에 이를 정도였다. 따라서 밀양을 한국독립운동의 성지로 부르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백민 황상규를 망각 속에 끄집어내어 오늘의 역사적 인물로 기억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황상규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이다. 백민 황상규의 삶을 가만히 추적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41세의 짧은 삶을 오롯이 민족 독립운동에 바쳤다는 사실과 일생을 항일투쟁과 독립의지로 견결하게 일관하였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나 유명한 독립운동단체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중심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오늘의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고 대중의 기억 속에 잊혀진 망각의 인물이지만 황상규의 삶과 죽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처연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대중의 벗으로 항일독립운동의 공적이 출중했으며 성격이 지극히 강직하고 용감했다. 삼국지 관우의 풍모를 닮았다고 별명이 관운장일 정도로 기개가 웅장했다.


실제로 백민 황상규는 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 계획(1920) 당시 30살의 나이로 젊은 의열단원들과 함께 몸소 국내로 잠입해 거사에 참여한다.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를 직접 폭파하겠다는 열정으로 20대 초중반 의열단원들과 행동을 같이한 것이다. 불행히도 황상규는 거사 며칠을 앞두고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김태석 경부에게 피검된다. 구영필 등 내부밀고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7가살(七可殺)의 대상으로 지목해 처단하고자 했던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의 촉수에 걸려든 탓이다. 조선인 고등계 형사들의 고문 과정은 상상의 초월했다. 1949년 반민특위 재판 당시 조선인 경찰 황옥은 김태석의 잔인함을 증언한 적이 있다. 황상규가 입을 열지 않자 혀를 3촌(寸)이나 잡아 빼는 악형을 저질러 거의 초주검을 만들었다. 황상규는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김태석의 잔혹한 고문에도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결국 황상규의 피의사실은 다른 의열단 관계자들을 취조하여 얻어낸 것으로 거의 백지 기소한 셈이 되었다. 평소에도 백민 황상규는 독립운동을 하다 죽을지언정 집안에서 평안히 죽지는 않겠다고 독백처럼 되 뇌였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백민 황상규는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이다. 약산이라는 아호도 황상규가 지어준 것이다. 약산이 중앙고보 시절 절친한 선후배인 약수 김두전과 의형제를 맺게 해준 이도 황상규였다. 김원봉, 김두전, 이명건 세 친구에게 '조국의 산처럼(若山), 물처럼(若水), 별처럼(如星)'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라는 뜻에서 아호를 지어준 이가 황상규였다. 세 친구 모두 식민지 치하에서 지조를 지켰고 각기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 친구 모두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월북한다. 이승만 정권의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엄혹한 정세 속에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 김약산은 진보진영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공동의장을, 김약수는 국회부의장을, 이여성은 여운형과 함께 조선인민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 등 중도좌파의 정치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모두 남쪽에선 친일세력들에 의해 거꾸로 청산을 당했다. 김원봉은 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에게 체포돼 뺨을 맞고 모욕을 당했으며 국회부의장 김약수는 조작된 공안 사건인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피검된다. 이여성 역시 백색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월북 후 세 친구 모두 북쪽에서 김일성 정권에 의해 숙청당함으로써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이 된다.


백민 황상규는 빈궁한 농촌 집안에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질 못했다. 초등교육을 몇 년 수학하다가 동화중학교로 편입한 것이 정규 교육의 전부였다. 강직한 항일 독립지사였던 전홍표 교장 등 동화중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은 황상규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화중학교는 밀양 지역에서 내로라 할 정도로 민족교육을 실천했던 대표적인 사립학교였기 때문이다. 이후 황상규는 독학하여 지식을 섭렵해 나갔다. 황상규는 18살 때 밀흥야학교 교장인 김주익의 누이동생과 결혼한다. 그리고 19살의 나이에 밀흥야학교 체조교사로 부임한다. 밀흥야학교 교장 김주익은 김원봉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김원봉은 황상규에겐 처조카인 셈이다. 황상규는 동화중학교 졸업 후 동화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바로 황상규의 제자들이 의열단원들인 김원봉, 최수봉, 김상윤, 윤세주 등이다. 백민 황상규는 의열단원들의 정신적 멘토였고 의열단을 기획하고 창단시킨 주체였다.


오늘날 의열단 창단의 주체나 의열단 초대 단장으로 김원봉을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일제 경찰의 신문 자료에 의존한 것이거나 해방 공간 소설가 박태원이 쓴 <약산과 의열단>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경찰 자료는 1차 사료이긴 하나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문제점이 있다. 또한 해방 직후 나온 <약산과 의열단>은 전적으로 김원봉의 진술에 의존하여 기술된 책이다. 해방 공간 정치지형과 김원봉의 위상을 생각할 때 감안해서 읽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의열단 창단 당시 김원봉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서 이렇다 할 투쟁 경력이 거의 전무한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김원봉의 스승이자 고모부인 백민 황상규는 일합사 - 풍기광복단 - 대한광복회 - 대한독립의군부 조선독립군정사(길림군정사) 재무부장-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서명자 -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 -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길림지부 회계과장을 역임하는 등 1910년대 투쟁경력이 출중했다. 특히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최연소 간부를 맡았다. 이미 20대 시절 황상규의 투쟁 경력은 김원봉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화려함을 넘어서 출중했다. 황상규 사망 당시 신문에도 황상규를 의열단 초대 단장 또는 의열단 제1세 단장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더구나 황상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로서 조용은(소앙) 조용주 형제가 기초한 무오독립선언서의 39인 서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은 하나같이 명망 있는 걸출한 독립지사들이었다. 신채호, 김규식, 이동휘, 김동삼, 김좌진, 이시영, 안창호, 유동열, 이승만, 조소앙 등이 그렇다. 39인 서명자 중 황상규가 포함된 것은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 그의 위상을 가늠해 보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황상규가 길림으로 김원봉을 불러들였고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는 작탄·의혈투쟁을 설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김원봉은 일제와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선 군사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본인 스스로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인이 세운 덕화학당을 다녔었다. 그러나 군대양성은 많은 시일이 걸리는 것으로 황상규의 지도에 설득되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7천 명이 일경에 의해 피살된 3·1운동의 참담한 현실 앞에 운동 일각에 패배주의가 적잖이 스며든 게 현실이었다. 따라서 황상규는 3·1운동 이후의 패배주의를 넘어서서 조선 민족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항일의식을 지속적으로 표출하는 무장투쟁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은 황상규 자신이 20대 젊은 시절 풍기광복단-대한광복회 활동을 통해 일관되게 견지해 온 투쟁 방침이었다. 적의 심장부를 강타하여 조선 민중이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었다. 식민 통치의 핵인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수탈의 첨병인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파괴함으로써 조선민중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시키고 조선 민중에게 항일의지를 더욱더 고취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1919년 11월 의열단의 결성은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황상규의 기획 아래 추진된 작품이었다. 김원봉은 황상규의 지시에 따라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젊은 열혈 동지들을 규합해 온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황상규는 언행일치의 수범을 보이기 위해 의열단의 첫 작품인 제1차 암살・파괴 작전(1920)에 따라 폭탄 반입과 함께 국내에 침투함으로써 몸소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백민 황상규는 1913년을 전후하여 밀양에서 결성된 일합사에 가입한다. 일합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는 뜻으로 항일비밀결사조직이었다. 밀양을 중심으로 대구-마산과 연계된 조직이었다. 밀양의 3・1 만세 시위는 경상도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일합사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황상규는 활동의 범위를 넓혀 1914년 같은 밀양 출신 김대지와 함께 대한광복단(일명 풍기광복단)에 가입한다. 풍기광복단은 채기중이 중심이 되어 유창순, 한훈, 강순필 등 일제와 의병전쟁을 벌이다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에 쫓겨 경북 산간 오지인 풍기로 흘러들어온 의병 출신들로 구성된 비밀결사체였다. 군자금 수합과 무기구입을 통해 작탄 의혈투쟁, 즉 일제와 무장투쟁을 꿈꾸었던 항일조직이었다. 풍기광복단은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이 주도해 만든 조선국권회복단과 결합해 대한광복회를 결성한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등 함경도를 빼고 전국적으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조직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비밀결사체로 '국권을 되찾기 위해 죽음으로써 결심하고 원수 일본을 완전히 구축하기로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회원들끼리 혈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 4대 강령인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을 묵묵히 실행에 옮겼다. 대한광복히 회원들은 행형부(行刑部)를 두어 수시 수처에서 일본 고관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무장력을 갖추는 대로 일제를 섬멸키 위한 살육전을 준비했다. 친일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으고 일본인이 불법 징수한 세금을 탈취하는 등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그리고 만주 신한촌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광복회는 신한촌의 국내조직이었고 대한광복회의 해외 분신이 신한촌이기도 했다. 대한광복회는 군대조직을 갖췄는데 총사령에 박상진이 추대되었다. 박상진은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의 제자로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최초로 처형당하자 박상진은 스승 허위의 시신을 손수 거두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양정의숙에서 근대학문인 법률을 공부하여 판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그만 두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등 만주기행과 중국의 신해혁명을 성공시킨 손문을 만났다. 대한광복회가 추구한 정체가 공화주의임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황상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심복일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황상규는 20대 젊음을 오롯이 조국 광복에 바쳤다. 그러나 1917년 경북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 장성택의 부친) 처단의 배후로 박상진이 체포되고 대한광복회 실체가 노출된다. 1918년 1월 충청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대한광복회원들이 처단한 지 3일 뒤 대한광복회 충청도 지부 책임자인 장두환이 전격 체포된다. 충청도 지부는 대한광복회 조직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부이자 대한광복회 산하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다. 충청 지부 책임자 장두환이 피검되면서 지도부가 연이어 피검되고 대한광복회는 와해된다. 황상규는 대한광복회 주요 인물들이 일경에 피검되고 수배 대상이 되자 1918년 2월-3월 사이 북만주 길림으로 김급 피신한다. 이른 바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국내 독립운동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한광복회 만주 지부(광복회 부사령 김좌진)로 피신한 황상규는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19년 2월 여준, 조소앙, 박찬익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의 결성은 그러한 결실이었다. 황상규는 최연소 간부로서 재무부장의 직책을 맡는다.


대한독립의군부는 대종교 계통의 대한정의단과 통합하면서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를 탄생시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 바로 그 단체이다. 황상규는 북로군정서 길림 분서(길림군정서) 재무부장의 직책을 맡아 군자금 출납 업무를 담당했다. 백민 황상규의 20대 시절은 일합사 – 풍기광복단 – 대한광복회 – 대한국권회복단 –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이어지는 무장투쟁으로 일관한다. 의열단 1차 암살·파괴 계획이 좌절되고 황상규는 징역 7년을 언도 받고 6년을 복역한다. 그렇게 황상규는 30대 전반기를 감옥 생활로 보내고 1926년 4월 출소한다. 출소 후 황상규는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서 가족들과 해후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차녀 기화가 1918년 3월에 죽었고 차남도 영양실조와 제때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해 어린 나이에 죽는다. 뒤늦게 알게 된 가족사 앞에 황상규는 아비로서 참담한 심정이었다. 황상규는 차녀의 사망신고를 1928년에 한다. 호주제 사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온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의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황상규는 마음을 추스르고 출소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27년 3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밀양 지역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의 중심으로 성큼 발을 옮긴 것이다. 1927년 5월 밀양 청년 운동의 대부 김병환과 밀양 군청 이전 반대 대책위원으로 활동한다. 다수 군민들의 이해와 편리보다는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의 편익을 위해서 밀양 역전으로 군청을 이전하려던 계획을 철회시켰다. 밀양 농잠학교 맹휴 사건이 발생하자 교섭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밀양 여자청년회에서 운영한 밀양여자야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활동하는 등 밀양 지역 민족운동, 사회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중외일보가 열악한 재정난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항일민족언론으로 키워내려는 백산 안희제의 중외일보 주식회사 전환운동에 동참하였다. 황상규는 밀양 지역에서 유일하게 중외일보 주식을 사서 항일언론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실천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후 1927년 12월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을 통해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된다. 신간회 밀양 지회 부지회장이 밀양 청년 운동의 대부 김병환이고 윤치형, 윤세주 등 의열단 관련자들이 대거 신간회 밀양 지회 지도부를 구성한다. 신간회 밀양지회는 다양한 지역 운동,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 1900년대 밀양지역 민족 운동의 중심은 밀양 지역 양반 사족 문중들이었다. 그렇지만 1910년대와 1919년 3·1 만세운동을 거치면서 일제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이끌었던 의열단 등 신진 항일 세력들이 밀양 지역의 여론주도층으로 부상한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서 적어도 여론주도층의 변화에서 봉건적인 사족 양반 계층의 쇠퇴와 신진 항일세력의 진출이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


황상규가 신간회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회원수는 50명에서 130명이 넘게 증가한다. 황상규는 밀양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지역 주민의 소비경제활동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지역 주민과의 소통과 신뢰, 그리고 협력을 쌓아 갔다. 그리고 봉건적인 잔존 유림 세력들의 밀양읍주지 간행 등을 혁신유림 세력들과 연대해 저지시킨다. 반면에 1928년 4월 지역 현안 문제로 떠오른 국농소 소작쟁의 사건을 대중노선에 입각하여 적극적으로 지도해 내질 못한다. 국농소 분쟁이 지주와 소작인 간 발생한 분쟁이기보다 신·구 소작인 간 발생한 복잡한 성격을 지닌 탓도 있었다. 1928년 신간회 밀양지회는 관북 이재민 동포 구제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응당 운동의 중심은 황상규였다. 곧 이어 황상규는 신간회 제2회 정기대회 사회를 보았고 2주년 창립기념식 행사까지 치렀다. 신간회 밀양 지회장 황상규로서는 연일 강행군이었다. 창립대회 직후 밤 10시 ~ 12시까지 진행된 신간회 신임간사회의를 주재하는 등 강도 높은 활동을 지속하였다.


신간회 밀양지회는 경제 – 역사 – 한글강습 등 일상적인 교양강좌를 개설한 것 외에 경북 한재 구제 모금운동 차원에서 음악회를 개최한다. 밀양 지역 청년·농민·여성·노동 운동을 추스르고 지역 부문 운동과 연대하면서 1920년대 후반 밀양지역 민족운동의 중심에 우뚝 섰다. 1929년 들어 일제의 탄압으로 신간회 전체 대회를 개최할 수 없게 되자 신간회 중앙 본부는 복대표대회를 통해 이를 대체하고자 했다. 이에 황상규는 신간회 양산지회, 밀양지회, 울산지회를 대표하는 1인 복대표로 선출된다. 1929년 6월 28-29일 서울 YMCA에서 개최된 복대표대회에 참석하고 신간회 전형위원으로 선출된다. 또한 압도적 득표로 신간회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허헌) 서기장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황상규는 고문후유증에 따른 신병을 앓고 있었기에 중책을 고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2기 허헌, 황상규 집행부는 140개가 넘는 다양한 지회의 요구사항을 처리하고 전국현안에도 즉각 대응하였다. 황상규는 본부 집행부 위치에서 지방 순회강연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7월에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방화한 갑산 화전민 방화사건 보고대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항의 차 총독부 항의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신간회 밀양 지회와 밀양 청년동맹 간에 갈등이 폭발하자 급히 밀양으로 내려가 이를 조정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이미 황상규는 결핵성 복막염이 악화되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와병 중임에도 황상규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서기장, 서무부장 등 1인 3역을 소화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은 황상규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는 즉각 진상조사단을 광주로 급파했다. 허헌(위원장), 황상규(서기장), 김병로(재무부장) 3인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11/월 9일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 광주고보 학부형과 광주경찰서, 광주지검을 방문해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을 훈방 조치한 반면 광주고보 조선인 학생들을 구속한 처사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항의하였다. 진상조사를 마치고 상경한 뒤 곧장 황상규는 20차 중앙상무위 회의에서 사건 진상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진상보고서 작성 발표와 광주학생 사건을 대하는 일제의 민족 차별적 태도를 비판하고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연설회 개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광주 전남 지역 학생 맹휴와 시위가 계속되었고 12월에 접어들자 서울에서도 격문 살포와 학생 시위가 촉발되었다. 광주 학생사건을 대하는 일제의 불공평한 태도가 지속되자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일본인 교사 축출', '민족 차별교육 철폐'를 외치며 광주학생운동을 항일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키는 전기를 맞는다.                   


그리하여 신간회 본부는 12월 14일 안국동 네거리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일제의 불허로 민중대회는 개최되지 못했고 대회 전날 새벽에 허헌을 비롯해 신간회 지도부와 회원 수십 명이 경찰에 연행된다. 당시 황상규는 체포를 면했다. 그것은 병세가 뚜렷하게 악화된 12월 5일 황상규는 이미 밀양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백민 황상규는 고향으로 내려가 투병생활을 지속하지만 낙향한 지 1년 9개월이 지난 시점인 1931년 9월 2일 밤 자택에서 운명한다. 제1차 의열단 암살・파괴 계획 당시 받았던 고문 후유증인 폐결핵과 복막염이 악화되면서 결핵성 질환으로 운명한다. 황상규가 운명한 직후 집안에는 70이 넘은 노모와 출가한 장녀, 그리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든 장남과 6살 막내아들을 가진 부인만 남겨졌다. 궁색할 정도로 궁핍한 가정 형편과 함께!


장례 당일 수많은 만장 속에 1만 명이 넘는 조문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밀양 13개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치러진 백민 황상규의 영결문 낭독 때엔 조문객들이 대성통곡했다. 독립운동의 거목이자 밀양지역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진 슬픔과 상실감 때문이었으리라. 일본제국주의는 밀양경찰서 전 병력을 동원한 것도 모자라 경북도경에 병력 증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장례행렬이 어느 순간 시위행렬로 전환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일제 경찰은 군중봉기에 대해 전전긍긍하였다. 장례 이튿날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도 안재홍, 권동진, 김병로 등 200명이 넘는 항일지사들이 모여 엄숙히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한국독림운동사에서 일합사 - 풍기광복단 - 대한광복회 - 북로군정서 - 신간회 활동 등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임에도 한국사 교과서 어디에도 황상규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지조와 신념, 그리고 강직한 풍모를 지닌 선비형 용장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인물임에도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스승이자 석정 윤세주 등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대부인 백민 황상규의 위상을 오늘날 재조명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못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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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학교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등록하였습니다. 교직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는 만큼 이 땅의 교육문제에 대해 나름의 소신과 철학이 있기에 교육분야에 대한 글을 써서 기사화함으로써 좀더 많은 독자들과 문제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등록은 2년 전에 해놓고 기사 한 번 쓰질 못했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올해에는 꼭 좋은 기사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