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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세량지의 봄.
 화순 세량지의 봄.
ⓒ 윤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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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고운 입김처럼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안개는 물속에서 달처럼 떠올랐다. 아니 그대 그리운 얼굴처럼 올랐다가 그대가 뿌린 기억처럼 흐리게 번졌다. 찰칵, 찰칵... 그대를 놓치지 않으려, 그대와의 기억을 저장하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대는 이제 잊히지 않는 얼굴이 되었는가. 그대와의 기억은 앞으로 삭제할 수 없는 영원이 된 것인가.

망연하게 바라보는 가을 세량지의 아침 풍경이 그해 봄날 아침의 풍경과 한 치 다름이 없다. 그 봄에도 안개는 물속에서 걸어 나와 초록의 나무와 연분홍 산벚꽃 사이를 착하게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저 물속에 안개의 신궁(神宮)이 있나 보다. 안개는 가을에도 어김없이 물속에서 걸어 나와 분홍빛 단풍과 삼나무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안개만이 유일하게 봄과 가을을 오가고, 그대와 나를 오가고, 어제와 내일을 오간다. 가을 속에 봄이 있고, 봄 속에 가을이 있다. 봄과 가을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어떤 터널을 안개가 알고 있는 것일까? 안개를 따라 한참을 가 본다. 안개는 그 어떤 터널로도 들어서지 않았다. 안개는 터널을 따라 오간 게 아니었다.

안개는 스미고 번진 것이다. 봄이 가을로 스며들어 번지고, 가을이 봄으로 스며들어 번지고, 그대가 내게 스며들어 번졌던 것처럼. 안개, 환장할 사랑의 물매(物媒). 안개는 스미어 번지기에 그 어디에 갇히지 않는다. 사랑이 통제할 수 있는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듯. 안개는 스미어 번지기에 행로를 예측할 수 없다. 사랑이 답이 뻔한 일차방정식의 운명이 아닌 것처럼.

안개가 스미어 번져 계절의 물매가 되고, 사랑의 물매가 되고, 아린 기억의 물매가 되었다. 세량지 안개가, 세량지 물안개가.... 우리도 안개로 만날 수 있을까.

세량지는 전남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에 있다. 마을 이름 세량리는 '샘이 있는 마을'이란 뜻을 가진 '새암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를 듣다 보면 이 땅에서 먼저 살았던 이들은 얼마나 이치(理致)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자연의 이치를 따라 마을을 만들고, 사람의 이치를 생각하며 마을공동체를 꾸렸다.

이치는 서로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짓거리란 상대의 존엄성을 짓뭉개는 행태다.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잘 새겨두어야 이치에 맞지 않는 짓거리를 추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존엄성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이 물음엔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저자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에게서 답을 찾는 게 편하겠다. 페터 비에리는 소설가이기 전에 철학자다. 그는 <삶의 격>이라는 저서에서 존엄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첫째,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둘째,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화순 세량지의 가을.
 화순 세량지의 가을.
ⓒ 윤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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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아무리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떠드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자라면 그는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다. 상대를 대하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페터 비에리는 "상대방을 폄하하는 것뿐 아니라 마땅히 그를 인정해 주어야 할 때에 인정하지 않는 것" 역시 "존엄성의 훼손"이라고 꼬집었다. 하물며 입만 열면 자존감을 떠드는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사랑 또한 마찬가지리. 나를 존귀하게 여길 줄 아는 이가 다른 사람도 귀하게 대한다. 상대를 존귀하게 대해야 나 역시 존귀하게 대우 받는다. 서로의 존엄을 지키는 관계의 격, 그것이 참사랑이 아닐까. 그 좋은 본보기가 화순 세량지다.

물 좋은 세량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든 때가 1969년. 제방 길이 50m에, 제방 높이는 10m에 불과하니 말 그대로 동네 작은 저수지가 바로 세량지다. 이 작은 동네 저수지에 해마다 사진작가를 비롯 수십 만 여행객이 찾아 온다. 특히 CNN은 '한국에서 꼭 가 봐야 할 50곳' 가운데 한 곳으로 세량지를 추천했다. 세량지의 그 어떤 치명적인 매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찾게 만드는 것일까.

세량지는 키낮은 동산과 구릉, 소담한 마을과 오붓하게 어울려 있다. 그 중 어느 하나 상대를 위압하거나 깔보는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서로 오붓하게 어울려 이룬 관계의 격이 세량지 풍광의 격이다.

봄에 산벚꽃 지천이어도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물을 해하는 법이 없다. 삼나무 사철 푸르러도 다 진 벚꽃을 조소하는 일이 없다. 5만 톤 넘는 물을 품고도 그 위력으로 인간의 마을을 위협하지 않는다. 비록 작은 동네 저수지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존대할 줄 알고, 서로 인사할 줄 아는 관계의 격을 품고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안개는 다시 어디론가 스며들고, 세량지는 벌겋게 햇님을 품기 시작한다. 새벽길 나섰던 이들은 돌아가고.... 마을사람 몇이 도로 건너 겨울논으로 무담시 출타하는 사이 서울에서 왔다는 20대 초반의 두 여성이 세량지에 들어온다.

아무도 말이 없다. 달 대신 해를 품은 물도, 이른 서리 털어내는 나무도, 꼬리만 남은 구릉의 그림자도, 그저 쉬고 싶어 떠난 사람도.... 서로의 어깨를 토닥토닥 어루만질 뿐. 애썼다, 애썼다, 애썼다.

 화순 세량지는 CNN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한 곳이다.(세량지의 풍광과 그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합사)
 화순 세량지는 CNN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한 곳이다.(세량지의 풍광과 그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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