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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난 12월 1일 등록돼 일부 수정 보완을 거쳐 3일 정식 기사로 채택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다른 언론사와 달리 시민기자와 충분한 소통이 필요해 기사 검토에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습니다. 검토 단계에서 이미 많은 독자분들이 큰 관심을 보여주셨고 추천도 해주셨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말]
 영화 <베테랑>에서 재벌 3세 조태오 역을 맡은 배우 유아인
 영화 <베테랑>에서 재벌 3세 조태오 역을 맡은 배우 유아인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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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핫한 유아인 사태는 결국 유아인 죽이기로 이어지는 것 같다. 진보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유아인을 '찍어누르는' 형국이다. 

이번 사태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폭력적 미러링에 대한 용인'이다. 개별 사안에서 미러링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정말로 타당한가에 대해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논의하려 하지 않고, 정답을 미리 정해두고 그것이 옳다고 가르치려 들고 '찍어누르는', 자신의 권력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 담론권력 기득권자들의 횡포. 젠더권력 프레임은 언제부터 근의 공식이 되었는가.

어느 사회 어느 공간에나 혐오는 있어왔다. 매카시즘이든 나치즘이든 서북청년단이든. 그런데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임에도 일베와 메갈을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일베의 행동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규정되지만, 메갈이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했을 때는 '오죽했으면', '그럴 수도 있는', '가부장제를 바꾸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으로 용인된다. 거울상에 비친 모습이 끔찍한 건 원본이 징그럽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모든 언론이 그러하듯, 거울에 무엇을 비출지에서부터 정치적 판단은 들어간다. 그 거울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많은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에서 일베의 행동은 '부당한 폭력'이지만 메갈의 행동은 '정당한 투쟁'으로 다뤄진다. 그리고 일베의 피해자는 '온전한 피해자'이지만, 메갈의 피해자는 '진보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부작용과 일탈', '그 동안 가부장 권력의 가해자였던만큼 감내해야 하는 고통'으로 치부된다. 모든 개별 사안에 대한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젠더권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구조주의에 대한 절대적 신봉의 시기는 지나간지 오래이건만. 즉, 지식인들의 메갈 편들기는 그들의 폭력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정당화면서, 개별 사안에 대해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정치적 타당성'을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충분한 대화없이 정치적 올바름을 미리 결정해버리는 담론권력의 횡포라고 생각한다.

메갈의 행동보다도 내가 가장 부당하게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진보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지금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유아인을 소비하는 일방적인 방식은 '가부장제의 가해자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제의 권력관계를 제대로 깨우치고 대오각성 하지 않은' '특권을 누렸음에도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한 가해자'로 프레이밍하며 담론권력에서의 우위를 활용해 그를 찍어누르는 방식이다. 애호박에 대해 한남으로 응대한 이 개별사안의 문제를 개별사안으로 다루지 않고 끝없이 끝없이 추상화하여 구조적 문제로, 즉 그를 벗어날 수 없는 가해자이자 반박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배우 유아인이 지난 11월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배우 유아인이 지난 11월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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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을 젠더폭력으로 해석하는데 동의할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고 논의를 진행해보자. 젠더폭력이 맞다 한들 이를 다루는 지식인들의 방식은 적정 수준을 넘었다. 이 사안에는 과연 젠더권력만이 유일한 권력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유아인이 숱하게 제시한 대로, 이 사안에서는 집단과 개인 사이의 권력, 익명과 기명 사이의 권력, 평가하고 평가받는 자 사이의 권력, 경제권력, 소비자권력, 담론권력이라는 다양한 권력장들이 교차하며 서로 힘과 영향을 주고 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란 말에서 느껴지는 폭력성과, 미러링이란 이름으로 퍼부어지는 집단의 폭력, 담론권력의 폭력 중 이 사안에서는 무엇이 더 폭력적이고 위압적이고 한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하는가. 최소한 나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여성들이 느끼는 위협과 두려움은 상상이상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반박할 건가. 그렇다면 불특정 다수 집단의 폭력 앞에 자신의 밥줄을 걸고 실명으로 노출된 한 개인의 위협과 두려움이 그보다 적고 사소한 것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판단하는가.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불능 상태로 만들 때 우리는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현재 유아인에게는 '누가 진짜/가짜 페미니스트를 규정하는가'라는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누가 감히 진짜/가짜 여성을 규정하는가. 나는 미러링을 반대하는 여성이고  메갈은 나를 '위장남성(흉자)'으로 규정한다. 투쟁의 혜택은 결국 함께 누릴 것이면서 혼자만 고고한 척 한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남성은 가해자이므로 비판할 수 없고, 나와 같은 사람은 위장남성이라서 비판할 수 없다면 누가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가. 페미니즘의 '이름'은 언제부터 비판 불가능한 '성역'이 되었는가. 여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들의 편가르기와 진짜/가짜여성의 구분과 가해는 정말로 정당한가. 누가 감히 나를 '가짜여성'으로 규정하는가.

또 나는 메갈을 편들며 '깨어있는 한남'으로 포지셔닝하는 남자들에 화가 난다. 나는 여성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폭력 아래에 있는 약자'로 '타자화'하는 남성진보지식인들의 배려를 원치 않는다. 나는 여성을 미지의 존재로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사양한다. 나는 당신들의 '일방적 배려와 대신 말해주기' 대신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동등한 인격', '잘못이 있다면 책임져야 하는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받기 원한다. 모든 고통은 개인 안에서 절대적이나, 함께 살기 위해서는 경중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성의 무한한 신성화'만큼이나 '피해의 무한한 신성화'도 여성을 박제한다.

나는 모든 것을 '근의 공식'에 대입해서 끝도 없이 추상화하는 가짜 지식인들에 반대한다. 일단 주어진 문제가 이차방정식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나서 근의 공식을 대입하자. 페미니즘은 캐논이 아니다. 반박이 곧 신성모독일 수는 없다. 함부로 신성모독을 했다가 '파문'당할까 두려운가. 헌데, 메갈을 옹호하는 잃을 것 없는 지식인들보다 밥줄을 걸고 싸우는 저 배우가 내게 더 '진정성'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치즘 태동 당시의 독일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전쟁배상금과 인플레이션에 고통받으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했다. 북한의 체제선전영화도 애국, 헌신, 절제같은 숭고한 가치들을 이야기한다. 추구하는 가치의 옳음만이 아니라 그 방법과 정도의 적절성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름 위에 있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나는 가부장제 철폐가 모든 가치 위에 있는 절대선이 아니라, 다른 가치들과 함께 경합해야할 여럿 중 하나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헌데 지금 담론장에서 페미니즘은 모든 논의를 종결하는 마침표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번 사태에서도 미러링을 지지하는 진보지식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구체적인 사안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장 안에서는 이미 주류가 된 페미니즘의 프레임만을 '무성찰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다른 모든 권력관계는 고려하지 않는 성찰불능 상태의 '속물'은 아닌가. 자신의 주어진 책무에 무성찰적으로 성실했던 아이히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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