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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서부 루아르(Loire) 강변에 세워진 낭트 성. 나는 낭트성 안 궁전에 만들어진 역사박물관 답사를 마치고 낭트 성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낭트 성 안의 마당은 거칠 것 없이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마당을 둘러싼 성벽과 성 안 마당에는 견학 나온 낭트 시 초등학생들과 몇몇 여행자들이 여유 있게 발길을 옮기고 있다. 낭트 성이 요새와 궁전으로 사용됐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오갔을 곳을 나는 주변의 프랑스 사람들처럼 여유 있게 걸어 다녔다.

성 안에 들어와서 성의 모양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니 성벽은 불규칙한 오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성 밖을 향해 볼록하게 튀어나온 육중한 원형 망루가 있다. 가상의 적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감시하고 적에 대한 공격이 용이하도록 만들어놓은 망루이다.

돌계단을 통해 성벽에 올라서면 성벽 길을 따라 한 바퀴 답사를 할 수 있다.
▲ 낭트 성 성벽 돌계단을 통해 성벽에 올라서면 성벽 길을 따라 한 바퀴 답사를 할 수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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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이 망루와 성벽 위까지는 누구라도 모두 올라가볼 수 있도록 돼 있었고, 여러 돌계단이 성벽 위로 연결돼 있었다. 성벽 위로 인도해주는 편리한 엘리베이터도 있었지만 나는 돌계단을 따라 역사적인 성벽 위로 올라갔다. 수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밟고 올라갔을 돌계단 위에 나도 나의 발걸음을 올렸다. 역사의 현장과 연결되는 돌계단은 세월의 무게 속에서 짙은 회색으로 퇴색돼 있었다.

나는 성벽 위에서 낭트 성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백여 년 전에 세워진 성벽인데도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망은 시원하기만 하다. 낭트 시의 동부가 한눈에 펼쳐져 보인다. 초고층 빌딩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전망은 아니지만 현재까지도 주변의 낭트 시 구시가를 살펴볼 수 있도록 전망이 탁 트여 있다.

낭트 성 성벽 아래에는 중세의 건축물들과 함께 붉은 단풍을 볼 수 있다.
▲ 낭트성 단풍 낭트 성 성벽 아래에는 중세의 건축물들과 함께 붉은 단풍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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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이 달리는 큰길과 광장, 공원, 분수, 성 주변의 중세시대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안개가 낀 듯한 하늘 아래로 펼쳐지는 운치 있는 주택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이미 겨울로 들어섰지만 성벽을 호위한 나무의 붉은 단풍도 어우러져 평화롭기만 하다. 어쩌면 이리도 운치 있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성벽 너머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설적인 비스킷을 만드는 쁘띠-뵈르(Petit-Beurre) 공장이다. 프랑스의 유명 과자 브랜드인 LU(Lieu Unique)가 시작된 공장이다. 비스킷을 만드는 공장이 화려한 중세 시대의 궁전같이 웅장하니 낭트 인들의 저력이 어디까지인지 놀랍기만 하다.

LU(Lieu Unique) 비스킷을 만드는 쁘띠-뵈르(Petit-Beurre) 공장이 내려다 보인다.
▲ 비스킷 공장 LU(Lieu Unique) 비스킷을 만드는 쁘띠-뵈르(Petit-Beurre) 공장이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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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뵈르 공장은 원래 쌍둥이 성인데 그중 한 개의 성이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돼 버렸다. 당시 없어진 쌍둥이 성에서 문패 역할을 하던 LU 브랜드 기둥은 용케 파괴되지 않고 낭트 성 역사박물관에 별도로 전시돼 있다. 비스킷 공장의 유물을 박물관에 전시할 정도로 이 비스킷 브랜드는 낭트 시민들이 아끼는 자랑거리이다.

이 비스킷 공장의 1층은 현재 도서관, 식당 등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에도 낭트 시민들이 애용하는 건축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요즘 서울에서도 산업시설 유산을 다시 되살려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활동이 시작되고 있는데, 프랑스는 이런 문화적 방향에서는 다른 나라들을 훨씬 앞서가는 선진국이다.

내가 계속 걸어가는 성벽 위의 길은 마치 한양도성 순성길 같이 성의 한 바퀴를 모두 돌아볼 수 있는 훌륭한 길이다. 나는 성벽 위의 길을 따라 나를 재촉하는 시간을 잊어버리고 산책했다. 나무판재 같은 반듯한 장방형 석재가 보도블록 같이 깔린 성벽 길은 쾌적하면서도 고즈넉하기만 하다. 깔끔한 성벽 길은 깨끗하게 빛나는 낭트 시와도 잘 어울렸다.

성벽을 돌다 보면 낭트 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세한 안내문들을 만날 수 있다.
▲ 성벽의 안내문 성벽을 돌다 보면 낭트 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세한 안내문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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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길 곳곳에는 성 안의 건축물들에 대한 상세한 안내문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낭트 성 성벽 길 한 바퀴만 돌아도 낭트의 중세 역사와 낭트 성의 구조, 내력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성벽 길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길을 걷는 이는 나 혼자뿐이다. 나는 마치 낭트 성의 중세 역사 속으로 홀로 들어가는 것 같은 묘한 경험을 했다. 간혹 나타나는 CCTV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어느 시대의 어디를 걷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헷갈렸을 것만 같다.

성벽 길을 걷다 보면 성벽 사이에 좁고 기다란 틈새가 보인다. 이 틈은 총구를 내밀어 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세시대의 군사적인 시설물이다. 17세기에 낭트 성이 프랑스 왕실 소유가 된 이후, 18세기에 낭트 성은 프랑스 군의 완전한 군사 주둔지가 되면서 낭트 성의 군사적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낭트 성은 과거 군 주둔지로서의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 군 주둔지 낭트 성은 과거 군 주둔지로서의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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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존돼 오던 낭트 성은 18세기에 군사 주둔지가 된 이후 원형이 조금씩 손상되기 시작했다. 궁전 건물 안에 설치했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화약고와 함께 화약고 위의 탑 한 개가 통째로 무너질 정도로 군 주둔 당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봤다. 1915년에 낭트 성의 소유권이 브르타뉴 지방 당국에 넘어가면서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게 되자 낭트 성은 시민들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됐다.

성벽 위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서 보는 성 내부는 시원스럽게 넓다. 넓은 성 안 마당에 서서 보면 가장 잘 보존돼 온 유적은 바로 낭트 성 우물(Puit es)이다. 궁전의 수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었을 우물 위 석재는 사람의 손길에 닳아서 반질반질하다. 우물 위에는 대공의 궁전임을 과시하는 철제 구조물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고 물을 긷는 데 사용했을 여러 개의 도르래가 지금도 걸려 있다.

낭트 성 대공 가문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우물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 낭트 성 우물 낭트 성 대공 가문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우물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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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물은 낭트 성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유물이다. 낭트 성의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본 이 우물은 아직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낭트 성에 견학 나온 어린 학생들만이 이 우물 주위에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이 우물을 사용하며 살아가던 낭트 성의 대공과 가족들, 그리고 이곳에 주둔하던 군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 우물만 중세시대 모습 그대로 남았으니 인생은 참으로 무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 안에서는 해마다 기획 전시회도 자주 개최하고 성 안 마당에서는 무대 장치를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한다. 낭트 성 내부 궁전 건물들은 역사박물관뿐만 아니라 낭트의 주요 유물들을 테마별로 전시하는 전시관(Exposition)으로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성 안의 대공 궁전이 죽어있는 유적지가 아니라 현재도 낭트 시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훌륭한 궁전 전시관이 돼 있는 것이다.

인도양의 트로믈랭 섬에 난파된 사람들의 유물을 전시 중이다.
▲ 낭트 성 전시관 인도양의 트로믈랭 섬에 난파된 사람들의 유물을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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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회색의 지붕에 옅은 갈색의 벽체를 가진 건물이 낭트 성 전시관 건물이다. 낭트 성 전시관 건물은 간결하면서도 모습이 단아해서 참으로 마음에 쏙 들어오는 건물이다. 이 전시관 건물의 외벽에는 외롭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흑인의 뒷모습이 거대한 세로의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이 전시관에서는 '트로믈랭 섬(Tromelin Island)'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트로믈랭 섬은 인도양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로부터 450km 동쪽에 있는 프랑스령 무인도다. 이 섬의 이름이 프랑스에서 유명해진 것은 18세기 후반에 섬을 방문한 프랑스 전함의 함장 세발리에 드 트로믈랭(Chevalier de Tromelin) 때문이다.

트로믈랭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모리셔스(Mauritius)로 수많은 흑인 노예를 싣고 가다가 암초에 의해 배가 난파됐고, 생존한 탑승자들과 함께 뗏목을 타고 마다가스카르로 향하다가 이 황량한 무인도에 살아 남았다고 한다. 이 생존자들은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프랑스 군에 의해 구조됐다고 한다. 트로믈랭 섬이 너무 작아 섬으로 상륙할 선착장이 없었기 때문에 이 난파자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트로믈랭 섬의 바다거북과 생존자들이 살던 유적이 재현되어 있다.
▲ 트로믈랭 섬 유물 트로믈랭 섬의 바다거북과 생존자들이 살던 유적이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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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1700m에 폭이 700m밖에 되지 않는 모래톱의 섬. 이 작은 섬에서 난파자들은 어떻게 15년을 살아남았을까? 바다만 보이는 트로믈랭 섬은 난파자들에게 공포의 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산호초로 둘러싸인 섬 주변에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는 바다생물들이 그들을 삶으로 이끌었다. 섬 주변 바닷새와 바다거북이 그들의 목숨을 유지시켜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트로믈랭 섬을 조사해 보니 그들이 먹고 버린 바다거북의 등껍질이 발굴되었고, 그 거북의 등껍질이 전시관 중앙에 전시되어 있었다.

트로믈랭 섬은 현대의 프랑스 후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굴됐고, 그 유물들이 낭트 성 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섬 인근 바다 속에서 발굴된 유물 파편들과 함께 섬의 땅을 파서 발굴한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섬의 땅 속에서는 난파자들이 만든 주거지 유적이 마치 미로처럼 드러났고 그 유적이 전시관 안에 실물처럼 재현돼 있다.

유적 위에 재현된 그림 속에서 발굴단원들은 사람의 해골을 조심스럽게 발굴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 위의 모래 섬에서 진행되는 발굴작업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서 발굴 현장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전시관 어디에선가 들리는 인도양의 파도 소리는 전시관 내부를 몽환적 분위기로 만들고 있었다.

전시관 안, 트로믈랭 섬 안에서 하늘과 바다 쪽을 바라보는 영상이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함께 상영되고 있었다. 구조의 손길이 오지 않는 무인도에서 이들이 보았을 바다와 파도소리가 마치 현실인 양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참으로 감탄을 나오게 하는 살아있는 박물관 전시였다. 나는 낭트 성 전시관에 들어왔다가 난데없이 인도양의 한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듯한 감각 속에 들어와 버렸다.

트로믈랭 섬에 난파되었던 거대한 프랑스 전함이 전시되어 있다.
▲ 프랑스 전함 트로믈랭 섬에 난파되었던 거대한 프랑스 전함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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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난파됐던 프랑스의 거대한 전함도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이 전함 안에 얼마나 많은 상품이 실려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배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당시 삼각무역을 통해 아프리카 노예들을 상품으로 싣고 가던 거대한 전함이었으니 최대한 많은 노예들이 이 배 안에 차곡차곡 채워졌을 것이다.

이 전함이 난파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그 당시 벌거벗은 흑인 노예들이 배 안에 '상품'으로 실리는 모습부터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바닷속에 순식간에 수장되는 그림들이 사실 그대로 묘사돼 있다. 난파 후 살아남은 흑인 노예들이 모래섬 위로 기어 올라오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트로믈랭 섬의 역사를 알기 쉽게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전시되어 있다.
▲ 트로믈랭 섬의 역사 트로믈랭 섬의 역사를 알기 쉽게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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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과거 아프리카 흑인들을 탄압한 프랑스인들의 역사에 대한 태도이다. 노예무역을 하던 잔인한 과거를 조금도 은폐하지 않고 전혀 가감 없이 사실 그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렇게까지 자세히 사실을 알리는 역사에 대한 태도는 한 나라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켰을 것이다.

낭트 성을 나오는 내내, 바다 한가운데 모래 섬 위로 기어 올라오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태그:#프랑스, #프랑스 여행, #낭트, #낭트 성, #트로믈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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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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