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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속에서 후끈 열불이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까 휴대전화에 '육십몇만 원 넣을 시기가 됐다'고 문자가 뜨는 것 같던데, 혹시 대출받았어요?"
"네, 조금 필요했어요."

아내가 700만 원을 대출받았다. 일부는 불우아동 돕기에 쓰고, 나머지는 딸 산후조리를 위한 생활비와 가게 운영 등에 쓴 걸로 알고 있다. 비난이 의식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빚 얻는 건 딱 질색이다. 아내 또한 내 성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어, 금융 대출 같은 건 크게 자제해 온 거로 알고 있다.

기저귀 쓰레기 봉투. 어른 한 사람이 들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기저귀가 배출된다. 생활비와 쓰레기 배출량은 비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한가지만으로도 육아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기저귀 쓰레기 봉투. 어른 한 사람이 들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기저귀가 배출된다. 생활비와 쓰레기 배출량은 비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한가지만으로도 육아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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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경제생활은 상관하지 않는 게 그간 일종의 묵계여서 나는 아내의 한 달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를 자세히는 모른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아내 본인도 자신이 얼마 버는지를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서로 대략의 상한선 정도는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둘 다 구멍가게 자영업이라, 들쭉날쭉 월별 편차가 아주 심하다.

'왜 굳이 빚을 얻었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은 건 손자와 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내려온 지 두 달이 돼 가는데, 월 생활비가 곱빼기 아니 세 곱빼기 정도는 더 들어간다는 걸 나 또한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어렸을 때부터 돈 얘기에는 알레르기가 있었다. 대략 두어 달 전 부모님이 사실 집을 신축했는데, 건축사와 설계비 얘기를 하려니 괄약근이 옴죽옴죽해 혼났다. 안 꺼낼 수도 없고…. 돈 얘기하는 건, 특히 돈 얘기가 길어지는 건 나로서는 무조건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다.

일종의 '돈 장애'라고 할 수도 있는데, 갓 태어난 신생아 손자를 두고 이렇게 돈 얘기를 하려니, 신성한 생명에 더러운 돈을 갖다 붙여 죄스럽기까지 한 느낌이다. 어쨌거나 (내가 알기로는) 우리 집에서 이십몇 년 전 주택담보대출 말고는 이번 대출이 처음이어서 당혹을 넘어 살짝 충격이기까지 했다.

"돈 없어서 아이 못 낳는다"는 말은 거짓말?

부엌 한쪽에 놓인 젖병 소독기와 젖병, 수유 보조기구들. 이것들도 수십만 원 어치이다. 거실과 부엌 외에도 큰 방, 화장실, 보조 부엌 등 모두 5개 공간에는 손자가 생기면서 그간 우리 집에는 없었던 물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부엌 한쪽에 놓인 젖병 소독기와 젖병, 수유 보조기구들. 이것들도 수십만 원 어치이다. 거실과 부엌 외에도 큰 방, 화장실, 보조 부엌 등 모두 5개 공간에는 손자가 생기면서 그간 우리 집에는 없었던 물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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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기준으로 내 월수입의 '상한선'은 220만 원 정도, 아이 엄마는 150만 원쯤으로 추정된다. 둘이 사는 데 지금까지 이렇다 할 지장은 없었다. 지난해만 해도 이보다 둘 다 더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나이도 먹고,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의지도 없어서 둘 다 비즈니스 시간을 대폭 줄여가는 마당이다.

아이 엄마의 경우는 그나마 버는 돈 가운데 식료품 구입 비용 정도를 빼고는, 공주-대전 이동(약 100km)과 점심 식사 등에 수입의 나머지 전부를 투입하는 형편이다.

이번에 손자 출산과 육아비용으로 양가가 쓴 돈은 대략 1천만 원은 넘은 듯하다. '무슨 애 낳고 한 달 키우는 데 1천만 원이나?' 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손자가 태어나기 전에는 3백만~4백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1천만 원이면 내 기준으로는 초호화인데, 출산과 조리에 각각 3백만 원씩이 뭉텅이로 투입되면서부터 생각을 싹 바꿔먹지 않을 수 없었다.

돈 때문에 궁상떨 생각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분들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출산을 고려한다면 이런저런 비용으로 아무리 낮춰 잡아도 초기에 3백만~4백만 원 정도는 가볍게 깨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라고 말하고 싶다.

"'돈 못 벌어서 애 못 낳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사람이라는 게 각자 다 제 밥벌이는 하도록 태어난다"는 말도 잊지 않고 첨언하셨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 수입이 적으면 애 키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당사자 중 한 사람이 되고 보니, 젊은 사람들이 벌이가 안정되지 않아 결혼을 하고도 애 낳기를 미룬다는 말을 이해하게 됐다.

"아빠, 언젠가 돈 없어서 분유 훔쳤다는 부모 얘기를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정말 마음이 찢어지겠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딸은 출산과 육아 비용에 대해 나보다 훨씬 현실적인 추산을 했던 것 같은데, 막상 통장에서 하루 거르기 무섭게 돈이 쑥쑥 나가자 양육비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은 듯했다.

아동들의 '인간적인 삶'이 보장돼야

손자와 함께 우리 집에 등장한 물품들. 수유패드, 요람, 등받이, 손수건, 로션 오일, 온도계, 보온병, 기저귀, 유아 손톱깎이, 시각 자극용 장난감 등 누워 있는 손자 주변의 물품들만도 합치면 가격으로 수십 만원 어치는 족히 된다.
 손자와 함께 우리 집에 등장한 물품들. 수유패드, 요람, 등받이, 손수건, 로션 오일, 온도계, 보온병, 기저귀, 유아 손톱깎이, 시각 자극용 장난감 등 누워 있는 손자 주변의 물품들만도 합치면 가격으로 수십 만원 어치는 족히 된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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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 덜 벌어 덜 쓰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에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껏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내 경우 "쌀 떨어지면 세간이라도 팔고, 그나마 팔 것이 없으면 하루 두 끼만 먹고, 두 끼도 안 되면 한 끼 먹고 그도 안 되면 하직하자"는 결심 아닌 결심을 오래전부터 다져온 터여서 수입이 시원찮아도 마음만은 일종의 자기 암시로 '든든'했다.

그런데 갓난쟁이 손자와 지극정성으로 제 새끼를 살피는 딸을 보면서, 철학이랄 것까지도 없는 내 결심을 눈곱만큼도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한 달 10만 원 남짓이면 충분했던 난방비 지출을 30만 원 수준으로 올릴 정도로 과감하게 기름보일러를 트는 등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먹을거리야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인성 빼놓으면 시쳇말로 정말 '시체'인 아이 엄마는 손자가 혈변으로 출산 직후 중환자실에 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최소 기십 만원 어쩌면 1백만 원 안팎으로 추정되는 '거금'을 불우 아동들을 위한 단체에 입금했다. 우리 새끼는 그나마 복 받은 것이고, 세상에 정말 어려운 아동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들이 갑자기 망치처럼 머리를 때렸다나 어쨌다나 하며….

내 새끼들의 경우 풍족하게까지는 못 키웠지만, 그간 천운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하게까지 만들지는 않았다. 한데 손자 출산에 우스개로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돈 좀 벌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난생 처음 하게 됐다. 그만큼 지금까지 팔자가 좋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마음먹는다고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60살이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손자를 생각하면 없었던 근로의욕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대책 없는 대출도 해보고 또 돈 좀 벌어보겠다는 적극적인 생각도 할배가 되면서 생애 최초로 가져보게 된 것이다.

정색하고 말하건대, 소득이나 재산규모에서 나나 우리 집은 한국인 혹은 한국 가정 평균치를 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난 현 상황을 충분히 감당해나갈 것이다. 손자를 내 손으로 키워보니 정말 가슴이 아픈 건, 저조한 수입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젊은 부부들이나 자녀의 이혼 등으로 인해 손주 양육을 떠안게 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존재다.

한국 사회는 출산을 장려하기 전에, 젖먹이를 포함한 아동들의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닥쳐 보니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이다. 제 새끼 제대로 돌보기 힘든 비정규직 미혼모나 어린 손주 양육에 힘부쳐 하는 조손가정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을 걸 생각하니 눈물 난다. 더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키울 형편이 못 돼 버려지는 젖먹이들을 상상하면 공황이 생길 지경이다.

젖먹이 양육이 온전히 가정이나 개인의 책임일 수는 없다.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사회가, 공동체가 책임지고 아동 양육을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 불러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손자가 서울의 제집으로 돌아가면 아기 돌봄 도우미 자원봉사라도 해 볼 심산이다.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태그:#육아, #비용, #손자, #싱글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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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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