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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놈아! 죽이려거든 총살을 시켜라."

유덕수의 처남은 매제가 내리친 삽에 팔이 떨어져 나가자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유덕수는 자기의 처남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어서 자신의 여동생과 어린 조카 2명을 죽였다.

유덕수의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충북 충주군(현재의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비석마을 구장을 봤던 유덕수는 괴동리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마을 유지였다. 1950년 7월 6일 북한군이 충주를 점령하면서 마을마다 토지개혁을 시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덕수의 땅도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됐다.

그해 9월 26일 국군들이 수복하면서 토지 분배는 온데간데 없이 땅은 원위치됐다. 인공 시절 자신의 처남이 완장을 차고 토지 분배에 앞장서자, 억하심정을 품은 유덕수는 위와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대살'이 횡행한 충주 엄정면

비석마을에서는 또 다른 슬픔이 이어졌다. 후퇴했다가 점령군으로 복귀한 국군과 엄정지서 경찰들은 비석마을에 들어와서 인공 시절에 부역한 이들을 잡아들였다. 6명을 산골짝으로 끌고 가 커다란 구덩이를 파, 그 곳에서 즉결 처형했다.

그런데 학살당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기가 막힌다. 김갑식의 처, 김갑식의 자(3~4세), 이장화의 부·모, 김동근의 처와 누이동생이 그들이다. 즉, 인공 시절 완징 찬 이들은 하나도 없고, 그들의 처와 부모, 갓난아이들이 대신 죽은 것이다. 이른바 대살(代殺)이다.

국군이 수복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서른 살 전후 김갑식(1921년생)과 이장화는 월북했고, 마을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김동근(1915년생)은 몸을 피했다. 마을 청년들이 북한군 점령 시절 적을 이롭게 했다면 재판을 통해 적법하게 사법처리하면 될 것을, 당사자도 아닌 그 가족을 무참하게 즉결 처형한 것이다.

이러한 무법천지는 괴동리가 소재하고 있는 엄정면 일대에서 벌어졌다. 충주군 엄정면 원곡리에서는 담배 밭에서 15명의 주민들이 9월 26일경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피해자의 면면은 비석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부역혐의자 학살터 엄정면 원곡리 부역혐의자 학살터에서 증언하는 김원욱씨
▲ 부역혐의자 학살터 엄정면 원곡리 부역혐의자 학살터에서 증언하는 김원욱씨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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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부인과 아이, 조성열 부인과 자, 정대권 부인과 아이 3명, 조정희 부인과 아이, 조인익 부인과 아이 등이다. 당시의 인삼밭은 현재 사과밭으로 바뀌었다. 학살현장 터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한 김원욱(80, 엄정면 원곡리)씨는 "당사자들이 모두 없는 상태에서 그 가족들이 무참히 살육되었다"고 했다. 이들 역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부역 혐의로 대살된 것이다. 이런 참혹한 일이 원곡리에서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군·경이 수복하기 하루 전 후퇴를 앞둔 북한군과 지방 좌익은 원곡리 채씨 일가 7명을 학살했다. 소위 반동(우익) 인사를 처단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죽은 이는 우익청년단원이 아니라 그들의 노부(老父)였다. 김장성의 부친, 채수일의 부친 등이 그들이다.

우익청년단원들은 북한군이 남침해오자 신변이 두려워 일찌감치 피난을 갔다. 그래서 북한군과 지방좌익들은 그들의 늙은 아버지를 대신 죽인 것이다.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이 엄정면 일대에서 벌어졌을까? 대살과 보복학살이 근원은 해방 직후로부터 출발한다.

'양갱이줄'을 휘두른 엄정지서장

타 지역 출신이었던 민유학은 엄정지서장과 목계지서장을 역임했다. 지서장 시절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불법학살을 군과 함께 주도했지만, 그의 반인권적 행위는 6.25 전에도 있었다.

민유학은 남로당원 조직화에 앞장섰던 김흥태를 양갱이줄(체인, chain)로 두드려 팼다. 좌익에 대한 테러는 민유학으로 대표되는 경찰조직만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일어났다. 충주군(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우익청년들은 해방 후 인근마을을 다니며 좌익들을 테러했다. 엄정면 소재지는 6.25 직전 남조선노동당의 총책이었던 김삼룡이 태어나고 살던 마을로 전통적으로 좌익세가 강했다. 엄정면 목계리는 리 단위이지만 엄정면 소재지 못지않은 규모 있는 마을로 우익세가 강한 곳이다.

충주에서 서울 방향의 최고 물산지이자 남한강변에서 가장 번화했던 나루장터인 목계장터는 상인과 부유층의 왕래가 빈번했다. 리 단위 임에도 불구하고 지서가 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2층 건물이 여러 채 있을 정도였다.

해방 직후 목계 우익인사 6명은 인근 마을과 면인 엄정, 가금, 소태를 다니며 좌익인사를 불법으로 체포 및 구타하고 주택을 파괴했다. 이들 6인은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좌익 집을 찾아가 가옥 기둥을 톱으로 자르고, 옹기 등 살림을 부수었다. 이들은 북한군 진주 직후 지역 좌익들에게 학살 당했으며, 2017년 현재 목계솔밭에 집단 매장됐다. 지역에서는 이들을 '6의사(義士)'라 명명하며 기리고 있다. 이렇게 엄정과 목계의 좌-우 갈등은 해방 직후부터 존재했으며, 엄정면 일대에 확산됐다.

"우익패들이 좌익패들을 붙잡아 마을회관에서 팼어!"

채종석옹 원곡리 학살상황을 증언하는 채종석옹
▲ 채종석옹 원곡리 학살상황을 증언하는 채종석옹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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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가춘리에서도 6.25 전에 우익패들이 좌익패들을 붙잡아다가 구타했으며, 신만리에서는 서북청년회가 마을회관에서 좌익패들을 두드려 팼다. 원곡리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채종석(90, 엄정면 원곡리)옹은 "전쟁 전에 우익패들이 좌익패들을 붙잡아 마을회관에서 팼어"라며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다.

해방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이루어진 좌·우 갈등이 엄정면 집단학살의 주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살이 횡행하고, 노부와 어린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보복학살이 반복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에는 엄정면에서 보도연맹원이 집단학살되고, 북한군과 지방좌익이 국군수복 직전에 우익인사들을 집단학살해, 보복학살이 반복되었다고 분석했다. 노촌 이구영(李九榮, 1920년~2006년) 선생은 엄정면에서 보도연맹원 600명이 학살되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마을회관 터 6.25 당시 엄정면 원곡리 마을회관 터
▲ 마을회관 터 6.25 당시 엄정면 원곡리 마을회관 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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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학자 전홍식(52, 충주시) 박사는 "엄정면 마을 전수조사를 한 결과, 보도연맹사건 피해자는 10명 미만이다. 오히려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과 군·경 수복후 부역혐의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 주요 사건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 박사는 "해방후 좌·우익의 갈등이 엄정면에서는 최고조로 발생했으며, 이것이 참혹한 민간인학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충주시 엄정면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사건은 참혹함의 강도에서 상상을 뛰어넘는다. 만약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지역과 마을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야만적인 행위가 벌어졌을까? 어떠한 경우라도 전쟁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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