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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관계 속에 전화(轉化)돼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 굴뚝을 찾아 그 모양과 표정에 함축된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닭실마을은 안동권씨가 모여 사는 동성마을이다. 중심인물은 충재 권벌(1478-1548)이다. 안동권씨 세력은 크고 넓다. 삼계리에 있는 삼계서원을 시작으로 석천계곡 안에 있는 석천정사, 닭실마을(유곡1리)의 청암정과 충재 종택, 토일마을(유곡2리)의 송암정과 서설당까지 모두 이 집안과 관련된 옛집들이다. 권벌 손자가 지은 한수정은 멀리 춘양면 의양리에 있어 안동권씨의 가세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1526년 충재 권벌이 지은 정자와 서재
▲ 청암정과 충재 1526년 충재 권벌이 지은 정자와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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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권벌과 관계를 맺은 후배와 후대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일찍이 미수 허목(1595-1682)은 충재가 세운 청암정을 마음에 두었지만 몸이 늙고 길이 멀어 살아서 와보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청암수석(靑巖水石)' 글씨를 보내 달랬고 퇴계(1501-1570)는 65세 때 이곳에 들러 멋진 시를 남겼다. 청암정 안에는 채제공(1720-1799)의 글과 남명 조식(1501-1572)의 '청암정' 글씨가 달려있다. 시대를 초월해 이들끼리 쌓은 정이 두터워 보였다.

한편 권벌을 배향한 삼계서원은 1588년 안동부사로 있던 동강 김우옹(1540-1603)이 짓고 한강 정구(1543-1620)가 당호를 지은 것으로, 이들이 남긴 흔적 또한 가볍지 않다. 청암정에서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퇴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남명을 한 공간에서 만나고, 삼계서원에서 성주(星州)의 양강(兩岡)이라 불리며 추앙받는 동강(東岡)과 한강(寒岡)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설렌다. 봉화에서 닭실을 제일 먼저 찾은 이유다.

닭실마을 가는 길

삼계서원 느티나무 아래에서 설렌 마음을 잠시 누그리며 석천계곡에 들렀다. 계곡을 거슬러 닭실로 가는 기막힌 길이다. 물기 머금은 촉촉한 단풍은 사람들 발길에 치여 볼 생각조차 못 했지만, 푸석한 빛바랜 단풍에라도 푹 빠져보고 싶은 마음에 재를 넘는 큰길을 버리고 이 계곡을 택했다.

산과 내를 오가는 좋은 길이다. 신선이 사는 세상 끝의 길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계곡의 문패처럼 큼직한 바위에 '청하동천(靑霞洞天)' 글씨를 새겼다.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절경을 시샘한 듯, 도깨비들이 이곳에 몰려와 정사에서 공부하던 서생들을 괴롭히자 보다 못한 권벌의 5대손 권두응이 이 글씨를 새기고 붉게 칠해 도깨비를 쫓았다 한다.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닭실로 들어가는 이 계곡 길은 이상세계로 향하는 신선의 길로 여겨진다.
▲ 청하동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닭실로 들어가는 이 계곡 길은 이상세계로 향하는 신선의 길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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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권벌이 삭주에서 세상을 등지자 큰 아들 권동보는 숨어 살기로 작정하고 석천 계곡에 이 정사를 지었다.
▲ 석천정사 아버지 권벌이 삭주에서 세상을 등지자 큰 아들 권동보는 숨어 살기로 작정하고 석천 계곡에 이 정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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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기암괴석이 멋을 더하는데 이 길을 벗어나면 닭실이 나온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반신반의 마음으로 길을 걷는데 멀리 그럴듯한 옛집이 보인다. 석천정사(石泉精舍)다. 1535년에 충재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1518-1592)가 지었다. 

정사는 계곡 따라 들어섰고 지붕은 계곡에 닿아 있는 듯하다. 계곡을 품에 두었는지 계곡 품에 안겼는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 8년 전에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소백산 막걸리'로 섭섭한 마음을 달랬건만 오늘은 문이 굳게 닫혀 반기는 사람 하나 없다.

굴뚝을 찾아 정사 뒤를 훑었다. 집안 굴뚝은 보이지 않았다.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납작 엎드린 굴뚝 하나가 보였다. 아버지가 유배지인 평안도 삭주에서 세상을 뜨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여생을 보내려 큰아들이 지은 집이다. 등 따습게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다. 아버지가 저세상에서 아들을 걱정할까 봐 냉기만 겨우 없애려 굴뚝은 있는 둥 마는 둥 지은 것이다. 

집밖으로 고개를 내민 굴뚝, 집 주인은 정녕 숨어 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 석천정사 굴뚝 집밖으로 고개를 내민 굴뚝, 집 주인은 정녕 숨어 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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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정사를 벗어나자, 수십 그루 노송 사이로 기와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얼마가지 않아 마을을 휘감은 창평천이 마지막 관문처럼 길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잠시 숨 고르며 마을을 보라는 얘기다. 왜 이리 마음이 편하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를 기억한다면 이런 기분일 텐데. 좋은 터에 들어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닭실 터는 금닭이 알을 품은 듯한 금계포란형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요, 길지 중의 길지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인 백설령이 마을을 감쌌고 그 아래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서쪽 끄트머리에 종가가 있고 종가 서쪽에 청암정과 서재인 충재가 있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인 길지에 자리 잡았다. 왼쪽 끄트머리에 청암정과 충재 종가가 있다.
▲ 닭실마을 정경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인 길지에 자리 잡았다. 왼쪽 끄트머리에 청암정과 충재 종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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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엔 굴뚝이 없다

청암정은 1526년 충재 권벌이 지었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당하고 이 마을에 들어와 서재와 함께 지은 것이다. 비록 복직돼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에 연관돼 삭주로 귀양 간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생치고는 사나운 인생이었다.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올리고 둘레에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었다. 신선이 사는 집이 있다면 이 집이 아닐까?
▲ 청암정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올리고 둘레에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었다. 신선이 사는 집이 있다면 이 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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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처럼 생긴 기이한 거북바위에 마루 6칸, 마루방 2칸짜리 정자를 올리고 둘레에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든 다음 척촉천(擲蠋泉)이라 이름 지었다. 이상세계로 들어가는 외길처럼 오로지 돌다리와 돌계단으로 정자에 오를 수 있다. 청암정에 굴뚝이 있을까 의문을 품었지만 우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거북 등에 올라 있으니 아궁이와 굴뚝이 있을 리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충재가 정자를 짓고 아궁이에 불을 넣으니까 바위가 우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이상히 여겨 고승에게 물으니 "이 정자 아래 바위는 거북바위인데, 거북 등에 불을 피우면 뜨거워 울지 않겠소"라 했다. 그 후 아궁이를 없애고 주위에 물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정말인가 싶어 봉화문화원에 전화해 "청암정에 굴뚝 시설이 있나"라고 물었다. "없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은 집 

미수의 나이 88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쓴 글씨다.
▲ 미수 허목의 청암수석 글씨 미수의 나이 88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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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나이 71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쓴 글씨(2005년 촬영)
▲ 추사의 판전 글씨 추사 나이 71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쓴 글씨(2005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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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처럼 겸허하고 담백하고 욕심을 비운 빈 집 같다.
▲ 충재 이름처럼 겸허하고 담백하고 욕심을 비운 빈 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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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수석'은 미수 허목이 살아서 쓴 마지막 글씨로 알려져 있다. 추사의 봉은사 '판전(版殿)' 글씨에 이어 걸출한 인물이 쓴 마지막 글씨를 청암정에서 보았다. 죽음을 앞뒀지만 힘없이 쓴 글씨가 아니다. 힘을 빼고 붓이 가는대로 쓴 글씨다. 쓴 게 아니라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나이 들어 몸에서 기름질이 빠지듯 두 양반 글씨에서 기름기가 보이지 않는다. 글씨를 모르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청암정 앞 조그만 집한 채, 충재(冲齋)다. 서재인 충재는 세 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누추하지 않고 검소하게 지은 집이다. 이름도 겸손하게 빈(冲) 집이라는 뜻이다. 권벌이 49세 때 파직당하고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며 생애 마지막이라는 절절한 마음에서 짓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추사와 허목의 마지막 글씨처럼 갖출 것만 갖추고 없앨 것은 없앤, 군더더기 없이 기름기 빠져 골기 서린 꼿꼿한 선비 집으로 보인다.

굴뚝을 마루 밑에 숨겨 불기운을 줄이고 학문에 전념하려는 집 주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 충재 굴뚝 굴뚝을 마루 밑에 숨겨 불기운을 줄이고 학문에 전념하려는 집 주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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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을 낮게 지어 불기운을 줄인 것은 정신을 맑게 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라는 가르침이다.
▲ 삼계서원 굴뚝 굴뚝을 낮게 지어 불기운을 줄인 것은 정신을 맑게 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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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굴뚝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화 때 파직당해 숨어 살 작정을 하고 들어와 지은 집이니, 굴뚝을 사람 눈에 띄는 곳에 만들지는 않았겠지 싶었다. 역시 마루 밑에 숨겼다. 마루 밑에 웅크려 연기를 힘차게 빨아내지 못하는 키 작은 굴뚝이다. 방에 불김이라고는 없을 것 같다. 

석천계곡 초입에서 본 삼계서원의 키 작은 굴뚝은 불기운을 멀리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가르침이요, 충재 굴뚝은 세상을 멀리하듯 불기운을 멀리하고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충재 권벌의 실천 의지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머나먼 삭주 땅에서 세상을 등지자 큰아들이 숨어 살기로 마음먹고 지은 석천정사 굴뚝도 아버지를 따라 한 게로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태그:#닭실마을, #석천정사, #청암정, #충재, #삼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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