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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요약한다? 시간에 쫓기는 고3 수험생도 아니고, 굳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하는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의구심을 갖고 책을 읽고 나면 책 제목이 참 오만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스 로마와 일부 서유럽 역사'만 기록해 놓고 세계사라고 했으니 하는 말이다. 그리스 로마가 세계사의 일부일 수는 있으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마치 전부인 것처럼 '세계사'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표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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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원제는 'The Shortest History of Europe'(가장 짧은 유럽사)다. 저자 존 허스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역사학자다. 그는 '2000년 유럽의 모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을 전달한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책 제목이나 내용을 과대 포장하지 않았다.

번역서 제목은 무게나 욕심을 줄이고 정도를 걸었어야 했다. 외려 책에 대한 첫인상을 흐려놓기도 해서다. 저자는 게르만족 중심의 서술을 하며 강자, 정복자 중심의 역사 서술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문명의 형성에 있어 유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사에 미친 영향력을 따지자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독일의 종교개혁, 잉글랜드의 의회정치, 프랑스의 혁명적 민주주의가 폴란드의 분할보다 더욱 중요하다." -6쪽

저자의 주장은 게르만족이 서유럽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모든 문명이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흥망성쇠를 지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내러티브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이는 자기모순이다.

훗날 유럽 역사를 주름잡았던 게르만족이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숲속에서 갖고 있던 자유분방한 활력과 생명력 역시 무시되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을 기승전결로 한다고 했을 때, 문제제기와 전개는 생략하고, 전환점을 가져온 게르만 이동과 그 결과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존 허스트는 세계를 제패한 유럽의 힘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 했다. 그래서 근대를 다루며 고전 시대(Clasic Era)에 주목한다. 유럽 사회의 세속화를 이끈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리스 로마를 클래식 시대라고 불렀다.

여기서 클래식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대(ancient)를 뜻하지 않는다. 최고 수준이라는 의미다. 저자의 이런 입장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영연방의 일원이고, 유럽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는 문명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 혹은 자긍심일 수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 압제를 당했던 경험이 있는 나라 사람이 보기에 참 불편하다. 제국을 운영했던 패권 국가에 대한 향수가 숨겨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구의 역사 서술이 대부분 이런 식이라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비록 정통 역사서가 아니라고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역시 남성우월주의와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를 찬미하는 부분이 쉽게 눈에 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결여돼 있지 않은지 살필 필요가 있다.

태생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장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유럽사 전반에 대한 전체적인 상과 뼈대를 제시하고 좀 더 꼼꼼히 살피는 서술 방식이 특이하다. 침략, 정치 형태, 종교 등과 같은 특정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생략하여 쉽게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엇보다 연도를 암기하느라 머리 싸매지 않아서 좋다. 역사란 몇 년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왜 일어났고,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등의 인과 관계를 살피며 현재를 보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수능을 준비하며 암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을 고3수험생들에겐 인문학 안내서 정도로 권해도 좋을 법하다.

그 중에는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다룰 법한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국가 수장들이 의장대를 사열하는 관행이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게르만 족장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흥미롭다.

왕은 귀족에게 토지를 할당해 주고, 필요로 할 때 귀족에게 병사를 보낼 것을 요구한다. 이때 귀족은 어떤 자질을 갖춘 병사를 보낼지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갖기 마련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마음이 다른 법이라 왕은 귀족이 보낸 병사들이 마뜩치 않을 때가 많았던 모양이다.

"오늘날 국가의 수장들은 의장대를 사열한다. …… 이런 사열식은 왕이 파견된 병사들을 직접 세밀하게 살피면서 "이번에는 그들이 도대체 어떤 쓰레기들을 보냈을까?" 하고 중얼거리던 중세 초의 관행에서 나온 잔재다." -33쪽

유럽의 중세 그리스 로마 지식과 기독교, 게르만 전사가 어떤 혼합, 동맹을 맺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 유럽의 중세 그리스 로마 지식과 기독교, 게르만 전사가 어떤 혼합, 동맹을 맺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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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아마존 역사 부분 스터디셀러가 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의 장점은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요약에 있다. 그리스 로마 세계와 게르만과 기독교의 융합을 설명하는 도표를 통해 중세를 설명하는 부분 등은 상상력을 자극할 정도로 탁월하다. 중세시대를 요약한 글을 보자.

"기독교도 기사가 되어 가는 전사들이 있었고, 기독교를 뒷받침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이 있었다. 이 기묘한 동맹의 중간에서 교회가 이럭저럭 모든 것을 결속시키고 있다. 지식은 기독교적이고, 기사들은 기독교도들이고, 세계는 기독교 세계, 즉 그리스도의 영토다. 1400년 이후, 이 이상한 동맹은 쪼개지기 시작하고 역사가들이 근대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된다." -41쪽

존 허스트는 평생 역사를 어떻게 하면 쉽게 가르칠까를 고민하는 교수요, 학자로 살아왔다. 그는 하나하나의 사건보다 문명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포착하고 그 변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국가 단위와 정치 서술을 벗어나면 시선이 상당히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묵묵히 역사를 지탱해 온 보통 사람들, 농민의 돈을 쥐어짜 내는 것이 문명의 기초라고 말한다. 토지에서 일한 인민의 85~95퍼센트가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세금, 그러니까 세금의 80퍼센트 또는 90퍼센트가 군대에 소비되었다. 그렇다면 외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농민은 이득을 보았는가? 그렇지 않다. 농민들에게 전쟁이란 자신의 땅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양쪽 군대를 먹이기 위해 자신의 식량과 동물들이 징발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203쪽

세금을 내고 노역을 제공하지만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던 농민들에 대한 서술은 지배계급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외치는 저항의 목소리로도 들린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역사 서술은 유감스럽게도 국수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가령, 프랑스 농민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농민을 비교하는 부분에서 농업이라는 것이 식량안보, 사회 안전망과 역사와 시민 정서 등과도 얽힌 문제인데도 단순히 경제 논리로만 접근하며 자국 이익만을 대변하려 든다.

"프랑스의 중요 인물들은... 작은 땅뙈기를 보우하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농업이 소규모이며 비효율적임을 의미했다. 오늘날 농민들은 유럽의 보조금으로 혜택을 입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농산물을 더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으면서 규모가 더 크고 효율적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농부들과 경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프랑스 농민들이 우리를 쥐어짜고 있다!" - 207쪽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대한민국 농업 현실을 떠올리면 씁쓸하기까지 하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칼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존 허스트는 서구 학자다. 유럽을 파괴한 두 개의 힘을 독일에 지적 기원을 두고 있는 민족주의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화라고 했지만, 정작 그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 전적으로 역사학자의 몫이 아니라 할지라도 진지한 성찰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부족했다. 독일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FTA 국면에서 자국 이익을 대변하려 드는 모습은 그 단적인 예다.

산업화가 전쟁을 더욱 무서운 것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지만, 영국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예무역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수백 척의 노예 무역선을 운영하면서 이윤을 창출했던 영국 산업혁명의 추악한 면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일본이 위안부 등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앞서 이 책을 고3 수험생들에게 권하고 싶다고 했다. 학생들을 생각하면 이 책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까칠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역사를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했던 사람이 썼다는 점에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 2,000년 유럽의 모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

존 허스트 지음, 김종원 옮김, 위즈덤하우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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