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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사회를 볼 때마다 '인간 존엄성'이란 그저 구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나라의 헌법은 최고법으로, 국가 공동체 안에서는 최고의 약속이다. 대한민국 헌법도 마찬가지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면서 첫 조항(제10조)으로 이런 조문을 두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조항은 모든 헌법상의 기본권 규정의 맏형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헌법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사용되는 규정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 국가는 그것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얼마나 간명한 규정이며 아름다운 약속인가. 우리는 인간다운 존엄한 가치를 보장받기 위해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나라가 존재하는 알파요, 오메가가 아닌가.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누리면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감히 그렇다고 말할 자가 누군가? 우리의 경험으론 저 헌법상의 규정은 그저 종이 위의 권리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멀었다. 이 사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과 그 가치를 도통 모른다.

대한민국은 물신과 권신이 지배하는 사회다. 돈과 권력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신분제 사회에서도 보기 힘든 온갖 갑질 행위가 대명천지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300여 명에 가까운 목숨이 중인환시리 수장됐음에도 우리는 그 진실조차 알 수 없다. 고위 공직자가 서슴없이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는 말을 하는 사회다.

왜 그럴까? 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의 세례를 반세기 이상 받고 있음에도 본질적 변화는 요원하기만한가. 세계에서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인데 어찌해서 사람들의 생각은 그리도 지질한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가.

나는 그 원인 중 하나를 '자아가 없는 개인'에게서 찾고자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른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이어야 할지 생각조차 해보질 않았다. 만일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 독립적인 존재, 나아가 존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타인에 대한 생각도 변할 것이다.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중한만큼 그 타인도 중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우리 모두 스스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작하는 것이다.

서구에서의 개인의 발견과 뒤러의 자화상

일부 독자는 나란 사람이 너무 서구 중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비판을 거부하지 않는다. 인권이란 것을 서구를 통해 공부해 온 사람의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당분간 멈출 수가 없다. 이런 사고를 대체할 정도의 '우리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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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선 '개인의 발견',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개념이 르네상스 시기에 본격적으로 발견된다. 주로 페트라르카 등의 문인에게서 발견됐지만 화가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중에서 한 인물의 초상화에 주목한다. 이 그림에서 이 시기 르네상스인들이 보여준 자의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이다.

뒤러는 시기적으로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등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독일 뉘른베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알프스를 넘어 북쪽 독일로 넘어갔을 때 그곳을 대표한 인물이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렘브란트가 유명하지만, 그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 뒤러다. 그는 렘브란트보다 200여 년 앞서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것은 그가 그 시대를 산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문화가가 자화상을 그린다? 왜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라. 화가가 자기 자신의 자화상을 여러 점 남겼다는 것은 특별히 자신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특징을 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남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뒤러는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을까?

뒤러의 자화상이 말하는 것

이제 위 뒤러의 자화상을 자세히 보자. 한 금발의 젊은이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의 초상화!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이 시기(16세기) 이런 정면상의 초상화는 매우 이례적이다. 일반적으로 정면화는 보통 사람의 초상화에선 거의 볼 수 없다. 정면상을 볼 수 있다면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보통의 초상화란 어떤 것일까? 잘 생각해 보라. 동시대의 작가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정면상을 그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45도 각도로 앉아 있는 모나리자를 그린 것이다.

정면을 바라 보는 뒤러는 비싼 모피 코트를 입었다. 위엄 있고 기품 있는 옷이다. 황금빛 금발은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렸다. 거기에다 눈동자는 형형하다. 배경은 어둡고, 그만큼 얼굴은 빛난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 자화상이 보는 이에게 무언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론 뒤러의 자의식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그렇다! 이 자화상을 볼 때, 한 그림을 더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아래 그림을 보라. 한스 멤링의 '세상의 구원자'라는 초상화다. 멤링은 뒤러보단 한 세대 앞선 독일 화가인데, 이 그림은 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다. 이 초상화와 뒤러의 위 자화상을 비교해 보자. 대번에 뭔가 알 수 있지 않은가. 앗! 뒤러의 자화상는 이 초상화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한스 멤링
 한스 멤링
ⓒ wik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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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뒤러는 멤링의 예수 초상화를 토대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 뒤러는 예수와 같이 정면을 응시한다. 배경도 예수 초상화와 같이 검은색이다. 다만 손짓은 조금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전부 같게 그리면 예수상으로 오인받을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뒤러가 말하는 게 무엇일까? 많은 미술사가들이 말하는 정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뒤러를 연구한 신준형 교수는 그의 책 <뒤러와 미켈란젤로>에서 이렇게 해설한다.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예수는 신 그 자신이다. 따라서 뒤러가 자신을 예수와 닮게 그렸을 때 그는 자신을 창조주 신에 '비유'한 것이다. 미술가의 창조행위가 신의 창조능력에 비길 만하다는 야심 찬 선언이다." (171쪽)

한마디로 예술적 창작을 하는 자신의 행위를 신의 창조능력과 비교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신만만한(오만한) 태도인가. 자신은 사물의 묘사를 정확히 하는 단순한 그림 기술자, 부자들이 던져주는 돈에 만족하는 화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페트라르카나 보가치오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아버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찾자

진정한 '개인'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개, 돼지나 마찬가지다. 진정한' 나'를 찾지 않으면 나의 인생은 없다. 돈이 많다고 해서, 많이 배운다고 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만이 '자유'의 의미를 안다. 그런 사람만이 인생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살릴 수 있고, 이 나라를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인생에서도 르네상스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이 시대의 실존적 존재로서 '나'를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지금 인생의 르네상스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누구를 막연히 추종하고, 알 수 없는 절대자에게 무조건 의존하는 삶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천 년 중세를 사는 인생이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묻자, 나는 지금 르네상스인가? 아니면 아직도 중세인인가?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이자 변호사입니다.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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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지난 20년 이상 변호사 생활을 해왔으며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이 공간을 통해 제가 그동안 공부해 온 것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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