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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김씨, 민추협을 결성하다

1984년 여름엔 하늘도 전두환 편이 아니었다. 늦은 장마로 9월 초부터 서울 일대에 무자비한 물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1925 을축년 대홍수 이래 최대 홍수가 나서 서울 망원동 일대는 아예 물속에 잠겨 버렸다.

189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였지만, 차라리 전두환에게는 이것이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감을 하늘에 대한 반감으로 대체할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북한이 제의한 수해물자 제공 의사를 덥석 받아들인 것도 그런 배경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서울 시민들은 북한에서 휴전선을 넘어온 맛없는 쌀과, 촌스러운 옷감을 받아들고 신기해했다.

1. 1984년 9월 수해로 잠긴 서울 망원동 일대. 2.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망원동 유수지 부근 3. 물에 잠긴 망원동 길가와 버스. 4.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물자를 실은 북측 선박이 인천항에 도착한 모습. 5. 북측에서 보낸 쌀
 1. 1984년 9월 수해로 잠긴 서울 망원동 일대. 2.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망원동 유수지 부근 3. 물에 잠긴 망원동 길가와 버스. 4.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물자를 실은 북측 선박이 인천항에 도착한 모습. 5. 북측에서 보낸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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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홍수를 몰고 온 태풍보다 더 센 정치의 태풍이 몰려왔다. 전두환은 유화국면의 연장선에서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야당 정치인들을 83년과 8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러나 3김씨로 불리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풀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전두환은 해제된 야당 정치인들이 기존의 민한당과 국민당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투쟁력을 거세시킬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금에서 풀린 정치인들은 아직 풀리지 않은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더니, 1985년 총선을 향해 맹렬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전두환은 아마도 민추협이 정권에 길들여져 있던 기존의 민한당의 기세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온건파와 과격파로 분열된 야당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임으로서 오히려 정권의 유지에는 도움이 될 것일 터였다. 그러나 정세는 전두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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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총회, 공개 행사로 치르다

한편 민민협과 국민회의라는 두 연합단체의 출범과 함께 운동세력 안에서는 한국 변혁 운동의 방향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투쟁의 열기가 뜨거운 학생운동과 그 출신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불이 활활 타올랐다. 민청련이 그 중심에 있었다.

민청련 3차 총회는 84년 10월 20일 열렸다. 서울 동숭동에 있는 흥사단 강당에서 공개적인 행사로 치렀다. 당시 민청련 내부의 조직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여러 공개 운동단체들이 속속 건설되는 상황이었다. 즉 정권이 조성한 유화국면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탄압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조직 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운동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되면서 논의가 다양해지자 의장단 지도체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 변화의 주된 이유였다. 그 결과 중앙위원회가 신설되었다. 5명 내지 15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위원회는 총회가 열리지 않는 평상시의 최고 의결기구였다. 중앙위원에는 공개되지 않은 내부 조직에서 선출된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창립 당시에 비해 정권으로부터 가해올 탄압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결과였다.

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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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P론을 정리하다

민청련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면 정세를 분석하고 활동방향을 정하는 일이었다.

특히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통합과 같은 사안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는 일이 잦았다.
논의가 점차 복잡해지자 김근태 의장은 이을호 정책실장에게 논의의 가닥을 간명하게 정리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을호가 연륜이 깊은 운동가들을 접촉하고 정리해낸 것이 이른바 'CNP론'이었다.

CNP란 CD 즉 Civil Democracy(시민민주주의), ND 즉 National Democracy(민족민주주의), PD 즉 (People Democracy) 민중민주주의의 약자였다. 당시 각 운동단체 및 운동세력의 성향과 노선을 분석하여 이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였던 것이다. 각 노선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추구하는 변혁노선도 다르게 표출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CD는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된 주변부 자본주의로 바라본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구조 아래서 핍박 받는 계층은 노동자, 농민, 빈민뿐만 아니라 영세자영업자와 중소자본가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당면 투쟁의 목표는 세계자본에 종속된 독재권력을 타도하고 민주적인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일이다. 70년대 이래 정치운동을 이끌어온 이른바 재야세력이 그 중심이다.       

PD는 한국의 사회구성체는 국가독점자본주위라고 본다. 즉 단순히 외세에 종속된 체제가 아니라 스스로 상당 수준의 자본축적을 이루고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운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면 과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것을 담당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 이끌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에서 말하는 '노동현장론'이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구축된 것이다.

ND는 겉으로 보면 CD와 PD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민청련은 CD와 PD를 포용하며 연대한다는 지향에서 ND론을 정립시켰다.

정리된 ND론은 한국사회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 체제로 규정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신식민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민족적 모순과 독점자본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다. 투쟁방향은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을 이루되 다양한 중간층을 아우르며 연합전선을 형성해 민주적이고 민족 자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CNP론은 회원 내부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전 회원에게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CNP론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대학생 출신들의 지나친 학구적 탐구심이 발동된 것으로 실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논쟁은 다가올 85년 초로 예정돼 있는 정치일정, 즉 2·12 총선에서 운동세력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옮겨갔다.

운동권의 시각에서 보면 총선거는 제도권 정치세력들이 판을 벌이는 마당이었다. 이러한 총선거에 대해 C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선거 국면을 적극 활용하자는 주장을 폈고, P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민중의 이해와 전혀 무관한 선거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변수로 등장한 것이 양 김씨가 이끄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반민주적 법령이 민주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선거는 오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선거를 보이코트할 기세를 보였던 것이다.

민추협의 움직임은 운동 세력에게 논쟁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민추협이 전두환 정권과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총선에 임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그들을 아군으로 여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선거에 대한 운동세력의 대응방향을 놓고 선거 거부론과 선거 활용론이라는 양 극단이 대립했다. 

선거 거부론은 다가올 2·12총선은 민정당과 군부 세력의 장기 독재를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민추협이 민한당과는 다른 투쟁적인 신당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정권이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 그들과 야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에 개입해서 한국 사회 모순의 궁극적 해결을 도모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전면 거부하고, 오히려 기층 민중의 역량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선거 활용론은 선거 거부론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즉 선거는 전두환 독재정권이라는 '지배체제의 재생산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지만,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선거 거부라는 전술을 도출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더구나 운동세력의 역량이 열세에 있을 때는 선거라는 국면을 활용하는 전술을 채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역량이 선거를 거부할 정도로 성숙해 있었을 때조차도 단순한 선거 거부가 아니라 대안적 정치 구조의 창출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방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 활용론의 입장에서 2·12 총선은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양되는 시기이며, 그러한 정세 조건을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즉 '민주화'와 '민중 생존권' 문제를 부각시키는 실천 프로그램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의 충격파

총선과 관련한 논쟁은 민청련 내부뿐만 아니라 운동권 전반에서 벌어졌지만,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의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었다.

민청련의 선전력과 동원력은 선거라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행사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민민협, 국민회의 등 운동세력의 연대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열을 편성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대중동원력이 큰 야당정치세력과도 제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논쟁점이었다.

결국 야당정치세력과의 '제휴반대론'과 '제휴찬성론'이라는 틀로 의견이 갈렸다. 민청련 지도부 가운데 김병곤 상임위원장이 대체로 '제휴반대론'에 기울어 있었고, 김근태 의장이 '제휴찬성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회원들 사이에 의견의 분포는 정확히 계량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제휴찬성론이 약간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가올 총선에 대한 노선을 두고 논쟁하고 있던 중,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11월 14일,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 260여 명이 서울 안국동 민정당사를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1984년 당시의 학생운동은 주로 교내 시위의 형태를 취했고, 이따금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물론 학생들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투쟁방식이었다. 이후 민정당사, 미국문화원 등에 대한 점거 농성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점거 학생들은 이전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식을 연세대에서 갖고 그 자리에서 '반독재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은 당시 각 학교에 만들어져 있던 조직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연대하여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준비론'이나 '노동현장론'을 비판하며 즉각적이고도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정당사를 점거한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민정당을 찾아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고 건물에 "노동악법 개정하라" "전면해금 실시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구호와 당면 정치정세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내걸고 글자 그대로 선도적 투쟁을 벌인 것이다.

1. 경찰이 압수한 ‘민정당에 들어간 이유를 밝힌 대자보’ 2. 민정당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3. 민정당사 건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성명서 읽고 있는 학생.  4~5.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찰 병력. 6. 점거농성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
 1. 경찰이 압수한 ‘민정당에 들어간 이유를 밝힌 대자보’ 2. 민정당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3. 민정당사 건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성명서 읽고 있는 학생. 4~5.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찰 병력. 6. 점거농성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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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게 대응한 민청련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는 민청련에게도 충격이었다. 민청련은 우선 정권이 이 사건을 일본의 '적군파식 테러'로 몰고 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주장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민정당사 농성 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학생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어서 학생들이 주장한 '14개항 – 당신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에게 배포했다.

민민협과 국민회의도 학생들을 옹호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때 특히 눈에 띤 것은 민추협이 학생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기존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학생운동의 민정당사 점거 농성투쟁은 운동 세력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자칫 노선투쟁이 이념논쟁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던 무렵에 터진 이 사건으로 각 운동은 다가올 총선을 실천과 투쟁의 관점에서 대하게 됐다. 민청련이 위 유인물에서 총선에 대해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현 체제를 거부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것도 그 증거였다. 

어쨌든 1984년 연말은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집권 세력과 야당 세력은  물론 각 운동세력이 각자의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보내는 시기였다. 결전을 앞둔 각 진영이 참모회의로 분주했다고나 할까.


태그:#민청련, #CNP, #민정당사 점거농성, #2.12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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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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