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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는 기차를 청소하는 노동자다. 그녀는 열차 내부와 열차 안 화장실을 청소하는데, 하루에 무려 200여 개의 화장실을 청소한다. 속도를 내기 위해 발로 걸레를 밀어 바닥을 닦고, 동시에 손으로는 세면대와 거울을 닦기도 한다. 빠르면서 동시에 깨끗한 청소를 위해서는 기술적으로 상당한 요령이 필요하다.

열차의 화장실 청소는 무척 힘이 드는데, 무엇보다 비좁기 때문이다. 니나는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위해 몸을 이리 구부리고 저리 비틀며 때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또한 기차의 의자 아랫부분을 청소하기 위해서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야 해서 허리에 무리가 간다. 알고 보면, 열차 청소는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다.

니나는 열차를 쭉 관통해서 청소하며 기차와 기차를 옮겨 다니며 일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무려 23킬로미터나 걸어 다녔다. 그냥 걸어도 힘든 거리인데, 빈손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니나는 사장이 갖추라고 지시한 온갖 청소도구가 가득한 커다랗고 무거운 파란 들통을 들고서 하루에 23킬로미터를 걸었다!

이런 노동을 오래한다면 몸이 망가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테다. 철도회사에서 가장 젊은 편에 속하는 니나는 아직 건강에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든 동료들은 문제가 많았다. 40대 여성은 만성적인 허리 통증을 호소했고, 60대 여성은 허리가 전체적으로 상해서 완전히 굽어버렸다.

청소 노동자, 백화점 판매원... 보이지 않는 고통

<보이지 않는 고통> 표지
 <보이지 않는 고통> 표지
ⓒ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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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인 케런 메싱이 지은 <보이지 않는 고통>에 나오는 사례다(63~66쪽). 이 책을 통해 청소 노동이 기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한 청소 노동자들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몸을 상하게 하는 노동조건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고통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이도 적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과학자 캐런 메싱의 회고록으로, 유전자를 연구하던 퀘벡대학교 생물학 교수였던 메싱이 어떻게 해서 어떻게 인간공학으로 관심을 옮겨갔는지, 어떻게 해서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인간공학자로서 메싱은 노동자들의 작업 현장과 노동 과정을 바라보고, 그것이 어떻게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지 살펴보거나, 더 좋은 노동 환경을 제안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 과정에서 메싱은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과 그들의 '숨겨진 고통'을 드러낸다. 그리고 과학자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앞서 소개한 청소 노동자 니나는 프랑스 국영철도회사에서 일한다. 노동 시간이 짧기로 유명하고 노동조건이 한국보다 훨씬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프랑스의 국영회사가 이 정도라면, 다른 곳은 어떨지.

더 놀랍게 다가오는 사례는 스웨덴의 경우다. 복지국가로 유명하고 노동자 보호가 잘 되어 있기로 널리 알려진 스웨덴 말이다. 저자는 스웨덴 인간공학자에게 장시간 서서 일하는 환경에 처한 노동자가 있는지 조언을 구한다.

"장시간 서서 일하는 것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85쪽)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한 노동자가 없는지 알아본 것이다. 스웨덴 인간공학자는 서서 일하는 사람들도 앉는 것이 허용되는 스웨덴에서는 장시간 기립 노동을 찾아보기 어려울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답변한다.

그러나 "스웨덴은 인간공학을 중요시하는 국가였지만, 장시간 기립노동을 하는 노동자군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92쪽)고 메싱은 말한다.

메싱은 스웨덴 대형 백화점에 가서 앉지 못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본다. 백화점 판매원은 앉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만, 앉아 있을 짬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서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매시간 10분씩 반드시 앉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잠시도 앉을 짬이 없다 보니 아예 의자를 갖추지도 않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89~92쪽).

'여성' 노동자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의 고통에 관심을 두는 이 책에서 더욱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 호소가 사회적으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든 사례처럼,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제도가 잘 갖춰진 스웨덴에서조차 백화점 여성 노동자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소통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여성이 일터에서 겪게 되는 직업 보건상의 위험성이 남성이 일터에서 겪는 것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더 모호하게 파악된다는 사실"(16쪽)을 여러 차례 지적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과중한 작업량과 탈진에 대해 호소했지만, 그들이 일하는 환경은 안전보건 전문가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괜찮게 보였던 것이다."(112쪽)

"나는 대부분의 고용주‧고객‧과학자들이 공감 격차 때문에 식당 노동자들의 인지적‧감정적 성취와 그들이 겪고 있는 노동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식당 노동자들이 여성일 때 이런 격차는 더 커진다."(128쪽)

저자는 남성 노동자가 주로 종사하는 업계의 산업재해만이 주목받고, 상대적으로 여성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사소하게 취급되는 현실에 대해 계속해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저자는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가려져 있던 여성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문제를 직시했으며, 마트 계산원‧간병인‧청소노동자‧식당 종업원‧교사‧은행원 등 여성 노동자의 사례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저자는 과학자나 의사들을 향해서도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그들의 '공감 격차'에 대해 지적한다. 그들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오랜 시간 천천히 걸어 다닐 때 생기는 '박물관 피로'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마찬가지 고통을 낳는 장시간 기립 노동의 고통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또한 테니스를 과하게 쳐서 생기는 '테니스 엘보'(외상과염, 손목을 굽히거나 펴는 근육이 시작되는 팔꿈치 부위에 동통이나 국소 압통이 생기는 증후군)에 대해서는 잘 진단하지만, 같은 통증이 유발되는 노동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부 과학자들은 노동자들의 통증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다. (…) 외상과염을 테니스를 두 시간쯤 쳐서 생긴 결과라고 자신 있게 진단하면서도, 반 년간 주당 50시간씩 전선을 잡아당기고 벗겨내는 업무가 정확히 같은 근골격계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의사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많은 의사나 의과학자들이 공감 격차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테니스를 치고 박물관에 가기 때문에 '테니스엘보'와 '박물관 피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시간 학교에 다녔고, 반복적인 육체노동 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전선 피복을 벗겨내는 노동자의 문제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대체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223쪽)

이러한 공감 격차는 산업재해 인정과 보상과 관련해서도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보건 전문가와 과학자들이 어떻게 노동자들과 교감할 수 있을지, 어떻게 이런 거리감을 좁힐 수 있을지 진지한 고민을 던진다.

노동 현장으로 간 과학자의 기록, 많은 고민 남겨

저자는 자신의 실패와 좌절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메싱은 프랑스에서 청소 노동자들의 업무를 분석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여러 가지 제안은 담은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는 노동조합도 만족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직업안전보건 학술 논문으로 출간되었으며, 대학원생 수업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는 등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청소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은 바뀌지 않았다(68~69쪽).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연구가 노동자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든 것 같지 않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또한 고통 받는 노동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느꼈던 무력감, 노동자의 아픔에 무관심한 채 그들을 연구 대상으로만 보는 과학자들을 향한 실망감, 자신의 연구와 제안으로 개선시켰던 노동조건이 다시 악화되었을 때 느꼈던 허무함 등이 책 곳곳에 녹아 있다.

이 책은 노동자들의 고통에 공감한 한 과학자의 회고록으로, 과학자와 시민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함께 귀 기울여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다양한 직업군의 고통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전문가의 역할과 태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의학과 과학이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게 된다. 좋은 책은 끝까지 읽고 덮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고민하도록 만든다. 이 책은 독자에게 많은 고민을 남기는 진정 좋은 책이다.


보이지 않는 고통 -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느 과학자의 분투기

캐런 메싱 지음, 김인아 외 옮김, 동녘(2017)


태그:#보이지 않는 고통, #캐런 메싱,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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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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