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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면서 평창 롱패딩과 더불어 여우와 밍크, 라쿤 등 각종 동물 털을 두른 코트와 다운 패딩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평창 롱패딩만 하더라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백화점 번호표를 받기 위해 추위에도 밤을 꼴딱 새우며 기다렸다고 한다. 100% 구스다운 패딩인데 14만9000원, 이른바 가성비 갑이라는 홍보와 후기들에 힘입은 바다. 그런데 가성비 갑이라는 100% 구스다운 패딩이 윤리적인 면에서도 갑일까?

겨울철 인간에게 따뜻함을 주는 이 패딩 하나를 만들려면 일반적으로 약 20마리 정도의 거위들이 산 채로 털을 뽑히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또 털 뽑힌 거위들은 붉은 생살을 드러낸 채 새 털이 날 때까지 살아야 하고, 새 털이 나면 다시 털을 뽑혀야 한다. 마치 시지프 신화 같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윤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나 규범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는 사람에게만 지키면 되는 걸까? 동물에게는 지킬 필요가 없는 걸까? 동물의 고통 따위는 눈 감아도 되는 걸까?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문제들의 면면들이 다시 보이며 과연 이게 윤리적일까, 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피터 싱어 교수의 신간 <더 나은 세상>을 읽은 후부터다.

피터 싱어 교수의 신간 <더 나은 세상>
 피터 싱어 교수의 신간 <더 나은 세상>
ⓒ 예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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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인간가치센터 생명윤리학 석좌교수이며 호주 멜버른대학교 역사철학 명예교수인 피터 싱어 교수는 세계적인 실천윤리학자이자 동물해방론자로 이 시대 손꼽히는 석학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은 피터 싱어 교수가 2001년부터 2017년 1월까지 <프로젝트신디케이트>를 비롯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프리인콰이어리>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같은 각종 뉴스 매체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인간과 동물 관계의 윤리, 삶과 죽음의 본질, 인류의 미래 등을 포함해 사회 전반의 중대한 쟁점을 가진 사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건들이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피터 싱어 교수의 글은 마치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무심히 흘러가지 말고, 생각 좀 하면서 살라는 큰 스님의 죽비 같다. 무엇이 윤리적이며, 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까?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긴 여운이 남는다.

자연사가 힘들다

몇 해 전 지인(知人)의 할머니께서 위암 수술을 하셨다는 얘길 들었다.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여든 다섯. 그 얘기를 들으며 든 생각은 의료 기술이 발전해 이젠 나이가 들어도 자연사하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관점에서 피터 싱어 교수는 의사가 노인 질환을 치료하는 것이 환자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의사로서의 의무 때문인지를 묻고 있다.

흔히 폐렴을 일컬어 '노인들의 친구'라고 한다는데, 그것은 폐렴이 만족스럽지 못한 삶, 그리고 앞으로 더 나빠질 것으로 예상되는 노년의 삶을 신속하고 고통 없이 끝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노인들의 친구가 항생제의 공격으로 친구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에리카 다가타와 수전 미첼의 연구에 따르면, 요양소에 있는 중증 치매 환자 214명 중 3분의 2가 18개월 동안 항생제 치료를 받았는데 이들 중증 치매 환자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전무하거나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대화를 나눌 수도, 누군가 곁에 있지 않으면 전혀 생존할 수 없는 노인들의 삶을 약을 통해 억지로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생명 연장이 누구에게 이익이며, 누구를 위한 치료일까? 미국의 노인의료보험제도인 메디케어는 2005년을 기준으로 알츠하이머 환자 치료에 910억 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해 미국이 해외원조에 지출한 예산은 270억 달러였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위한 장기 치료에 많은 예산을 쓴다는 말은 곧 회복 가능성이 높은 다른 환자를 위한 치료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피터 싱어 교수는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믿음 때문에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하는 삶의 경계를 넘어서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 미정?

피터 싱어 교수의 많은 질문 중 관심을 끄는 하나가 '생물학적 성별이 중요한가'라는 것이었다. 즉 모든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의 경계를 넘어선 성전환자들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겪을 뿐 아니라 신체적인 폭력 또는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이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을 보이고 다른 성이 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성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거나 남성과 여성의 성 기관을 모두 갖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2011년에 호주는 여권 발급 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미정'이라는 호칭을 추가해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호주의 새로운 분류 시스템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태어날 때 주어진 성을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주의 시스템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피터 싱어 교수는 평가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성별을 묻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남성인지, 여성인지 밝히도록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다양한 역할과 지위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에게 특권을 주지 않으려 했던 시대의 유산이 아닌지 묻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성별을 묻는 관습을 없애면 스스로를 고정된 범주에 우겨넣어야 하는 이들의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 불평등 문제 또한 완화할 수 있다고 싱어 교수는 말한다.

자녀에게 '특정한 성의 틀'을 강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힌 한 스웨덴 부부는 아이들 이마에 파란색, 분홍색 도장을 찍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정말 잔인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아기를 낳으면서 파란색 옷도 분홍색 옷도 싫어서 노란 색 옷을 준비했다던 친구 말이 생각난다.

범죄를 약물로 예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동물에게도 복지가 필요할까, 왜 칠면조는 짝짓기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자발적 장기매매는 정당한가, 정말로 피임은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까, 그리고 동성애는 비도덕적일일까 등등 피터 싱어 교수는 <더 나은 세상>에서 무엇이 윤리적인지 짚어봐야 하는 쟁점들에 대해 깊은 사고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며, 철학을 배움으로써 개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피터 싱어 교수는 말한다. 이 겨울 털을 뽑혀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을 거위와 오리들을 생각하며 다운 패딩에 대한 욕망을 접고자 한다. 다운 패딩이여, 안녕.

덧붙이는 글 | 피터 싱어 지음, 박세연 옮김, 예문아카이브 펴냄, 2017년 11월



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피터 싱어 지음, 박세연 옮김, 예문아카이브(2017)


태그:#더 나은 세상, #피터 싱어, #구스다운 패딩, #평창 롱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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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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