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아빠 품을 침대로 인식하고 있나 봐. 아빠가 안기만 하면 자네."

며칠 전 저녁. 울먹울먹 칭얼대고 자꾸 용을 쓰는 손자를 받아 안은 뒤 금세 잠을 재우자, 딸이 한마디 했다.

"그게 아냐. 내가 편안하게 안으니까 잘 자는 거야."
"어이구, 또 자랑이시네. 아빠가 애 보는데 최고라는 거잖아. 그 말을 하고 싶으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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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와 함께하는 그림책 보기. 생후 2개월쯤인 손자는 청각보다는 시각 반응이 더 발달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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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나 아이 엄마(아내)가 손자를 보고 있을 때도, 나는 주변에서 '비상 대기조'로 서성이곤 한다. 왜인지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손자가 크게 보채기 시작하고, 잘 달래지지 않을 땐 후딱 넘겨받기 위해서다.

"걱정 마. 내가 널 이겨 먹으려는 게 아니야. 난 결정적 '한방'이 없잖니. 내 말은, 아이의 동태를 잘 파악하고 가능한 불편하지 않게 다양한 시도를 해보란 뜻이야. 내가 도저히 안정시킬 수 없다 싶으면 네게 넘기잖니?"

딸이나 아이 엄마도 인정하다시피, 손자를 식구 중에서는 내가 가장 잘 재운다. 하지만 영아 산통과 같은 극심한 불편함이 유발되면, 아이는 목이 터져라 5분이고 10분이고 쉬지 않고 울어대고 얼굴은 시뻘겋게 변하는데, 이럴 땐 나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안절부절 속만 타고 나 또한 공황에라도 빠져버릴 것 같은 느낌뿐이다. 

젖먹이가 사력을 다해 울 때 짓는 표정은 가까이서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견디기 힘든 고통감을 자아낸다. 아마 최고의 연극배우도 그렇게 곧 숨이 넘어 갈 듯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는 잘 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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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위에서 잠에 떨어진 손자. 손자를 안거나 재우는 자세를 10가지 넘게 자체 습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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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극심하게 오랫동안 울어댈 땐 젖을 물릴 수 있는 제 엄마에게 넘기는 도리밖에 없다. 이럴 땐 남자라서 수유 가능한 젖이 없다는 게 정말 한탄스럽다고 느껴진다. 딸의 위치를 감히 넘볼 수 없는 한계가 엄존하고, 이를 인정해야 할 땐, 손자 키우기에 진력을 한들 '도우미'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좌절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딸보다는 내가 육아 면에서 낫다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도 있다. 무엇보다 젖먹이라는 존재를, 좀 심각하게 얘기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내가 딸보다는 체계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옴므파탈' 손자 위해서는 지는 게 정답

세상의 모든 젖먹이는 '사기꾼'이다. 동시에 그들은 '팜므파탈'이거나 '옴므파탈'적 존재다. 이 치명적인 사기꾼에게는 속는 것이, 혹은 속아주는 것이 정상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이래, 젖먹이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제 어미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꼼짝 못 하게 하는 수단들을 발전시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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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난 직후 손자의 발. 중환자실 입원 사유가 된 혈변 때문이었는지 원래 출생에 따른 긴장 때문인지 발가락들을 오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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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응애~' 하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만큼 아름다우면서 처량하고 안타깝고 긴박감까지도 불러일으키는 세상의 소리가 몇이나 될까? 알람으로 치자면 경보나 비상벨 소리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수유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류의 합리적 판단이 끼어들 틈은 없다. 나도 모르게 미묘하게나마 심박 수가 올라가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아이 곁으로 달려가게 돼 있다.

어디 울음소리만 그런가? 통통한 볼살이며, 제 어미 뱃속부터 충분히 연습해 마스터한 배냇짓 살인 미소에 이르기까지, 두 눈 뜨고 보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젖먹이는 그 존재 자체가 치명적이다. 옛 시절 우리 할머니들이 손자·손녀의 대용어로 '강아지'라는 말을 썼다. 주먹만 한 강아지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것들이 아마 '미칠' 정도로 예쁜 존재라는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사람 새끼가 강아지만 못할까?

"우리 손자 서울 올라가면 똥 냄새도 그리울 것 같죠?"
"하나 마나 한 말을 뭐 하러 합니까?"

서울 제집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 않은 요즘, 어떤 날은 아이 엄마가 네댓 차례씩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내가 유달리 '닭살 돋는' 할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젖먹이의 변 냄새는 묘한 마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어디 변 냄새만 그러랴? 옷에서 나는 쉰 요구르트 같은 냄새, 한 이틀 목욕시키지 못할 경우 나는 시큼 퀴퀴한 듯한 몸 냄새도 (조금은 역겨운 듯하지만) 틀림없이 사랑스러운 냄새다.

과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더라도, 젖먹이들은 엄마를 인식하며 엄마 또한 제 새끼들의 냄새를 인식하게 돼 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사람들은 익히 아는 내용이겠지만, 아프리카 초원을 수만 마리씩 떼 지어 이동하는 누(gnu)들은 포식자들로부터 새끼들의 생존율을 높이려 거의 같은 시기에 출산을 한다. 계속 이동해야 하다 보니 미아가 수없이 생겨나는데, 이때 어미와 새끼는 얼굴이나 몸 생김새가 아니라 바로 냄새로 서로를 파악한다.

내가 손자를 안거나 재울 때 동원하는 자세는 최소 10가지가 넘는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불편하거나 힘든 동작일수록 반비례해 손자는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루 18시간 안팎 혹은 그 이상 잠을 자야 하는 젖먹이들에게 잠은 밥(수유)과 함께 삶을 구성하는 2대 요소이다.

젖먹이들의 잠은 성인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똑같은 밥만 먹으면 질리고 균형 잡힌 영양을 취할 수 없듯, 다양한 동작으로 잠잘 수 있게 하는 게 아이를 편안하게 하는 요체 중의 하나이다. 

하루 서너시간 자며 손자 돌볼 수 있는 이유

나는 갖은 자세를 개발해 내는 등 적극적으로 온 힘을 다해 손자를 돌보지만, 식구들은 때론 극성이라고 흉을 보기도 한다. 뭐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어찌 됐건 나 같은 열성파에게 젖먹이 키우기는 유행가 가사의 한 구절처럼 '전쟁 같은 사랑'이다.

그런가 하면 내 새끼를 내 손으로 돌보는 일은 단순히 명분만 챙기는 게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에서부터 삶의 무상함까지를 일거에 되새기게 하는 성숙의 시간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드는 이 '미친 사랑'이 하루 평균 3~4시간 수면에도 손자 육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다.

손자 육아는 이번이 처음이다. 앞으로 몇 명을 더 돌볼 여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극성 혹은 열성은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열성적 양육'에 따른 에피소드 또한 한둘이 아니다. 약 20년 전 외국에서 혼자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한번은 3시간 가까이 걸려 수제 인절미를 해준 일도 있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 갔지만, 아들과 딸은 고국에서 먹던 인절미 맛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른바 코리안 마켓에서 인절미를 사 올 수도 있었지만, 어느 날인가 갑자기 뜨끈하고 찰진 인절미를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거였다.

극성 발동. 퇴근길에 코리안 마켓에서 찹쌀을 한 되쯤을 사다가 질퍽하게 밥을 하고, 도마에 쏟아부은 뒤 수저의 뒷등으로 짓이기기를 2시간 넘게 했다. 온기가 식지 않은 찹쌀 떡에 바로 콩고물을 듬뿍 묻혀 주니 애들은 정말 좋아라 하며 맛있게 먹었다. 인절미 작업을 끝내고 잠자리에 든 그 날 밤 손가락 마디마디며 온 어깨가 쑤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뿌듯함으로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다.
   
사람이 크면 생각이 많아지고, 자연스레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태생이 '사기꾼'인 젖먹이들은 생각이 그리 많지 않다. 돌보는 사람의 마음과 몸동작을 거의 100% 가까이 흡수한다. 손자든 내 자식이든 돌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흡수율이 높으니 이만큼 효율적인 양육은 없다. 다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극성을 손자가 그대로 받아들여, 커서 너무 극성스럽지는 않았으면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난 이번에 손자 돌보기 전까지는 내전 중인 시리아의 여성이 아픈 혹은 다친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 같은 것들을 '그런가 보다'하고 무심코 기계적으로 봐 넘기곤 했다. 하지만 보름쯤 전이던가, 울어대는 손자를 나도 모르게 웅크리고 감싸 안으면서, 내 자세가 그 사진 속 여인을 닮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을지도 모르는 극성스러운 혹은 열의 가득한 손자 육아를 통해 또 하나의 평범한 교훈을 얻고, 난 오늘도 손자 덕분에 손톱만큼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