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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드럽게 춥다. 내가 너무 싫어하는 겨울이 왔다. 겨울이 싫은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은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버틸 수 있는데, 겨울은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계절이다.

매년 겨울마다 나는 움직임을 최소로 줄이고 동물들처럼 동면(冬眠)에 들어가는데, 작년에는 지금은 수감된 '박씨' 때문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느라 충전을 못 했다. 올해는 동면하고 싶은데, 싶지만 그러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지 못 하다. 그래서 오늘도 길을 나선다.

파인텍지회 고공농성 사진. 서울 목동의 75m 굴뚝 위에는 파인텍지회 두 명의 조합원이 농성 중이다.
 파인텍지회 고공농성 사진. 서울 목동의 75m 굴뚝 위에는 파인텍지회 두 명의 조합원이 농성 중이다.
ⓒ 땡땡책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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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밥알'이다. 정확히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 밥통(아래 밥통)'에서 활동하는 '밥알단' 멤버 중에 한 명이다. 연대가 필요한 현장으로 찾아가 밥 연대를 하는 밥통은 한 명의 상근 활동가와 함께 밥알들이 힘을 모아 운영되고 있다.

항상 불규칙한 스케줄로 빨리 밥 먹기에 바쁜 문화예술계에서 오래 일했던 나에게 '밥'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보람을 안겨주는 곳이 바로 밥통이다. 22일에는 서울에너지공사 목동지사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서 11일째 고공농성을 진행 중인 파인텍지회 현장으로 출동했다.

밥알들은 고공에 있는 두 동지를 위해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짐을 올리기 직전에 정성껏 데웠다. 동지들이 생리 현상을 편하게 해결할 수 없고, 추운 곳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메뉴 선택에 있어서도 다들 많은 고민 끝에 준비해왔다. 하루에 두 번, 굴뚝 꼭대기로 식사가 올라간다.

짐은 줄에 묶여 올라가는데, 오롯이 두 동지가 75m 위에서 끌어올린다. 우리는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잔뜩 보내고 싶은데 두 동지가 올리는데 힘들어 할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깨닫고 나니 순식간에 속이 상해 버렸다. 짐이 올라가는 장면을 다함께 올려다보는데, 마치 성서에서 예수가 고난의 길을 걷는 과정이 떠올랐다. 뭔가 성스러우면서 고귀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오이시맨 캡쳐
 오이시맨 캡쳐
ⓒ 오이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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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이시맨>은 한국의 수도인 서울과 일본의 대표 관광지인 북해도를 배경으로 한다. 가수인 현석(이민기 분)은 어느 순간부터 이명 증세를 보이고 급기야 녹음 중에 음감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갑자기 떠난 일본 북해도 공항에서 메구미(이케와키 치즈루 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 그녀다!)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민박집에서 머물게 된다. 세상의 소리들이 너무 힘들었던 현석은 반대로 소리가 없는 마을인 북해도에서 여행을 즐기고, 사연을 알 순 없지만 현석이 우울해보였던 메구미는 정성을 다해 요리를 만들어준다.

아쉽게도 그녀의 요리 솜씨는 형편없다. 하지만 메구미의 배려를 읽은 현석은 '굿'이라고 답한다. 그들은 비록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아주 기초적인 영어 단어로만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음식을 매개로 거리를 좁히고,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진심을 드러냈다.

현석은 떠나기 직전, 본인이 본국에서 먹던 달걀간장밥을 메구미와 함께 만들어 먹는다. '손님과 함께 내가 만든 밥을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속삭이는 메구미의 독백은 '오이시(おいしい : 맛있다)'라는 단어 속에서 현석을 기억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영화 <오이시맨>이 음식을 만드는 이에서 먹는 이로의 관점으로 옮겨지는 반면, 책 <요리 활동>은 반대의 이야기로 즐길 수 있다. 글쓴이 박영길은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서류상 대표이자 땡땡책협동조합 브런치에서 <내가 나에게 시비 거는 책읽기>라는 서평을 연재하고 있는 땡땡 조합원이다. 그는 정육점을 운영한 아버지와 식당 찬모를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한 지난 시절에서부터 요리와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향동구
 어향동구
ⓒ 땡땡책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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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활동'이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요리를 매개로 자신의 가족, 제2의 가족인 '공룡' 멤버들, 그리고 활동을 하면서 마주쳤던 사람들과 기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활동가로서의 삶을 걷고 있기 때문인지 활동의 본질과 요리를 연결한 부분이 아주 와 닿았다.

'실제 활동에서도 그렇다. 어떤 이가 자신이 전체를 조화롭게 아우른다고 여기는 경우에 이럴 수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끊임없는 열패감을 주거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역시 각자가 집중해야 할 부분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 <요리 활동> '어향동구' 편 중에서)'

박영길은 비관적 내지는 시니컬한 화법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 땡땡책협동조합 주최로 열린 <개념의 탈환, 공공의 재구성> 연속 강좌에서 그는 마을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 강의는 온통 '안돼요/망해요'라는 말로 가득했는데(!!!) 그 말이 마냥 '안된다'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철학, 그리고 고민과 애정이 녹아 있는 '좀 더 잘 해보자구요'로 들렸다.

그런 그의 뜨겁지만 티내지 않는 진심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매개가 아마 요리가 아닐까 싶다. 공룡이 '일상의 공동체'를 꿈꾸는 것처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오래하고픈 고민과 바람들이 각각의 요리로 이 책에 소개된다. 마치 '몇 큰술', '몇 그램'이 나와 있는 레시피 북이 아닌, 상대방을 그리며 만든 자신만의 요리법에 거칠게 되어 있는 물결 표시가 그를 똑 닮았다.

ⓒ 포도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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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에너지를 품고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도 우리는 밥을 먹으며 내부의 힘을 키워 제자리에서 버틸 수 있다. 밥은 안부를 묻는 것이다. "밥은 먹고 다니나?" 는 물음은 끼니 채움 너머의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묻는 척도가 된다. 밥은 관계의 힘이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힘을 전하고 마주한 사람으로부터 힘을 받는 시간을 마련함이다. 정성으로 잘 차려진 한 끼 밥상에는 우주가 품어져 있으니 쌀 한 톨부터 설거지 뒷정리까지 나 아닌 사람들의 기운과 수고로움을 바탕으로 야무지게 먹어야 한다. 그리고 두려운 세상이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뭐든 해볼 마음도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길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데우기 위한 뜨끈한 국밥을 끓인다.'

매번 출동 때마다 연대 발언에서 그날의 메뉴를 준비한 의미를 맛깔나게 풀어내는 밥통 손지후 매니저에게 그가 생각하는 '밥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관계의 힘이 되어주는 밥, 뭐든 해볼 마음도 함께 먹게 해주는 그런 밥을 만들어내는 마법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그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과 읽어내려는 노력이 버무려졌을 때 밥은 더욱 빛날 것이다.

'어떤 싸움에서든 무너지지 않는 일상이 중요하니까'라는 책 <요리 활동>의 메인 카피처럼, 오늘도 밥통의 밥, 박영길의 밥, 그리고 당신의 밥은 어느 순간에서도 그만의 가치를 빛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어제 굴뚝으로 올라간 밥처럼.

이번 서평은 박영길이라는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한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글이자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현장에서 또다른 누군가를 위해, 또는 우리 함께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활동가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좀 더 표현하고 살자. '그렇지 않더라도 중심을 잡으며 살아가기란 참 힘든(현석의 독백)' 세상 속에서 '내가 인생을 어떻게 아냐(메구미의 독백)' 싶은데 말이다. 나는 오늘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 누리집
https://www.facebook.com/mediagongryong

*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 밥통' 누리집
https://www.facebook.com/babtong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루카
인생은 B(Birth : 탄생)와 D(Death : 죽음) 사이의 C(Choice : 선택)이 아니라,
비빔면을 한 개 끓일 것인가 두 개 끓일 것인가 사이에서의 갈등과 같다.



요리 활동 - 어떤 싸움에서든 무너지지 않는 일상이 중요하니까

박영길 지음, 포도밭출판사(2016)


태그:#요리활동, #박영길,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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