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래된 질문이자 현재진행형인 이것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꽃씨처럼, 비수처럼 간직하고 있을 질문이다. 어떤 이는 위안으로서의 시를 말하고 어떤 이는 혁명과 해방의 무기로서의 시를, 또 어떤 이는 발견-깨달음으로서의 시를 말한다. 이 외에도 숱한 이름의 시가 있을 것이다.

올해로 나이 쉰여섯이고, 시집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이후 11년 만에 <봄 꿈>(산지니)을 세상에 내놓은 조향미에게 시는 무엇일까? 아니, 11년 전에는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일까?

시인 조향미에게 시란 무엇인가

조향미 시인의, <길보다 멀리 기다림은 뻗어 있네>, <새의 마음>,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에 이은 네 번째 시집이다.
▲ 시집 <봄 꿈>의 표지 조향미 시인의, <길보다 멀리 기다림은 뻗어 있네>, <새의 마음>,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에 이은 네 번째 시집이다.
ⓒ 산지니 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독주가 되었으면
아니 아니 그보다
품어주고 키워주고 익혀주지 않는 것 없던
향긋하고 달금하고 쿰쿰하고 뜨겁던 온돌방이었으면 (부분)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에 실린 '온돌방'(널리 애송되는 이 시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는데)이다. 그때 시인에게 시는 '온돌방'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표제시인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의 부제가 '녹색평론을 위하여'인 것만 봐도 그에게 시는 녹색평론적인 무엇을 지향하는 것임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공중의 새를 근심하여
새장에 넣고
들판의 백합을 찬미하여
꽃병에 꽂았다
거친 바람으로부터 새를 보호하고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꽃을 지켜주었다
매일매일 고단백 모이를 주고
무균질의 물을 갈아주었다

그러나 새는 노래를 잊었고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교육 또는 사랑은
종종 우주에 대한 불경이기도 했다 (전문)

이렇듯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의 시편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거나,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지게 하거나, 아아 그렇지, 하는 나직한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것만으로도 가히 아름답고 우리에겐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봄 꿈>은 어떨까? 성급하게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게 <봄 꿈>은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와는 선연하게 다른 지평을 보여주는 시집으로 다가왔다고. <봄 꿈>에도 '온돌방' 은 있고 '국화차'도 있고 시인에게 팔을 벌리는 '나무'들도 있지만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와 <봄 꿈> 사이엔 건너뛰기 힘든 심연-크레바스가 가로놓여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왜일까? 두 시집 사이의 세월 속에 시인에게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

'생생한 꿈길'?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라 했는데?

아직 질문이 그치지 않았으니
이 생생한 꿈길을 따라가 볼 뿐이다

시집 첫 페이지에서 만난 딱 두 줄의 '시인의 말 하나'다. 이 진술부터가 내겐 심상찮았다. '생생한 꿈길'이라니, 참 생뚱맞게도 순간 나는 조주 선사의 저 유명한 '뜰 앞의 잣나무'를 떠올렸다. 한 제자가 무엇이 부처의 참된 법이냐고 묻자 조주는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다." 이 동문서답에서 숨은 의미를 찾으려 들면 곧장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선가에서는 말한다. 조주는 그냥 뜰․앞․의․잣․나․무라고 말했을 뿐인데 거기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하거나 뭔가를 탐구하려 들면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코앞의 실재하는 존재/ 실존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다.

'생생한 꿈길'은 형용모순이라면 형용모순이다. 어떤 꿈은 생생하게 기억된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꿈은 꿈일 따름이고 생생할 수가 없다. 모든 꿈은 허망하고 생생한 것은 지금 여기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살아있는 무엇인 것이다.

그럼 형용모순으로서 '생생한 꿈길'로 시인이 말하고/가리키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생생한 꿈길'을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은 선적(禪的) 언어로 받아들인다면 '아직 질문이 그치지 않았으니/ 이 생생한 꿈길을 따라가 볼 뿐이다'는 인과관계적 진술로 읽을 수가 없게 된다.

두 행의 문장을 인과 관계로 그 의미를 유추하면 시인은 '아직 질문이 그치지 않'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아직 뭘 모르기 때문에 (원인) 종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꿈 속 허망한 길을 따라가 볼 뿐이라는 (결과) 말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래서야 나로선 김도 빠지고 재미도 없다. 이 '시인의 말 하나'는 시집 전체를 통 털어 시인이 꼭 하고 싶은 말임이 분명해 보이니만치 그렇게 풀어버리면 (그래도 나쁠 것까지야 없지만) 중요한 무엇을 놓치게 된다. 이 진술의 핵심은 '생생'함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와 <봄 꿈> 사이에 시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봄 꿈>의 시인에게는 '아직 질문이 그치지 않'은 것도, 꿈도, 꿈속의 길도, 이렇듯 그 꿈 속 길을 노래하는 것도 모두가 아주 생생하고도 생생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봄 꿈>이 걷는 '생생한 꿈길'의 시편들은 생생하게도 무언가를, 그러니까 말 너머의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시의 언어와 진리, 은폐된 존재의 드러남

하이데거 (M.Heidegger)에게 그야말로 시(詩)다운 시, 혹은 참된 예술이란 은폐되었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무엇이다. 이때의 '존재'는 '진리'와 동의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술 작품은 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놓는다.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열어놓음이, 탈은폐함이, 다시 말해 존재자의 진리가 일어난다. (……) 예술은 진리가 작품-속으로-스스로를-정립하고-있음이다."

또한 그는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에서 '궁핍한 시대'로서 '세계의 밤'의 시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존재를 숨기는 시대'이며 '진리'가 '은폐'되는 시대라고. 그러기에 진정한 시인의 사명은 명백하다.

궁극의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는 것이며, 시 언어를 통해 불가사의하다는 존재의 진리를 바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조향미의 '그치지 않'은 질문은 존재/실존을 향한, 곧장 진리 문제를 향해 직진해 들어가는 무엇이다.

방랑의 여로가 아니다 / 여분의 욕망도 / 낭만도 아니다 / 가지 않고 / 오지 않으면 / 살 수가 없어 / 백척간두 길을 내었다 / 실핏줄처럼 / 간절한 길 / 꺼질 듯 / 날아갈 듯 / 아스라이 -〈너에게 -차마고도(茶馬古道)〉전문

시집 맨 앞에 배치된 시다. '차마고도', 저 '백척간두 길'은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티베트 사람들의 엄연한 생의 터전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인의 시의 언어를 통해 '꺼질 듯/ 날아갈 듯/ 아스라이' 그렇게 생생하게 그 존재를 우리 앞에 드러내기도 한다. 아, 우리는 저토록 '꺼질 듯/ 날아갈 듯/ 아스라이' 살고 싶은 것이리라! 존재의 실상은 그런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에게 그 존재 자체의 드러남을 막는 것은 숱한 현자들도 말했듯이 다른 무엇보다 생각-분별심이라는 장애고 사슬이다. 시인에게도 이 생각이라는 놈이 만만찮은 장애였던 모양으로 시집에는 그 '생각'에 대한 응시로서의 시가 두 편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보자.

'생각-분별심'으로부터의 해방, '틈'이 없는 우주

쓸어내도 쓸어내도/ 생각이 폭설로 쏟아진다 차고 쓸쓸한 생각들이 /외떨어진 마음 안에 쌓여 / 사방 길도 안 보이고 / 마침내 꽝꽝한 얼음이 되어 / 바늘 하나 꽂힐 틈도 없이 / 꽉 끼어 터질 듯하다 / (……) / 기진맥진 나가 떨어졌다 / 망연히 고개 들어 둘러보니 / 빈 가지로 견결한 나무들 겨울산은 훤하니 고요하다 / 어디에도 눈 내린 흔적 없다
-〈생각 1 – 폭설〉부분

생각-좁은 굴레의 아상(我相)에서 해방되는 순간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된 듯, 궁극의 고향으로 비로소 돌아온 듯 그야말로 나를 포함한 삼라만상은 존재 그 자체로 온전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선명하다.

집 우(宇) 집 주(宙)
우주의 욕조에
몸을 잠근다
물은 따뜻하고
넘실넘실 충만하다
길고 긴 세월
바람찬 거리에서
한 개 외딴 얼음조각이었던 나는
스르르 물속으로 녹아든다
만물은 다만 출렁이는 물이어서
천지는 틈이 없다 - <귀향> 전문

'틈이 없다'는 말은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본래 가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귀향'이다. 뭐라고? 이 세상은 전쟁과 질병과 욕망과 불신과 광기로 가득 차 있는데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니, 시인은 속 편한 자기만의 둥지 속이나 그 무슨 고상한 천상에서 거해 있기라도 하단 말이냐고 따져 물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시인으로 말하면 '인간사 풍파를 많이 겪은 나'(<정정>)로서 시집에는 그가 분투하는 한 교사로서, 민주주의를 앙망하는 한 시민으로서, 또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는 한 인간으로서 이 나라의 간고한 역사를 살아온 길에서 길어 올린 시편들도 상당하다, 마땅히도! 그 중 저 세월호의 아이들을 울며 노래한 시편을 읽어 본다.

앳되고 고운 우리 아이들 영정 속에 있지 않습니다
저 붉은 뺨의 아이들이 어찌 창백한 조화 속에 누워 있을까요
아빠 살려줘 엄마 무서워 울며 울며 떠난 아이들
아직도 캄캄한 바다 속을 떠다니는 피눈물 나는 내 새끼들
바람으로 햇볕으로 빗물로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우리와 함께 숨 쉬고 말하고 먹습니다
(……)
우리 모두 열일곱 살
팔랑팔랑 노란 나비로 날아오릅니다
넘실넘실 푸른 바다 넘어갑니다
- 〈우리 모두 열일곱 살〉부분

그럼에도, 그러니까 오늘의 파란 많은 역사를 준열하게 살아내는 속에서도 시인은 '날아갈 듯' 생을 사랑하고, '숨 막히는 더위/ 태울 듯한 햇볕을 지나온 사과', '스물 몇 번 친다는 농약의 유혹을 이기고/ 자연이 주시는 축복과 시련을/ 백 프로 수용하고 견뎌낸' 사과 앞에서 '묵상'을 하며 '둥근 손으로 예배'도 한다.

저 '하느님의 사과'이자 '하느님인 사과' 앞에서 말이다. (〈사과 하느님〉) 그렇지 않다면 과연 시인일까? 또한 역사 속에서 역사 너머를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이 없다면, 그러니까 분별 속에서도 분별을 넘어 본래 면목을 향하는 곡진한 구도심이 없다면 말이다.

'날아갈 듯' 생을 사랑하는 시인

<봄 꿈>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내 마음은 순간순간 '날아갈 듯 찬란'해진다. 그것은 조향미 시 언어의 힘이라면 힘이고 구도자의 순정한 영혼이라면 영혼이고 지혜의 빛이라면 빛이라 하겠다.

날아갈 듯한 숱한 시편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찬란'한 절창,〈날아갈 듯〉을 다시금 낭송해 보는 것으로써 '궁핍한 시대의 시인'(하이데거)으로서 존재의 진리를 시의 언어로 드러내는 데 곧잘 성공하고 있는 조향미 시인에게 공감과 고마움의 합장 인사를 전해 본다.

영도 영선동 곡각지 돌아들면
푸른 바다 마주하고
오래된 집들 다닥다닥 붙어있다
도로변엔 낚시가게 철물점 진돗개 파는 집
선반에 라면 몇 개 얹어놓은 구멍가게
바다 쪽으론 오밀조밀 살림집들
태풍 불 때 이 동네 어찌할까
지붕 훌렁 날아가지 않을까
어깨 넓이 좁은 골목길 들어서니
바다색 페인트 떡칠한 슬레이트 지붕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촘촘히 눌러놓았다
태풍이야 맨날 오는 것은 아니지
한 번씩 미친 비바람 몰아칠 땐
지붕에 돌멩이 몇 개를 더 얹는 거지
그러다 천연스레 맑은 날
태평양 바다 앞에 빨랫줄 치고
눅눅한 이불도 고린 양말짝도
젖은 가슴도 쨍쨍하니 말리는 것이다
바윗돌 짊어진 듯 숨찬 생애도
날아갈 듯 찬란해지는 날도 오는 것이다 (전문)            


봄 꿈

조향미 지음, 산지니(2017)


태그:#교육공동체 벗, #전교조, #부산다행복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