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명의 프로야구 전설이 정든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의 영웅이자 KBO 역대 최고의 잠수함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대현이 최근 소속팀 롯데에 은퇴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아쉬움을 주고 있다.

정대현의 은퇴는 이미 22일 프로야구 2차 드래프트 회의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롯데는 정대현의 의사를 존중하여 은퇴를 수용했고 다른 구단들도 정대현을 지명하지 않았다.

정대현은 2001년 SK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하여 2016시즌까지 총 662경기에 주로 불펜투수로 등판하여 726.1이닝 동안 46승 29패 121홀드 106세이브를 기록했다. 100홀드-100세이브라는 진기록에서 보듯 중간계투-셋업맨-마무리 등 불펜의 어느 보직에서도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전천후 투수였으며 통산 자책점이 2.21에 불과할 만큼 안정감있는 활약을 보였다.

정대현의 최전성기는 프로야구 SK 와이번스의 왕조 시절과 겹친다. 한 경기에 여러 명의 투수들을 동원하는 소위 '벌떼야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당시 SK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마운드를 지켜낸 정대현을 두고 '여왕벌'이라는 별명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SK는 정대현과 함께한 시간 동안 3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국에서도 몇 안되는 정통 언더핸드 투수로 분류되는 정대현의 강점은 탁월한 제구력과 무브먼트였다. 마무리 투수치고는 구속이 상당히 느린 편이었지만 볼끝의 변화가 워낙 심하여 공을 열 개 던지면 (심지어 직구까지도) 똑바로 가는 공이 없다고 할 만큼 타자들에게는 배팅 타이밍을 맞추기가 까다롭기 그지 없었다.

정대현이 아웃카운트를 잡은 경기를 살펴보면 뜬공보다 땅볼의 비중이 훨씬 높다. 그래서 장타 허용에 대한 부담이 적고 실점 상황에서 병살로 위기를 모면하는 경우도 많았다.여기에 돌부처로 유명한 오승환을 능가하는 '포커페이스'에, 뛰어난 수싸움과 완급조절 능력까지 겸비하여 위기 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없었다. 한마디로 불펜투수로서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투수였다.

당대 최고의 타자로 꼽히는 이대호의 '천적'으로도 유명했다. 이대호는 정대현을 상대로 2011년까지 통산 54타석에서 49타수 5안타 6삼진 4볼넷 1사사구로 철저히 봉쇄당했다. 통산 상대타율은 .102로 이대호를 50타석 이상 상대한 국내 투수 중 이 정도로 완벽하게 막아낸 투수는 정대현이 유일하다. SK와 롯데가 한창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던 시절에 위기 상황마다 정대현이 이대호의 전담투수로 등판하여 이대호만 아웃시키고 다시 교체되는 웃지못할 장면도 종종 나왔다.

이대호가 2012년부터 해외로 진출하고 다시 롯데로 복귀한 2017년에는 정대현이 같은 소속팀이 되어 굳이 상대할 기회가 없었다. 정대현이 은퇴하게 되면서 이대호 스토퍼라는 기록은 영원히 남게됐다. 이대호는 정대현이라는 천적이 사라진 이후에도 신정락(LG) 등 잠수함 유형의 투수에게 유난히 약한 징크스를 지속하고 있다.

국가대표에서의 헌신과 활약상 두드러진 선수

뭐니뭐니해도 정대현이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서의 활약이었다. 정대현은 아마추어시절이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동메달을 시작으로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2009년 WBC 준우승. 2015 프리미어12 우승 등 한국야구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항상 정대현이 있었다. 국내 타자들에게도 까다로웠던 공이었지만 잠수함 투수들을 상대할 기회가 많지 않은 외국인 타자들에게 정대현의 변화무쌍한 슬라이더와 싱커는 그야말로 마구와도 같았다.

심지어 KBO리그에서 잠시 부진하거나 잔부상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국가대표 유니폼만 입으면 유독 펄펄 나는 모습에 정대현이 진짜 소속팀은 '팀 코리아'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승엽-박찬호 등과 함께 국가대표에서의 헌신과 활약상 만큼은 비난받은 일이 전무한 몇 안되는 선수였다.

정대현의 야구인생을 통틀어 가장 최고의 순간으로 꼽히는 것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이다. 당시 선발투수로 나섰던 류현진에 이어 정대현은 3-2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9회말 1사 만루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무리로 투입됐다. 당시 심판의 이상한 스트라이크존 판정으로 선수단 분위기가 흔들리고 있던 데다가 포수 강민호까지 퇴장당하며 흐름은 한국에게 최악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교체된 배터리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진갑용은 허벅지 부상으로 내내 벤치를 지키고 있었고 정대현도 허리 부상으로 이날 경기 전까지는 대표팀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정대현의 등판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대표팀 불펜에는 또 다른 마무리 후보였던 오승환이나 한기주가 하필 모두 컨디션이 좋지 않아 투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경문 감독은 고심 끝에 전천후 계투로 활약하던 윤석민의 마무리 투입을 고려했으나 마지막에 돌연 정대현으로 마음을 바꿨다. 불펜에서 투수들의 공을 직접 받았던 포수 진갑용에게 문의한 결과 '정대현의 공이 괜찮다'라는 의견을 듣고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진갑용은 훗날 인터뷰에서 "나도 무심결에 대답해놓고 '내가 미쳤지'하고 후회했다. 그때 결과가 만일 잘못되기라도 했다면..."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김경문 감독과 진갑용의 판단은 신의 한수가 됐다. 정대현은 쿠바의 마지막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상대로 연속 슬라이더로 투스트라이크 판정을 얻어냈다. 2구는 공이 가운데로 몰린 실투에 가까웠으나 구리엘의 배트가 나오지 않으며 정대현에게 유리한 상황이 됐다. 다급해진 구리엘은 정대현의 3구째 유인구에 배트를 휘둘렀으나 유격수 앞 땅볼이 됐고 유격수 박진만-2루수 고영민-1루수 이승엽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병살타로 이어지며 진땀나던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야구가 9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으로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던 순간이었다. 평소 무표정하던 정대현도 이때만큼은 진갑용과 얼싸안고 좀처럼 보기 힘들던 환호를 내질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대현이었지만 그의 선수생활 내내 발목을 잡은 약점은 건강이었다. 정대현은 전성기보다 실력보다 내구성 문제로 장기간 꾸준히 활약해준 경우가 드물었다. 혹사논란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김성근의 SK 시절에도 정대현만큼은 특별히 관리를 받았을 정도였다. 2011년 겨울에는 FA자격을 얻어 해외진출에 도전했으나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 입단을 눈앞에 두고 결국 부상 전력이 문제가 되어 빅리그 진출이 좌절되기도 했다.

이후 정대현은 뒷문보강이 절실하던 롯데와 FA 계약을 맺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으나 잦은 부상으로 SK 시절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2017년에는 아예 1군 마운드에 단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롯데로서는 정대현이 외부 FA 영입에 최악의 실패 사례중 하나로 남게 됐다. 전성기 때는 SK에서 이대호와 롯데의 천적으로, 롯데 시절에는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롯데 팬들에게만큼은 정대현의 추억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게 남게 됐다.

마무리는 비록 아쉬운 모양새가 되었으나 정대현이 한국야구의 한 시대를 빛낸 위대한 투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이미지 때문에 대중적으로 친근한 스타는 아니었지만 한국야구가 어려운 상황마다 마운드에 올라 특유의 무표정으로 숱한 위기를 돌파해내던 정대현의 모습은 태산처럼 든든한 '수호신'으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은퇴 후 해외연수를 거쳐 지도자로 돌아올 정대현의 새로운 야구인생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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