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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단성면 목화 최초 재배지 앞에 있는 목화밭
 경남 산청군 단성면 목화 최초 재배지 앞에 있는 목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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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렸다. 솜털 눈이 내렸다. 지난 21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목화 최초 재배지 앞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는 풍경은 따뜻한 겨울이었다. 목화 최초 재배지 기념관 앞 목화밭. 목화가 팝콘을 터트린 듯 봉우리를 터트렸다. 환한 목화가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했다.

산청 목화시배지기념관
 산청 목화시배지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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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털을 입은 듯한 따뜻한 기분으로 기념관을 들어섰다. 하늘의 별을 닮은 단풍나무 잎들이 카펫처럼 펼쳐졌다. 잠시 별들 속에서 지내다 나온 듯했다. 기념관을 나와 인도를 따라가다 산청특산물 판매장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차장 한쪽으로 홍살문이 나왔다. 문익점 선생의 장인인 정천익 선생과 그의 부친 정유 선생의 효우사적비와 신도비가 있다.

산청 배산서원 입구
 산청 배산서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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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배산서원
 산청 배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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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배산서원은 일제강점기 '유교의 종교화'를 폈던 유교개혁사상가 진암(眞庵) 이병헌(李柄憲1870~1940) 선생이 건립을 발의했다.
 산청 배산서원은 일제강점기 '유교의 종교화'를 폈던 유교개혁사상가 진암(眞庵) 이병헌(李柄憲1870~1940) 선생이 건립을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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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이씨 세거지'와 '배산서원(培山書院) 입구'라 적힌 빗돌 옆에 배양마을 표지석이 작게 서 있다. 화살표 방향으로 200m 마을로 들어가면 홍살문이 나온다. 여느 홍살문과 달리 가운데 태극문양 좌우에 녹색의 대나무와 책 같은 그림이 한 쌍씩 그려져 낯설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앙상한 은행나무 옆에 '복원유교지본산(復元儒敎之本山)'이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 내에서 양무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사회 전반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벌인 캉유웨이(강유위, 康有爲)의 유일한 손자가 배산서원을 방문해 쓴 글을 새긴 것이다.

배산서원 건립을 발의한 진암(眞庵) 이병헌(李柄憲, 1870~1940) 선생은 면우 곽종석 선생의 제자다. 일제강점기에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통 유교를 종교화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던 유교개혁 사상가다.

그는 1913년부터 1925년까지 5차에 걸쳐 중국을 찾아가 강유위를 방문해 공자교에 대한 기본 노선을 공부하고 공자교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을 배웠다. 다섯차례나 오가면서 캉유웨이에게 공자교에 대한 기본 노선을 전수받고 공자교의 사상적 기반인 금문경학(今文經學)을 배웠다.

향교식(鄕校式) 유교가 아닌 종교식 유교를 보급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923년 현재의 배산서원에 공자의 문묘(文廟)를 세우고 제향을 올렸다. 문묘 아래 도동사(道東祠)를 짓고, 퇴계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을 봉향(奉享)하고, 왼쪽에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를 종향(從享)했다. 주자를 봉향(奉享)하지 않아 당시 유림의 반대로 공자교 운동은 더는 확산하지 못했다.

산청 배산서원
 산청 배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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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배산성원 강당에는 중국 변법자강운동을 펼친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培山書堂) 현판이 걸려 있다.
 산청 배산성원 강당에는 중국 변법자강운동을 펼친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培山書堂)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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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강당에는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培山書堂) 현판이 걸려 있다.

산청 배산서원 문묘
 산청 배산서원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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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을 나와 뒤쪽 도동사로 향했다. 도동사에 모셔진 네 분 중 청향당과 남명·퇴계 선생은 1501년생 동갑내기다. 청향당과 남명, 청향당과 퇴계는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 청향당은 18세에 남명과 산사에서 <주역>을 읽었으며 김해 산해정을 찾아가거나 아들 이광곤과 조카 죽각 이광우를 남명에게 보내 배우도록 하는 등 절친한 친분을 쌓았다. 21세 때에는 의령 이씨에게 장가들어 처가에 갔다가 퇴계 이황을 만났다.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고 방문했다. 청향당은 죽각을 퇴계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기도 했다.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산청 배산서원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산청 배산서원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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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과 퇴계 선생은 서로 존중했나 기질은 달랐다.
 남명과 퇴계 선생은 서로 존중했나 기질은 달랐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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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향당은 남명과 퇴계와 교유했지만 남명과 퇴계는 서신만 주고받았다. 그뿐이다. 퇴계 선생은 처가인 의령에 들렀다가 진주에 이르러 남명에게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만나지는 않았다. 단성에 사는 청향당을 찾은 적이 있지만 단성에서 멀지 않은 덕산에 기거했던 남명을 찾지 않았다. 청향당 선생도 두 사람이 만나도록 주선하지 않았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성호사설> 중에서)

이같은 성호 이익 선생의 말씀처럼, 조선 유학의 절정에 이른 남명과 퇴계 선생은 왜 서로 만나지 않았을까.

퇴계에게 드림(與退溪書)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요? 인간의 세상사에 좋지 않은 일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걸릴 것이 없는데, 유독 이 점이 제일 한스러운 일입니다. 선생께서 의춘(의령)으로 오시면 쌓인 회포를 풀 날이 있으리라 매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오신다는 소식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늘의 처분에 모두 맡겨야 하겠습니다. (중략)

갑자년(명종 19,1564) 9월 18일 못난 동갑내기 건중(建仲- 남명 선생의 자) 드림.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옮긴 <남명집> 중에서)

서로 존중했으나 기질은 달랐다. 퇴계 선생은 는 남명을 일컬어 '노장(老壯)에 물들었다'라고 비판했다. 남명 선생 역시 퇴계 선생을 일러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천 리를 담론하고 허명을 훔치는 후학을 말리지 않는다'며 앞선 편지에서 말하기도 했다.

산청 배산서원은 한 서원에 2개의 사당이 있는 것이 일반 서원과 다르다.
 산청 배산서원은 한 서원에 2개의 사당이 있는 것이 일반 서원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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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사에서 문묘로 향하는 내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청향당 시에 화답하여 (화청향당시, 和淸香堂詩)
네 가지 같으니 응당 새로 안 사람과는 다르네 (사동응불재신지, 四同應不在新知)
나를 일찍이 종자기(鍾子期)에 견주었었지 (의아증어종자기, 擬我曾於鍾子期)
칠언시·오언시가 만금의 가치가 있건만 (칠자온언금직만, 七字五言金直萬)
곁의 사람은 한 편의 시로만 간주하는구나 (방인간작일편시, 傍人看作一篇詩)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옮긴<남명집> 중에서)

산청 배산서원 뒤 숲길
 산청 배산서원 뒤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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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은 청향당 선생을 일러 '나이, 마음, 덕, 도'가 같다고 했다. 4가지가 같은 청향당과 달리 퇴계는 '사가지'가 달랐을까? 못 만난 게 아니라 안 만난 남명과 퇴계 선생. 문묘를 나와 서원 뒤편으로 난 길을 걸으면서도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와 같은 궁금증으로 남는다.

덧붙이는 글 |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진주지역 독립언론 <단디뉴스>, <해찬솔일기>



태그:#배산서원, #도동사, #청향당 이원, #남명 조식,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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