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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육아, 가사노동 등을 도맡아 하는 모습입니다.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아이가 있는 여성은 집안에 갇힌 납작한 존재로 그려지는 걸까요? 여기,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뛰어넘고 제 목소리를 내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육 개혁·정치·여성주의 등의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엄마의 영역'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당연한 명제를 몸소 증명하는, 'OO하는 엄마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영어 강사인 혜영씨는 앨범 발매 경력이 있는 전직 가수다. 대학생 때 밴드부 활동을 활발히 하며 실력을 다졌던 그는 맑은 목소리와 성실함을 무기로 가수 활동을 했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가수의 꿈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그는 고양여성동아리플랫폼 '동네친구'를 만나 다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혜영씨가 만난 동아리 '동네친구'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여성들이 단체를 자유롭게 조직해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플랫폼'이다. 2013년 말에 영어 원서를 읽는 작은 모임에서 시작한 동네친구는, 여성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포착해내며 규모를 키웠다. 지금은 14개 모임의 운영을 지원하는 지난 8일, '동네친구'의 조이헌임 대표와 회원 김혜영 씨를 만났다.

고양여성동아리플랫폼 '동네친구'의 대표 조이헌임, 회원 김혜영 씨.
 고양여성동아리플랫폼 '동네친구'의 대표 조이헌임, 회원 김혜영 씨.
ⓒ 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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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다섯 살, 여덟 살 된 아이들의 엄마인 조이헌임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총여학생회 활동을 하며 여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후 여성들의 풀뿌리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하며 자신의 신념을 직업으로 이어왔다.

학창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졸업 이후에도 일을 쉬어 본적이 없는 조이 대표이지만,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보니 작은 취미라도 갖기 힘든 것이 아쉬웠다. 그러던 중 영어 원서 읽기 모임에 참여하게 된 조이 대표는 실로 오랜만에 질문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조이 대표는 '우리가 느낀 희열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들'이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육아나 자녀 교육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누구 엄마'로 불릴지언정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과 관심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동아리'라는 틀이 형성되고 난 후에는, 육아의 범위를 벗어난 다양한 관심사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텃밭을 가꾸는 것에, 누군가는 영어 그림책 읽기에, 누군가는 과학 지식에 관심이 있었다. 조이 대표와 회원들은 이 모든 관심사를 아우를 수 있는 방식을 함께 고민했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여성들이 동아리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바꾸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동아리 플랫폼의 방식을 구현해냈다.

"학부모 모임이 아니라서 좋아요" 웃픈 그 말

'동네친구'는 여성들의 관심사를 동아리 활동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이다.
 '동네친구'는 여성들의 관심사를 동아리 활동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이다.
ⓒ 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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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명의 주부와 직장인 여성들이 처음으로 모였고, 더 넓은 호기심들이 뭉치자 회원 수가 두 배로 늘었다. 이러한 플랫폼 형태가 자리 잡고 나서 처음으로 만든 동아리는 바로 '달살려'(달콤 살벌한 여자들)라는 페미니즘 읽기 동아리다.

조이 대표는 여성단체에서 오래 일했지만, 실무에 집중하다보니 막상 여성주의 서적을 읽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한 회원이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선물해줬는데, 조이 대표는 여성들이 모인 만큼 이 책을 여러 사람이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이 대표가 이를 제안하니, 회원들이 반겼다.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어려움 혹은 전업주부로만 살아오면서 느끼는 답답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독서모임은 그렇게 시작됐다.

'달살려'의 회원들은 페미니즘 읽기 모임을 통해 평소 느끼던 불편함을 여성주의의 언어로 설명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빨래하는 페미니즘> 등의 여성주의 서적이 많은 도움을 줬다. 한 회원은 집안에서 요구하는 '올바른' 엄마의 상, 며느리의 상을 적극적으로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도 했다.

타지에서 일을 하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살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처음으로 "저는 저의 일을 포기하기 싫습니다"라고 응대할 수 있는 정도의 용기였다. 회원들은 학문과 일상에서의 경험을 넘나들며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했고, 주체적으로 자아를 찾아나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회원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며 처음 하는 말이 있다. "여기는 학부모 모임이 아니라서 너무 좋아요"라는 말이다. 동아리 회원의 3분의2 이상이 기혼 여성이다. 회원들은 학부모 모임이 주는 피로감을 잘 알고 있다. 주로 아이의 교육에 맞춰져 있는, 학교나 학원에 관한 정보만을 공유하는 모임에는 '엄마'만 존재할 뿐 '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신변잡기가 중심이 되는 엄마들의 모임은 가슴 떨리는 만남을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동네친구' 회원들은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는, 여성 주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나면서 그 피로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엄마도, 며느리도 아닌 '나'로 서는 경험

페미니즘 독서 동아리 '달살려' 회원들은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공유하며, 누군가의 엄마-아내가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페미니즘 독서 동아리 '달살려' 회원들은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공유하며, 누군가의 엄마-아내가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 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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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독서모임 뿐만 아니라, 과학책 읽기 모임, 역사 공부 모임, 함께 나이들기 모임 등 다양한 관심사들이 모여 여성들의 공동체를 꾸렸다. 그 중에서도 회원 김혜영씨가 주도하는 중창단은 책읽기 등의 정적인 모임에서 탈피한 첫 시도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활동한 경험과 가수 시절의 경험을 살려, 회원 각자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는 것을 목표한다고 한다.

혜영씨는 끼 있고 재주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대학가요제 은상 출신인 유능한 선배가 있다. 그 선배가 쌍둥이 아이를 낳고 쉬다가 오랜만에 연습실에 나왔는데, 정말 실력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매사에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이더라. 어릴 때는 그 선배의 소극적으로 변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내가 육아와 출산의 과정을 겪고 보니 지금은 200 퍼센트 이해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들이어도 결혼과 출산으로부터 오는 단절에서는 무력해지기 마련이더라."

이렇게 여성들의 '경력 단절'은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각자가 지닌 고유한 끼와 재능, 사회생활 능력, 어디에든 활용될 수 있는 각종 유능함이 무용해지는 일이었다. 조이헌임 대표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모든 회원들이 각자의 능력이 있다는 것에 항상 놀란다"고 말했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한 여성들이 많은만큼, 각자의 전공 지식은 물론이고, 포스터 제작, 텍스트 분석, 정리, 회계 등 동아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내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동네친구를 통해 이렇게 보석들이 곳곳에 숨어있구나, 많은 여성들이 많은 재주와 재능과 자원을 갖고 있는데, 그것들이 묻혀있거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 활동을 우리의 가능성을 서로 찾아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이헌임 대표)

'동네친구' 회원의 70% 이상이 기혼 전업주부라는 점에서, 이들의 첫 시작은 큰 의미가 있다. 회원 김혜영씨는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거의 10년 만에 '회의'라는 것에 참여해봤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성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사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주부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혜영씨는 "이 시간동안 누군가의 부인이나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회의뿐만 아니라, 영어 독서모임을 위해 밤마다 영어책을 몰두해서 읽고 합창 연습을 위해 악보를 공부하는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다.

'동네친구'의 목표는 여성들이 온전한 나로 성장하는 과정을 격려하는 것이다.
 '동네친구'의 목표는 여성들이 온전한 나로 성장하는 과정을 격려하는 것이다.
ⓒ 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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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헌임 대표는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활동이, 여성 운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여성단체에서 활동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들의 숨어있는 능력을 느낀다.

"여성들, 그 중에서도 결혼한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하나의 개인,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곤 한다. 그런 여성들이 동아리라는 작은 공동체에 모여 서로의 능력치를 발견해주는 모습을 보면, 그 전에 문서로나 이론으로 접했던 여성 연대의 현장을 물씬 느낀다."

조이 대표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딸이 아니라, 여성이 그 사람 자체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여성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제도나 구조로 해결해야하는 문제를 넘어, 여성들 스스로 자기가 왜 존재하는가를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 자기 존재와 자기 존중감을 찾아나갈 것이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고양시 여성동아리 동네친구
 고양시 여성동아리 동네친구
ⓒ 동네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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