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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다. 통계의 주체마다 조금씩 비율이 다르지만, 통계청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는 적어도 전체 근로자의 30%가 넘는다. 비정규직은 대개 정규직보다 쉽게 해고당하며, 월급도 훨씬 적게 받는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소득 격차 역시 심화되고 있다.

통계청의 <근로 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정규직 근로자 월 평균 임금은 284만3천원이었는데, 비정규직 근로자 월 평균 임금은 156만5천원이었다. 2004년 8월에는 정규직 월급이 177만1천원, 비정규직 월급이 115만2천원이었다고 하니 불평등이 엄청난 속도로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비정규직 제도 덕분에 그나마 고용이 창출된다고 주장하고,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 제도의 타파를 주장한다. 비정규직 제도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각자의 관점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 비정규직 제도를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본 책이 있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중간착취자의 나라>
ⓒ 미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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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착취자의 나라>는 변호사이자 <정의란 무엇인가는 없다>라는 철학서의 저자로도 유명한 이한씨가, 국내 비정규직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정의에 관한 책을 쓴 저자답게, 정의의 관점에서 비정규직 제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점이 다른 책과 다른 특이점이다.

저자는 비정규직을 정의하고, 비정규직의 기능과 현실, 롤즈의 정의의 원칙에 기초한 비정규직 분석, 이에 대한 대안을 논한다. 매 문단마다 변호사 출신인 저자의 꼼꼼하고 논리적인 글 전개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저자는 우선 비정규직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비정규직은 회사에 고용되어 일은 하지만, 정규직이 아닌 신분을 말한다. 계약서에 기간이 명시된 기간제 근로자, 하루 종일 일하지 않고 일부 시간만 일하는 시간제 근로자, A회사에 채용되었지만 B회사에서 일하는 간접 고용 근로자, 실제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만 하지만 자영업자로 취급되는 특수 고용 근로자 등이 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비정규직은 간접 고용 근로자나 기간제 근로자다.

저자는 비정규직 제도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제도에는 몇 가지 의의가 있다. 우선 비정규직이 있으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한 회사에서 일하던 노동력이 다른 회사로 이동하는 시간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이 노동을 적극적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된다.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근로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업자가 실업에서 탈출하여 취업할 기회가 늘어난다.

하지만 비정규직은 인간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 해고의 유인이 커지는 때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다. 일자리가 특히 필요한 불경기에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계약 갱신이 되지 않는 것은 해고다. 비정규직 제도는 이 해고가 적게 이루어져야 할 시기, 즉 불황기에 과도하게 발생하게끔 한다. 게다가 인력 조정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을 불공정하게 부담시킨다. 비정규직이 늘어난다는 것은 일자리를 구해 조금 일했다가, 다시 실업 상태에 빠졌다가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37P

비정규직은 균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사람이 정규직으로 채용될 확률은 매우 낮다. 책에 따르면, 비정규직으로 4년 일한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옮길 가능성은 약 9프로 미만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이 다른 좋은 일자리로 나아가는 가교가 되기보다는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정규직 근로자보다 불안정한 삶을 사는데도, 그 대신 돈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근로자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 불황일 때 해고가 될 확률은 훨씬 높고,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된다.

저자는 미국의 철학자 롤즈의 정의 원칙 중 주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과 차등 원칙을 기준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진단한다.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차등 원칙은 평등한 상태에서 이탈하여 그것이 모든 이들의 이익이 한도가 되는 한 불평등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불평등의 창출이나 증가를 받아들이는 근거다. 이를 위해 ① 예전보다 협동의 결과물이 많아지고, ② 협동의 산물을 받는 사람 중 가장 적게 받는 사람도 전보다 형편이 나아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비정규직 제도는 정의의 원칙을 만족하지 못한다. 기간제 근로자는 숙련 형성이나 안정성 양면에서 정규직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월급도 적다. 파견 노동자는 기술을 축적하기 쉽지 않다.

'원청은 늘 하청과 파견 업체를 갈아치울 수 있는 상태로 기업을 운영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청이나 파견 노동자들에게 기술이 축적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간착취자가 존재하는 산업사회는 생산성 발전이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파견업자나 사내 하도급업자가 산업 생산에 기여하는 바는 마름이 농업 생산에 기여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국민경제의 관점에서는 마름, 파견업자, 사내 하도급업자 등이 사라져야 생산성이 늘어난다.' -133P

저자는 정규직을 쉽게 해고당하게 만들어서 비정규직과 동등하게 격하시키자는 의견에 반대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안정을 생각할 수 없고 미래를 위한 계획도 구상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규직 과보호론에도 반대한다. 정규직은 과보호받으면서 과잉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지나치게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대신 저자는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비정규직의 고용을 허가하되 불법 파견을 막고 비정규직의 임금을 더 높일 것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1.3배는 되어야 한다. 임금을 1배로 하면 정규직보다 나은 것이 없는 직장이다. 그렇다고 1.5배로 하면 정규직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1.3배를 주자는 것이다.

또한 파견은 파견업체가 수요가 탄력적이고 급격히 변동하는 산업 부문에서 고용계약을 맺고 여러 사업장에 연결시켜줄 때, 파견업체가 독자적인 설비와 장비를 갖춘 때가 아니면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금지된 파견을 한 경우에는 노동자가 원청과 직접 고용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간주하여야 한다고 본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중세 유럽의 이야기를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돌아 많은 농노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속수무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자, 노동력도 사라졌다. 흑사병이 돌아 인구가 줄어든 장원에서, 어떤 영주들은 현금으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갖게 했다. 덕분에 농노는 농업 기술을 혁신하고 더 많은 수확을 가져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영주들은 반대 방향으로, 인구가 줄어들어서 수확이 예전만 못하게 되자 농노들을 더 혹독하게 다그쳤다. 영주들은 이전과 같은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시간 영지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다. 저자는 대한민국이 농노들을 착취했던 영주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정의라는 가치의 관점에서 노동 현실을 바라본 책이기에 굉장히 흥미롭다. 르포나 탐사취재처럼 비정규직의 현황을 깊게 파고든 책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이나 노동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치밀한 논증에 감탄하며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이한 지음, 미지북스(2017)


태그:#근로, #노동, #비정규, #정규직,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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