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올해는 겨울이 빠르고 첫눈도 빠르다. 가을도 빨랐다. 8월 둘째 주가 되자 놀랍도록 쾌청한 바람이 불어 더위에 고통 받던 사람들은 아름답게 웃었다. SNS엔 새파란 하늘과 '기분 좋아 하트 뿅뿅' 어쩌고 하는 포스팅들이 경쟁하듯 올라왔다. 불과 몇 주 전엔 대통령이 유기견 '토리'를 입양한 기사가 도배되다시피 했다. 또한 한겨레신문사는 동물복지에 앞장 설 전문매체 '애니멀 피플'을 창간했다. 근사한 시점이었다, 내 책이 나오기에.

[내일도 가을이야] 표지에 실린 가을이의 궁둥이와 실제 궁둥이
 [내일도 가을이야] 표지에 실린 가을이의 궁둥이와 실제 궁둥이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보호소에서 가을이를 입양하고 좌충우돌 살아온 이야기가 드디어 책으로 나온 것이다. <유기견 입양기>를 오마이뉴스에 약 3년간(2013년 3월 ~ 2016년 2월) 연재했는데 이후 출간까지 무려 1년여가 걸렸다.

개를 입양해서 살고 있다는 거 외엔 특별할 것 없는 글이라 여러 편집자들이 출판을 망설였다. 매우 매우 훌륭한 주제이지만 '일반 사람'의 '동물 이야기'가 판매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중 1인 출판사 헤르츠나인에서 가을이의 사연은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이야기'라며 손을 내밀었다.

계약만 하면 금빛 융단이 펼쳐질 거라 상상했지만 세상 순진한 생각이었다. 우선 원고를 마무리 지어야 했고, 사진을 추가로 찍어야 했고, 책의 디자인과 제목과 카피를 구상해야 했다. 물론 내 몫이 아닌 분야도 있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나.

책은 사서 읽을 줄이나 알았지 만들어지는 과정은 개미만큼도 몰랐으니 참으로 어려웠다. 무엇보다, 직원도 사장도 한 명인 출판사의 사정이 안타까웠다. 그분은 가을이의 책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선 그래야 한다고 했다. 언제나 눈 밑이 퀭했고 새벽 3-4시에도 업무용 문자가 왔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뜻이 안 맞거나 탐탁지 않은 상황을 전달하기도 불편했고 출간 무경험자이기에 명확한 주장을 펼치지도 못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가을이였다. 부디 가을이가 건강할 때 책이 나와 줘야 의미가 있을 텐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가을이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아, 정말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

난데없이 싸인을 만들어야 해서 그냥 가을이와 스밀라를 그렸다
 난데없이 싸인을 만들어야 해서 그냥 가을이와 스밀라를 그렸다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아무튼 쾌적한 8월 말에 분홍색 궁둥이를 어필하는 가을이가 세상에 나왔고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작 '지인 외에는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무수히 들은 터라 맷집은 두둑했다. 다행히 가을이의 건강도 괜찮았다. 스밀라도 물론. 이 아이들은 책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출간 후 나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동물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관련 책을 읽다보니 인류의 뿌리, 식물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나아가 지구의 기원과 우주의 비밀도 알고 싶어졌다. 지능에 한계가 있어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목숨 있는 모두가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가능한 육식을 멀리하는 식습관을 갖게 됐다. 알고보니 인간은 굳이 누구를 죽여서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환경적, 윤리적으로도 옳은 행위가 아니었다. 다 떠나서, 지긋지긋한 만성 두통이 경미해졌으니 나는 누가 목을 졸라도 이 신념을 유지할 것이다.

채식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국내에서 5회를 맞이한 채식 축제에도 다녀왔다. 콩고기를 주문했고 두(豆)개장 요리법을 배웠다. 동물성 식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카페나 베이커리도 찾아보니 얼마든지 있었다.

또 대형서점이 아닌 동네 작은 책방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반려동물이 머무는 곳을 발견할 땐 더욱 반가웠다. 사슴책방, 헬로인디북스, 북스피리언스 등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동물책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서점, 동반북스도 알게 됐다. 이곳에서 조촐하게나마 독자와의 대화 자리를 가졌고, 동물에 대한 허심탄회한 마음을 나눈 사장님과는 개봉사를 함께하기에 이른다!

책 표지에 가을이의 뒤태를 사랑스럽게 그려준 박정영 작가(가을이가 있던 보호소에서 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와 어웨어(Aware) 이형주 대표의 강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동물 전문 출판사 '책공장 더불어'에서 나온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를 기반으로 사람이 먹느라, 입느라, 노느라 괴롭힘 당하는 동물의 실태를 알고 앞으로 어떻게 공생해야 하는지 모색하는 자리였다.

우리 구에 새로 생긴 '캣맘+캣대디' 모임에도 참여했다. 구내 관공서에 길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하여 고양이와의 평화로운 공생에 모범 선발대가 된 강동구의 사례를 들으며 각 지역구에서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어울려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의 소박한 글이 세상에 아주 작은 변화라도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실상은 나 스스로가 움직이는 계기가 되었다. 가을이라는 생명체를 입양하고 내가 살았으며, 책이 나왔고, 내가 변하게 된 거다. 와!

애교부리는 모글리와 어색한 가을이
 애교부리는 모글리와 어색한 가을이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새로운 길친구들도 생겼다. 길고양이들은 상황에 따라 영역을 바꾸기도 한단다.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고양이, 조르바는 옆 동네로 자리를 옮기고 모글리와 헤이즐 부부가 나타났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이 아이들은 우리 빌라 앞이 꿀밥자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다른 고양이들이 얼씬도 못하게 만들고 하늘땅별땅찜콩을 해버렸다.

아침마다 모글리(남편)는 우리집 현관문 앞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산책에 나서는 가을이와 내 앞에서 배를 보이며 갖은 애교를 부린다. 헤이즐(새댁)은 멀찍이서 바라보며 맛난 조반을 기다린다. 점심에도 저녁에도 가을과 나는 이 애들과 인사하느라 참 즐겁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책에 대한 진정성 있는 소감을 들을 때 가장 기쁜 게 사실이다.

'... 또한 이 글은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흔히 반려견을 키우는 분들의 오버 액션이나 요란스러움이 없다. 감정의 과잉도 없고, 반려동물에 대한 무작정의 연민도 없이, 담백하게 사실 그대로를 썼다. 슬픈 상황이 오면 되도 않는 유머를 던지며 피해간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쳐 가을이를 돌보고 있다. 그것을 작가는 잘 모른다. 그래서  감동했다.' - <내일도 가을이야> 리뷰 중.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을이 이야기를 읽고 이렇게 공감해주고 있었구나. 고맙고 또 고맙다. 가까운 사람들의 의외의 평을 듣기도 한다. 네가 가을이를 이 정도로 신경 쓰는 줄 몰랐다, 가을이가 이 정도로 아프고 힘든지 몰랐다 같은. 말은 그저 말로서 흘러갔는데 글이 비로소 그들에게 가 닿았나 보다. 이 또한 힘이 되는 공감이다.

또 반려동물에 대해 잘 몰랐다는 분들의 깨달음(?)도 듣는다.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을 동물에게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거만큼이나 마음을 많이 써야한다는 걸 알았다 같은. 인간은 인간에게만 큰 사랑과 큰 정성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도 가을이와 스밀라, 길친구들을 통해 배웠다.

끝으로, 내 책을 내 입으로 광고하는 이 자리에 만성신부전3기인 가을이의 식단을 알리고 싶다. 출간 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보호자로부터 문의를 많이 받았다. 가을이는 단백질, 칼슘, 칼륨, 인 섭취를 제한해야 하기에 처방사료와 처방약을 평생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에만 의존하기엔 맛은 물론이고 영양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검색해보면 신장에 좋다는 보조제와 식단의 정보들이 무수한데 그 중에서 내 아이의 상태에 맞는 적절한 것을 결정해야 한다. 나는 가을이에게 신선한 채소(고구마, 감자, 단호박, 당근), 과일(사과, 배)을 갈아 우엉물에 섞어 죽처럼 만든 후 찻숟가락으로 떠먹인다.

아마씨유와 꿀을 소량 넣기도 하고 항산화제와 관절보조제도 첨가한다. 너무 질지도 되지도 않게 만들려면 재료의 비율을 잘 고려해야 한다. 가을은 썩 내키진 않지만 이것을 먹고 나면 속도 편하고 변도 부드러워진다는 걸 알고 못이기는 척 한 그릇을 다 받아먹는다. 제 기능을 잃은 신장이지만 그나마라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우리의 관건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이 겨울을 잘 보내고, 내년 봄도 건강히 맞을 수 있기를 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내일도 가을이야 - 유기견 가을이.방랑묘 스밀라.비지구인 그녀의 애정행각 반려생활기

박혜림 지음, 헤르츠나인(2017)


태그:#박혜림, #내일도가을이야, #이봄가을, #유기견입양기, #스밀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