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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제1전시실)에서 열린 '리처드 해밀턴'전 기자간담회. 국립현대미술관 '양옥금' 학예연구사와 전시기획자 '제임스 링우드' 그리고 해밀턴 부인 '리타 도나'여사(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제1전시실)에서 열린 '리처드 해밀턴'전 기자간담회. 국립현대미술관 '양옥금' 학예연구사와 전시기획자 '제임스 링우드' 그리고 해밀턴 부인 '리타 도나'여사(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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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국립현대미술관은 '한영상호교류의 해(2017–18)'를 맞아 내년 1월 21일까지 리처드 해밀턴의 '연속적 강박전'을 연다. 회화, 드로잉 및 판화 총 90여 점을 선보인다. 아시아에서는 첫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 양옥금 학예연구사와 해밀턴 전문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제임스 링우드(James Lingwood)'의 공동기획이다.

이번 전을 위해 화가의 부인 '리타 도나(Rita Donagh)'도 내한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서울을 보고 놀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멋진 전시를 열어줘서 고맙다. 해밀턴 사후 1인 회고전으로 이렇게 큰 전시는 처음이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 남편이 이 전시를 봤다면 너무 좋아했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보통 팝아트 하면 미국의 '앤디 워홀'을 떠올리지만, 팝아트를 처음 창안한 작가는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이다. 1956년 그의 초기작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아래)를 보자. 방안에는 온통 대량소비시대의 물품들로 넘쳐난다. 지금 봐도 당시의 시대상을 잘 묘사한 획기적인 도상이다.

20세기는 영미권에서 산업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시기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1950년대 후반부터 세계는 소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토스터,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 유명스타가 등장하는 각종 광고가 쏟아져 나왔다. 이같은 소비사회의 대세 속에서 팝아트가 나왔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리처드 해밀턴 I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 콜라주 1956 ⓒ Richard Hamilton
 리처드 해밀턴 I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 콜라주 1956 ⓒ Richard Ha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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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미술평론가는 "팝아트로 인해 상품은 미술작품 속 주인공이 됐다. 또 스타나 유명인 같은 상품적 가치를 가진 인물이 화면 속에 등장하게 됐다. '위인'이 아니라 스타나 유명인에게 더 큰 상품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다. 팝아트는 이런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발견해 작품에 '동시대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평했다.

1960년대는 사회격변기로 유럽의 민주주의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도 활성화됐다. 관객의 문화욕구도 높아졌다. 팝아트가 대중의 일상적 삶을 예술의 주제로 삼은 것은 시대적 대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술이 과거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과도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다. 이는 문화가 이전보다 더 민주화됐다는 증거다.

처음부터 그의 작품이 대중의 호감을 받은 건 아니다.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그의 예술관은 20세기 후반 폭발하는 다층적인 시각매트릭스를 기반에 두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트렌드를 관찰하고 탐구했다. 이런 변화로 작가는 이제 회화(painting)가 미술을 주도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회화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리처드 해밀턴 I '용의자특별인도(Unorthodox rendition)' 76×145cm 2009-2010. 해밀턴의 반전평화사상이 보인다
 리처드 해밀턴 I '용의자특별인도(Unorthodox rendition)' 76×145cm 2009-2010. 해밀턴의 반전평화사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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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8개 섹션으로 나뉜다. 시대별이 아니라 시리즈로 묶어 전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스펙트럼이 넓다. 그의 예술세계는 한 면만 보면 곡해하기 쉽다. 그의 작품에는 일상적인 것과 함께 반전사상이나 사회비판적인 관점도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195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팝아트 개념을 아주 명쾌하게 정의했다. 그는 "팝아트란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소모적이고, 저비용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젊고, 섹시하고, 재치 있고, 교묘하며, 매력적인 대사업"이라면서 "난 가장 순수한 예술로서 팝아트를 시도한다. 내가 하는 일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팝아트 개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작가는 바로 미국의 '앤디 워홀'이다. 워홀은 해밀턴의 말대로 작업실이 '팩토리'였다. 또 작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실크스크린 방식을 취했다. 마케팅전략도 도입했다. 그는 예술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깨고 대중적 문화를 폭넓게 수용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해밀턴 부인인 '리타 도나'여사와 마리 관장과 미술관계자와 대화하는 모습
 해밀턴 부인인 '리타 도나'여사와 마리 관장과 미술관계자와 대화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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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유 욕구는 시민들이 구매력을 갖출수록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리처드 해밀턴은 "모든 예술은 동등하며 가치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은 공공재"라며 대중이 미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해밀턴은 이렇게 현대미술을 시대정신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예술에 대한 일반인들이 태도에 변화를 줬다.

그에게 영감을 준 '보들레르'

이번 전시의 영국 측 기획자 제임스 링우드 말에 의하면, 해밀턴은 현대 시의 창시자인 보들레르(1821~1867)의 영향을 받았다. 알다시피 보들레르는 시인이면서 미술평론가였다. 해밀턴은 그가 쓴 미술평론집 <현대생활의 화가>를 읽다가 모더니즘 개념이 머리에 떠올랐고, 이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미술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해밀턴이 영국에서 팝아트를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팝아트라는 예술이 꽃피운 곳은 미국이었다. 왜냐하면 1950년대 중반의 영국 경제수준은 미국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당시 경제적으로 최전성기였고, '소비가 최고의 미덕'이 되는 사회였다.

리처드 해밀턴 I '자화상 12.7.80b' 시버크럼 물감(Cibachrome on canvas) 75×75cm 1990. 4종 세트화 중 하나 가운데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리처드 해밀턴 I '자화상 12.7.80b' 시버크럼 물감(Cibachrome on canvas) 75×75cm 1990. 4종 세트화 중 하나 가운데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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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런던 태생인 해밀턴은 보수적인 영국미술계의 대변혁을 가져온 개척자였다. 1950년대 후반기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을 구별하는 틀을 깼다. 그는 소비지상주의 사회를 풍자하며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을 뒤엎는 다다이즘적 경향도 보였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영국 대표로 참가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제부터 '자화상' 시리즈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해 보자. 그의 자화상은 기존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먼저 자신의 얼굴을 폴라로이드로 찍은 다음 그 위에 아크릴그림으로 지워나가는 방식이다. 존재의 가시적 유무를 뛰어넘는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기술 스킬도 익혀 1970년대 자화상을 1990년대 디지털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의 자화상은 그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넋 놓고 하루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물질의 풍요와 함께 정신적 결핍을 그대로 노출했기에, 그의 자화상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과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리처드 해밀턴 I '그녀(She)' I 유화 Oil paint, cellulose nitrate paint, paper and plastic on wood 122×81cm 1958-61와 '꽃(Trichromatic flower-piece)' 42.4×33cm 1973-74[아래]
 리처드 해밀턴 I '그녀(She)' I 유화 Oil paint, cellulose nitrate paint, paper and plastic on wood 122×81cm 1958-61와 '꽃(Trichromatic flower-piece)' 42.4×33cm 1973-74[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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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흔한 주제인 '꽃'과 '여인상'을 그가 팝아트로 어떻게 그렸는지 보자. 꽃 그림은 예쁜 색채로 표현했지만 해골과 똥(?)이 들어간다는 점이 다르다. 예쁜 꽃이 피어나려면 좋은 거름(?)이 필요하다는 은유인가. 작가는 이렇게 사물을 미화하지 않고 과감하게 엽기적 방식과 키치적 요소를 도입해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누드여인상을 그린 '그녀'를 보자. 초현실주의자 '마그리트'처럼 물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붙이는 '데페이즈망' 방식을 썼다. 여기서 획기적인 건 일상품마저도 의인화해 미인처럼 그렸다는 점이다. 이런 미인도는 이전에 봐왔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름답다.

리처드 해밀턴 I '토스터기(Toaster, 1966-7) & (Toaster deluxe, 2008)' 크롬 철 등(Chromed steel and Perspex on colour photograph) 81×81cm 1966-7 & 2006-8
 리처드 해밀턴 I '토스터기(Toaster, 1966-7) & (Toaster deluxe, 2008)' 크롬 철 등(Chromed steel and Perspex on colour photograph) 81×81cm 1966-7 & 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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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토스터'를 보자. 1960년대 독일 브라운사의 디자인 수장이었던 디터 람스(Dieter Rams)가 개발한 전자제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영국인에게 토스터는 우리의 전기밥솥 같은 것이다. 이렇게 친근한 가전제품이 과거에는 미적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팝아트적 관점으로 보면 이것도 멋진 작품이 될 수 있다. 이걸 미술용어로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런 물건도, 작가의 손길이 닿으면 미술작품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사회비판적 작품들

리처드 해밀턴 I '스윈징 런던(Swingeing London 폭거의 도시 런던)' 시리즈. 아크릴물감 등 Acrylic paint, screen print, paper, aluminium and metalised acetate on canvas, 67×85cm 1968-69. 미술관은 이 시리즈를 회화, 드로잉, 판화, 사진, 필름 등으로 변형해 전시한다.
 리처드 해밀턴 I '스윈징 런던(Swingeing London 폭거의 도시 런던)' 시리즈. 아크릴물감 등 Acrylic paint, screen print, paper, aluminium and metalised acetate on canvas, 67×85cm 1968-69. 미술관은 이 시리즈를 회화, 드로잉, 판화, 사진, 필름 등으로 변형해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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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정서를 담은 1968년 작품을 보자. 그해 유럽은 68혁명이 일어난 대격변기였다. 그는 세계적인 그룹인 '비틀스'의 앨범표지를 디자인해 줄 정도로 그들과 친했다. 또 그들의 반전운동에도 동조했다. 미국에서는 그해 밥 딜런이 주축이 되는 히피운동이 극에 달했다. '스윈징 런던'은 이런 문화운동과 대중음악이 상승하는 시기에 맞춰 나왔다.

여기 민트색 양복을 입은 사람은 로큰롤의 대부인 믹 재거(Mick Jagger), 그 옆 사람은 해밀턴의 아트 딜러였던 로버트 프레이저다. 이들은 약물복용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카메라를 피해 머리를 웅크린 채 얼굴을 가리고 있다. 작가는 이런 천재적 대중예술가를 마약 문제로 경찰이 체포한다는 게 시대정신에 안 맞다고 본 것 같다.

물론 네덜란드에서는 지금 이런 마약 문제로 더 이상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로는 큰 죄가 될 수 있었으리라. 하여간 앤디 워홀도 인종차별을 고발한 작품이 있지만 이 작품은 사회의 비판자요, 관찰자로서 해밀턴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리처드 해밀턴 I '시민 습작(The citizen)' Dye transfer, 48.8×48.8cm 1985
 리처드 해밀턴 I '시민 습작(The citizen)' Dye transfer, 48.8×48.8cm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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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민습작'도 '스윈징 런던'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영국의 어두운 현대사의 이면을 들춰볼 수 있기에 영국을 난처하게 할 수 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교도소에 갇힌 북아일랜드의 독립투사인 보비 샌즈다. 착시지만 그가 성스러운 예수처럼 보이는 것은 참으로 괴이하고 기막히다.

이 죄수는 터무니없게도 감옥에서 죄수복 착의를 거부하는 투쟁과 몸 씻기를 거부하는 투쟁을 동시에 벌였다. 그런 결과가 낳은 모습이 흉측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력한 카리스마 발휘하다니. 역설적이다. 이런 도발적 주제는 미국 팝아트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리처드 해밀턴 I '일곱 개의 방_부엌' 시버크럼 물감(Cibachrome on canvas) 122×122 cm 1994-1995
 리처드 해밀턴 I '일곱 개의 방_부엌' 시버크럼 물감(Cibachrome on canvas) 122×122 cm 199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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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공간을 그만의 팝아트로 다르게 해석한 작품을 보자. 제목은 '일곱 개의 방'이고, 부제는 '시대착오적 세트(a set of anachronisms)'다. 시대착오적이란 공간해석이 시대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바로 공간의 깊이는 주는 방식, 이걸 '심연연출법(mise en abyme)'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공간해석은 초보 단계이긴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가상현실'의 한 갈래가 아닌가 싶다. 공간의 실재와 환영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거기에 역동성과 입체성을 넣어주는 것이다. 이걸 '장소참조적 회화'라고 하던가. 그가 개념미술가인 건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결론으로 2011년 해밀턴 작가 타계 이후 런던 테이트미술관에서 회고전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이번 과천전을 통해 그가 20세기 현대사회를 어떻게 보고, 현대미술을 어떤 관점에서 탐구해왔는지를 한 눈에 볼 기회가 왔다.

덧붙이는 글 | [국립현대미술관홈페이지] http://www.mmca.go.kr [전시해설] 전시기간 중 매일 오후 2시
[관련 프로그램] 큐레이터 토크 양옥금 학예연구사와 함께 2017.11.29 오후1-2시 제1전시실



태그:#리처드 해밀턴, #팝아트, #리타 도나, #제임스 링우드, #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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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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