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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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자라지도 못한 날개가 꺾일만한 일을 삼가라."

보수적인 업계에 몸담기로 결심하고 반년 넘는 기간 동안 한 기관에서 연수를 받은 나는 종종 지도 교관들에게 이와 같은 당부를 듣는다. 업계 특성상 많은 부조리와 마주하고 법보다 그들만의 규칙과 소문이 빠른 곳에서 입바른 소리나 태도로 불이익을 자처하지 말라는 염려의 말이다.

이러한 조언은 이내 "처음 몇 년은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로 살다가 말이 먹힐 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때 가서 문제를 바꾸라"는 레퍼토리로 이어지곤 한다. 군대처럼 계급 간 서열이 뚜렷한 집단에 속해 있을 때 자주 들을 법한 조언으로 제법 도움이 되는 경우가 적지만은 않다.

이런 조언이 대개 그렇듯 '터 얻고 상황을 바꾸라'는 말은 늘 옳은 말도 아니지만 항상 틀린 말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현명한 대처법이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비겁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조언이 거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조언을 받는 당사자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의 여덟 배를 받는다고?

 미국 테니스협회의 상금차별에 분개한 여성선수들은 여성 테니스협회를 창설하고 단 돈 1달러에 투어대회를 계약한다.

미국 테니스협회의 상금차별에 분개한 여성선수들은 여성 테니스협회를 창설하고 단 돈 1달러에 투어대회를 계약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의 주인공 빌리 진 킹(엠마 스톤 분)도 이러한 조언을 마음 깊이 새겼다. 빌리 진 킹은 여자 선수 중에서는 맞수를 찾을 수 없는, 당대 최고의 테니스 스타다. 그의 오늘은 어린 시절부터 최고가 돼야 한다는 목표 아래 자신을 담금질 한 결과물이다. 빌리 진 킹은 영화에서 묘한 관계를 갖는 마릴린(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에게 자신이 그토록 최고가 되려 하는 이유를 털어놓는다. 요약하자면, 어디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받기 위해서였다.

지기 싫어하는 강한 성격 탓일까. 최고의 테니스 스타의 앞날도 편치만은 않았다. 미국 테니스협회가 주관하는 대회의 상금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여덟 배나 많은 돈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리는 곧장 협회 간부를 찾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남자와 여자 선수 경기에 비슷한 관중이 들지 않냐"며 거세게 항의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정신력에서 여자는 남자의 상대가 못 된다" "남자 경기가 더 박진감 넘치지 않느냐"는 답뿐이었다. 화가 난 빌리는 동료를 모아 여자 테니스협회를 창설하고 직접 대회를 열어 협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나선다.

이후 영화는 빌리가 '스포츠의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고정관념에 어떻게 맞섰는지를 그려낸다. 경기복에 흰색 이외의 색깔을 넣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보수적인 협회에 대항해 빌리는 저항을 이어간다. 마침 미국 사회를 휩쓸던 여성주의 운동도 빌리와 동료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미국 테니스협회는 남자 선수에 준하는 상금을 요구하는 여자 선수들의 요구를 남자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이를 무력화시키려 한다.

그러던 중 이를 지켜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은퇴 선수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 분)였다. 바비 릭스는 남성 우월주의자를 자처하며 빌리에게 거금이 걸린 이벤트 경기를 제안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경기는 빌리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엄청난 관중 앞에서 빌리가 바비를 꺾고 세기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차별과 편견을 향해 날리는 한 방 스매싱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라라랜드>로 오스카의 주인이 된 엠마 스톤은 <미스 리틀 선샤인>의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의 신작 출연을 전격 결정지었다. 이 영화를 위해 그녀는 혹독한 테니스 훈련을 소화하는 건 물론 체형까지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라라랜드>로 오스카의 주인이 된 엠마 스톤은 <미스 리틀 선샤인>의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의 신작 출연을 전격 결정지었다. 이 영화를 위해 그녀는 혹독한 테니스 훈련을 소화하는 건 물론 체형까지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하지만 영화의 뒷맛은 왠지 씁쓸하다. 빌리라는 걸출한 개인의 힘으로 협회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개인적 역량으로 바비와의 대결에 승리하는 건 다수 민중의 힘에 의한 혁명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웅기와 다르지 않다. 더불어 영웅기를 걷어내고 난 자리엔 여전히 극복해야 할 차별과 편견이 그대로 쌓여있다는 사실 역시 명확히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빌리 스스로 언급하는 것처럼, 은퇴한 남자선수와 현역 여자선수가 일회적 대결을 펼친다고 해서 성별 간 우열 논리를 반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자유 경쟁의 프로스포츠 경기 특성상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주장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여자보다 실력이 월등한 남자 시니어 선수가 여자 선수들보다 돈을 덜 받는 게 불합리하다는 바비의 주장이나, 남자보다 훨씬 적은 상금으로도 여자 선수를 모을 수 있다는 대회 주최 측의 논리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빌리는 뛰어난 실력과 스타성에도 충분한 값이 매겨지지 않는 상황에 저항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하지만 빌리 진 킹이 아닌 다른 어떤 여성 선수도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마거릿 커트(제시카 맥나미 분)의 패배가 여성 전체의 패배가 아니듯 빌리의 승리 역시 개인의 영광에 그친다. 드물게 강한 날개를 가진 빌리는 자신을 옭아맨 족쇄를 끊고 높이 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어느 여성 선수가 그같이 할 수 있었는가.

여전히 소수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화는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엠마 스톤 분)과 헤어디자이너 마릴린 바넷(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의 관계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

영화는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엠마 스톤 분)과 헤어디자이너 마릴린 바넷(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의 관계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혁명과 진보는 영웅 한 명의 활약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민중의 한 걸음이 모여 변혁을 이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진정으로 가리키고 있는 건 남녀의 성 대결을 넘어선 듯하다. 극중에서는 빌리와 마릴린의 '워맨스'(여성들의 로맨스-편집자 주)가 그려지지만 이들은 최고의 순간에도 자신들의 관계를 세상에 공개하지 못한다. 이는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을 당혹하게 한다.

진정으로 존중받고 싶었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있고 싶었던 빌리에게 중요한 건 가짜 남성 우월주의자와의 거짓된 이벤트 경기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혼자 힘으로는 끝내 바꿀 수 없었던 문제가 아니었을까. 아무도 없는 라커룸에서 홀로 눈물을 쏟게 했던 그 지독한 편견과 차별 말이다.

빌리에게, 최고가 된 뒤에나 문제를 바꾸라는 말은 반쪽짜리 조언일 뿐이다. 아무리 최고가 된들 시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개개인이 일상에서 발휘하는 힘이다. 성차별은 물론, 소수자를 향한 차별까지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힘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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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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