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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문학하는 사람치고 통과의례로 한 번쯤 도전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할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면 대체로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를 시를 읽으며 심사위원들은 어려운 시만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에 대해 시인들은 독자의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거나 깊이 생각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시인의 의도, 발상을 따라잡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해 버리면 무식한 독자는 할 말이 없다.

나태주 산문집 <혼자서도 꽃인 너에게>
 나태주 산문집 <혼자서도 꽃인 너에게>
ⓒ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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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어려운 시보다는 한 번 읽어도 마음에 와 닿아서 한 번만 읽을 수 없는 시를 찾는 이라면 <혼자서도 꽃인 너에게>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풀꽃 시인'으로 잘 알려진 나태주 시인이 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떠난 후 전국을 돌며 문학 강연 중에 만난 사람들이 보낸 편지와 글, 자신의 시들을 엮은 산문집이다.

저자는 책머리와 에필로그에서 '혜리'라는 편집자를 염두에 두고 엮었음을 밝히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작품을 낼 때마다 편집을 담당했던 '혜리'를 '혼자서도 꽃으로 피어날 줄 아는' 존재라고 말한다. 혜리는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독자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제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 해도 평생 고작해야 한두 편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들은 시를 써서 일반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꿀 정도로 시문학사에 굵은 자국을 남긴 이들이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 김소월은 진달래꽃, 박목월은 나그네, 윤동주는 별을 헤며 서시를 남겼다. 이육사는 광야에서 외쳤고, 천상병은 귀천, 정지용은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김춘수는 꽃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안겼다.

이름만 들어도 시인의 작품이 떠오르는 이들을 나태주 시인은 '죽어도 죽지 않은 목숨'이라고 한다.

"평생을 두고 시를 쓰겠다는 시인들은 자기가 어떤 명사 하나를 가져다가 일반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꾸어 다시 민족의 언어로 돌려보냈는지 자신이 작품을 돌아보고 살펴볼 일이다." -144쪽

이 말은 시인 스스로 다짐하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평생을 두고 한 가지 주제나 소재만을 갖고 질 높은 시를 내놓으려고 애 썼으니 하는 말이다. 혹자는 나태주 시인을 어쩌다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그의 시에 대한 치열함과 깊은 통찰은 그 유명세가 단순히 광화문 현판에 시가 걸려서만이 아님을 알게 한다.

시인은 그냥 시인이고 싶었다고 한다. 막막한 그리움이 한사코 자신을 시인으로 내몰았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한 시인이기보다는 유용한 시인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은 문학의 실용성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유용한 시인이라는 그의 바람은 순수문학을 추구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력을 떠올린다면 조금 특이하다. 달리 생각해 보면 삶에 활력을 주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삶이 있는 시를 써왔다는 점에서 당연한 데도 말이다.

"유용한 시, 유용한 시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나에게 필요한 시이고 나에게 필요한 시인이고 작으나마 남들한테도 도움이 되는 시, 도움이 되는 시를 말한다. 사람들이 나의 시를 읽을 때 가슴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드디어 사는 일들까지 고요해지고 향기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위로가 있고 응원이 있고 축복이 있는 시를 말한다." -104쪽

어쩌면 시인은 독자들의 마음 바다에 살아남는 국민시인이 되기를 바라며 시를 써 왔지만, 스스로 조그만 시인이라 칭할 정도로 항상 부족하다 느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교직 말년인 2007년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다음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 생각이 달라졌고, 무엇보다 시가 달라졌다고 한다.

"시에 들어갔던 힘이 빠져 버렸다. 의도함이 없이 그냥 써지는 대로 쓴다. 주로 입말체로 쓴다. 그것도 짧은 형식으로 쓴다. 그러다 보니 헐거운 나의 시가 더욱 헐거워졌다. 평론가들이며 시인들은 나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다. 뜯어보아야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겉이나 속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186쪽

죽을 고비를 넘긴 시인은 자신의 시가 헐거워졌고, 평론가들이나 시인들은 시인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라고 토로한다. 재미있는 일은 그런 시를 독자들은 좋아하니 세상 이치란 모를 일이다.

평론가들은 나태주 시에서 심오한 메타포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할 수 있다. 산문이나 수필과 다른 게 뭐고, 불의에 항거하는 시대정신은 없고, 사랑 타령이나 하는 시와 다를 바 뭐냐고 빈정거릴 수 있다. 11월이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11월'만 해도 그렇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에서 함축된 시어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는 말처럼 11월을 더 잘 표현한 말을 찾으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태주의 시가 조금은 헐렁해도 그대로 받아주면 좋겠다.

"힘들 날에도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혜리, 즉 독자들에게 돌리고, 독자 덕택에 "바람 부는 이 세상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고, 서로 찡그리며 사는 이 세상 혼자서도 웃음 짓는 사람이 된다"고 고백하는 헐렁한 시인 한 명쯤은 우리 곁에 두어도 좋지 않을까?

JTBC 손석희 앵커는 지진 소식을 전하며 "당신이 편안하다면 저도 잘 있습니다"라는 로마인들의 편지 머리글을 앵커 브리핑에서 썼다던데, 나태주 시인이 로마인들의 인사법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됐든 올 연말에는 나태주 시인의 헐렁한 시를 통해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해야겠다.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 36쪽. 안부



혼자서도 꽃인 너에게

나태주 지음, 푸른길(2017)


태그:#나태주, #풀꽃, #시인, #11월,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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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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