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26 11:38최종 업데이트 17.12.15 08:50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기자 말

2014년 11월 말 새벽, 잠결에 전화기의 진동을 느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겨우 눈을 떠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역시...


"여보세요."
"조사관님....아버지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 말 뒤로 들려오는 울음소리.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코 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었다. 부정하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불편한 순간이 다가왔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흐느낌을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힘을 내라는 말과 어머님 잘 위로해 드리라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례식 장소를 물어본 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순간,

"혹시 장례대행업체 아시는 곳 있으신가요? 아버지 장례식장도 아직 정해지지 못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알아보고 전화 줄게요. 알겠죠?"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가족의 죽음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자신을 추스르기도 벅찬 상황에서 망자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챙겨야 하는 것이 어디 쉬우랴. 곧바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장례대행업체를 정했다. 다시 조금 전 걸려왔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업체연락처를 알려준 뒤 연락이 오면 장례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들려오는 고맙다는 말.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시간에 나에게 부탁하는 상대방이 더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난 고작 전화 몇 통 돌렸을 뿐인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큰 슬픔과 상실감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조금만 더 견뎠으면 그렇게 바라던 결과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강철서신 그리고 정형근

1986년 12월 겨울.
그날은 구로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던 그가 노동운동을 하며 만난 아내와 함께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가 작성한 '선진적노동자의임무'라는 문건을 친구가 말없이 가져가 소위 '강철서신'이라는 이름의 팸플릿에 끼워넣어 세상에 뿌렸고,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주사파의 수괴'가 되어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게 된 것이다.

40여일 가까운 무자비한 고문을 견뎌내던 그 앞에 나타난 것은 정형근이었다. 굴복하라는 말을 거부하자 그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폭력이 쏟아졌다. 그의 폭력이 멈춘 것은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던 87년 1월이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불안신경증, 만성두통, 근육신경통 등을 앓고 있다고 했다.

조사 결과 그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불법감금, 고문이 확인되었다. 그는 위원회의 결정문을 가지고 곧바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에서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재심일 결정되던 날 수화기 너머로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고 심진구가 그린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주 그림 ⓒ 심진구


그랬던 그가, 죽었다.

장례식장에 들어가자 국화꽃 사이로 환하게 웃는 그의 사진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아내와 딸들이 서 있었다. 간단히 목례 후 고인에게 예를 갖춘 후 유족에게 인사를 나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됐는지, 왜 갑작스럽게 죽었는지 묻지 못했다.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떡이며, 전이며, 밥과 국을 가져다 주셨다. 그가 없는 식탁을 마주하니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그날의 식당이 떠올랐다.

2011년 법원에서 재심결정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산에서 그와 그의 아내를 만났다. 조사실에 만날 때와는 다르게 작업복 차림의 두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느라고 힘드셨죠? 식사 때도 되었으니 어디 가서 같이 식사해요. 아직 식사 전이시죠?"
"네."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봉고차가 하나 서 있었다.

"차에 물건이 실려 있어서 좀 불편하실 거예요."

문을 열자 봉고차 뒤에는 견과류가 가득 실려 있었다.

"애들이 이제 대학생인데 먹고 살려니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여기저기 차 끌고 다니면서 파는 거예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변명하듯 구구절절 풀어 놓는다. 가난은 왜 늘 변명이 되어야 하는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리고기 집에 도착했다. '느티나무'라는 간판의 식당 앞에 도착하자 뭘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고 왔다며 미안해했다.

"시골 출신이라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식당에 들어서며 걱정하는 부부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으며 오리백숙과 구이를 주문했다. 아내는 남편이 오리고기를 좋아해서 자주 들른다고 한다.

"원래는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더욱 챙겨 먹고 있어요. 건강에 좋다고 하고 소화도 잘 된다고 하니까.."
"부부가 같은 음식을 좋아하니 보기 좋네요."

아내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동그랗고 커다란 밝은 달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리고기 집에 도착했다. ⓒ pixabay


함께 식사하며 그동안의 어려웠던 이야기,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안기부에서 고문 받고 재판에 넘겨져 집행유예를 받고 나올 때만 해도 함께 고생했던 동지들이 고생했다며 위로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거예요. 내가 집행유예로 나온 것이 안기부와 무언가 모종의 합의를 하거나 동지의 이름을 팔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박쥐같은 처지가 되어 아무 곳도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럴 때마다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녔다. 안산에서 고문이나 통일 관련된 행사를 하는 곳이면 안 가본 것이 없었다.

"한양대 앞에서 고문 관련해서 강연하기 위해 갔었는데 경찰이 행사장을 원천봉쇄 했더라고요. 행사장으로 들어가려고 몸싸움을 하다가 결국 전투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엄청나게 맞았어요. 경찰들에게 맞다가 점점 의식을 잃어갔어요.

그런데 파란 하늘에 갑자기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거예요. 동그랗고 커다란 밝은 달. 왜 이런 대낮에 저렇게 큰 달이 떴지 하고 생각하며 자세히 쳐다보았더니 달덩이 같던 그게 제 딸아이 얼굴이더라구요. 아내가 그 자리에 와서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안고 경찰과 싸우고 있던 거예요. 그 환하고 밝았던 보름달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그와 마주한 마지막 식사였다.

"차라리 재심 결정이 나지 않았다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아내가 다가와 앉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가신 건지?"
"사실 주변에는 알리지 않았는데 남편이 몇 해 전부터 암을 앓고 있었어요. 병원치료와 민간요법을 병행했는데 아시다시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아서 변변한 치료는 엄두도 못 냈거든요.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왜 나에게 죄송해야 하는지 몰랐다. 미리 알렸던들 내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내가 죄송할 뿐이었다.

"남편은 여기도 저기도 서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너무 큰 고통을 느꼈나 봐요.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하소연 해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재심결정이 나자 긴장이 풀렸을까요. 갑자기 몸이 더 안 좋아지더라구요. 초조했었나 봐요. 생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차라리 재심결정이 나지 않았다면 더 버틸 수 있었을까요?"

그랬다. 순리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누구에게는 조급함과 초조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누구에게는 간절히 원하던 시간이 삶을 지탱하고 의지하게 되는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그때 오리고기 집에 자주 가셨던 것도...?"
"네, 암 환자들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하더라구요. 자주도 못 가고 한 달에 한두 번 갔는데 참 좋아하대요. 다른 건 못해줘도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오리고기 집에 가자고 할 때는 두 말 없이 따라갔어요."
"사모님도 좋아하시니 그래도 다행이었어요."

그러자 그녀는 나를 보며 웃어보였다.

"사실 저 같이 몸이 찬 사람들은 오리고기가 맞지 않는다네요. 오리고기 집에 다녀오면 꼭 배탈이 나더라구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려야 해요. 그래도 제가 음식을 피하기라도 하는 내색을 비추면 남편이 미안해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싫은 기색은 안 했어요. 먹으면 화장실을 들락거릴 걸 알면서도요."

그녀는 웃으며 오리고기를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날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왜 미안함은 늘 우리 같은 피해자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인 것인가? 먼저 간 자는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가난과 사회적 편견을 미안해하고, 남은 자는 왜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먼저 간 자에 대한 미안함을 떠안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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