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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600만 신도에 달했던 보천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며 인적 산실이었다. 어릴 적에 동학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를 따라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일제에 의해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심한 압박속에서도 그는 상해임정과 독립단체들에게 아낌없는 재정.인적 지원을 하였고, 짓밟힌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망해버린 나라를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는 항일투쟁과 민족독립,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불태운 시대의 영웅이었다.
 한때 600만 신도에 달했던 보천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며 인적 산실이었다. 어릴 적에 동학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를 따라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일제에 의해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심한 압박속에서도 그는 상해임정과 독립단체들에게 아낌없는 재정.인적 지원을 하였고, 짓밟힌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망해버린 나라를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는 항일투쟁과 민족독립,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불태운 시대의 영웅이었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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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간부들,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1923년 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내와 상해, 만주.북경.간도일대 등 각지에서 독립활동을 하는 100여 개의 단체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보천교'에서도 진정원 간부인 배홍길(배치문)과 김종철, 청년회 대표인 강홍렬(강일) 3명을 파견하여 국민대표회의에 참여시켰다. 

강홍렬(강일)은 3.1운동 때 영남지역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합천지역에 배포했고 합천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배홍길(배치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두 사람은 국민대표회의가 끝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들은 의열단에 입단하여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김원봉 단장에게 단원과 군자금모집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였습니다. 강홍렬(강일)과 배홍길(배치문)은 의열단과 보천교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습니다. 

단재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여사도 보천교 간부

의열단 활동을 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도 보천교 신도였습니다. 당시 선화사급의 여성간부였죠. 1924년 초에 독립단체 정의부가 결성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 여사가 보천교 북(北)방주인 한규숙을 중개 하였습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지난 15일 상생문화연구소 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보천교와 월곡 차경석 교주의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운동, 일제의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탄압정책 등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관련기사: http://omn.kr/okpk)

 1920~1940간의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을 검색해 보면 보천교(증산계열)의 항일기사 검색수가 타종교의 검색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이 나온다. 이것은 민족종교 보천교(증산계열)가 그 만큼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1920~1940간의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을 검색해 보면 보천교(증산계열)의 항일기사 검색수가 타종교의 검색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이 나온다. 이것은 민족종교 보천교(증산계열)가 그 만큼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 STB 상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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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보천교에 5만원 지원 받아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은 홍범도 이범석 장군과 함께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이 패전 후 군대를 증파하여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한인부락을 초토화시키는 등 만행을 일으키자 김좌진 장군은 부대를 전략상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수분하와 북만주-동녕현으로 이동하였다. 독립군도 무기와 식량보급 등의 문제로 차츰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1923년 초에 최측근 유정근을 밀사로 파견하여 보천교의 차월곡 교주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만주로 들어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는 서한을 보냈었죠. 이때 유정근은 일제에 붙잡혔으나 군자금은 만주로 보내졌었죠. 1924년 9월경에도 보천교로부터 5만원(2만원을 지원받았다는 별도의 보고자료도 있다)을 지원받아 김좌진 장군이 옛부하들을 소집하여 무력행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일제시대 1원이 순금 두 푼(750mg), 1925년 급여 40원이 쌀 2가마에 해당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당시 1원은 현재 약 4만원 정도로 볼 수 있으므로 5만원이면 현재 20억 정도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상생문화연구소 주최와 STB상생방송의 후원으로 15일 국회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보천교 학술대회는 1,2부의 주제발표와 3부 종합토론, 4부 특별 강연 등 총 4부에 걸쳐 근 8시간 동안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상생문화연구소 주최와 STB상생방송의 후원으로 15일 국회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보천교 학술대회는 1,2부의 주제발표와 3부 종합토론, 4부 특별 강연 등 총 4부에 걸쳐 근 8시간 동안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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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상해임정은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불교계의 거목 탄허스님의 선친인데,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거금 10여 만원을 숨기고 있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했고, 상해임시정부 간부 라용균 제헌의원은 보천교 간부 임규로부터 5만원의 자금을 건네받아 상해 임정에 전달하였다고 증언했다. 

"비밀리에 전달되는 독립자금의 특성상 보천교가 실제 얼마만큼의 재정지원을 임정에 했는가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본 검경 문서나 재판기록에 만주 독립군 요원이 국내에 침투하여 보천교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려다 체포된 사례를 보면 보천교가 해외독립운동에 재정후원을 한 정황은 많습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데이터베이스에도 1923년 충청도의 보천교 교도 박운업이 "보천교는 상해임정에 있는 힘을 다하여 지원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백범 김구 선생은 측근들에게 '우리가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읍에 보천교 본부가 있었거든요."(남창희 인하대학교 교수,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보천교와 이승만의 대미정체성 비교 연구)

 보천교 관련 공식자료와 연구문헌의 인물들과 상해 임시정부 중요인물들간의 네트워크 분석을 해 본 결과 상당히 밀도가 높은 관계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에 의하면 백범 김구도 정읍 보천교를 몇 번 이나 비밀리에 다녀갔다고 전하며,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에도 1923 충청도 보천교 교도 박운업이 "상해임정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
 보천교 관련 공식자료와 연구문헌의 인물들과 상해 임시정부 중요인물들간의 네트워크 분석을 해 본 결과 상당히 밀도가 높은 관계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에 의하면 백범 김구도 정읍 보천교를 몇 번 이나 비밀리에 다녀갔다고 전하며,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에도 1923 충청도 보천교 교도 박운업이 "상해임정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
ⓒ 남창희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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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석과 부친 차치구, 전봉준 장군과 마지막까지 생사를 함께 해

보천교 교주 월곡 차경석(1880~1936)이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에 적극적인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차치구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월곡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는 전봉준 장군과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차치구는 동학접주로 정읍에서 기두하여 혁명에 가담했는데, 동학군이 일군에게 공주전투와 우금치에서 전멸당하고 전봉준 장군이 피노리에 숨었을 때 같이 동행을 했습니다. 차경석의 아버지가 밀고를 당해서 참혹하게 분살형을 당했는데, 차경석의 장녀 차봉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차치구의 몸이 다 타버려서 차경석이 몰래 아버지의 두상만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존경하던 아버지를 따라 동학혁명에 종군했던 그가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였으니 그의 가슴속에 동학군을 무수히 살해한 일제와 썩어빠진 조선왕조 말의 관료, 정치체제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겠습니다." (안경전 상생문화연구소 이사장, 근.현대사에서 보천교의 위상과 역할)

차경석은 1899년 동학혁명때 살아 남은 사람들이 조직한 영학당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켰다가 관군에 잡혀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그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된 관료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차경석, 제주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 지원

일제는 1917년 4월 24일 차경석을 국권회복을 추구하고 배일사상을 가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여  '갑종 요시찰인물'로 분류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다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연일 등과 상의하여 1918년 9월 19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왜놈은 우리 조선을 병합하고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가혹하게 다루니 실로 왜놈은 우리 조선민족의 원수다. 이제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도내 거주의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인 상민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1918년 10월 6일 밤 김연일은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인근 각 면.이장들에게 '일본관리를 소벌(掃伐)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격문을 배포한 후 제주성내를 돌며 전선을 절단하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시켰습니다. 보천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법정사의 집단 항일운동은 국권상실 이후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근 600만에 달했다고 한다. 미 국무성 밀러 보고서에도 보천교 신도를 600만으로 적고 있다.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근 600만에 달했다고 한다. 미 국무성 밀러 보고서에도 보천교 신도를 600만으로 적고 있다.
ⓒ STB 상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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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친일언론들,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사이비종교로 매도

일제는 1915년 8월에 조선총독부령으로 포교규칙을 선포하여 독립활동에 적극적인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분류하여 건전하지 못한 반사회적집단, 미신집단, 사이비종교단체로 규정했다. 언론도 일본 총독부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및 사교와 같은 사회악의 존재로 취급하였다. 신문은 보천교를 비윤리적 반사회적 사상과 가르침을 펴는 미신, 사교집단으로 매도했다.

일제는 민족종교를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과 같은 정치적 변혁을 꾀한다고 판단해 민중과 격리시키고 통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이비종교단체라는 올가미를 씌워 종교가 아닌 일반결사단체로 취급하여 '보안법', '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적용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는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만들어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를 탄압하고 파괴시켜 나갔습니다. 1920년 청송군 일본경찰서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보천교 신도 3천여 명을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그 중 수십 명이 고문치사하였고, 700여 명을 기소하였고, 고등법원에서 최고 징역 2년 6개월을 받은 사람이 129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검거된 보천교 신도가 3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강영한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일제, 유사종교해산령 만들어 보천교와 민족종교 강제 해산시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일제는 한국의 민족성, 독립 등을 풍기는 모든 단체는 철저하게 해체시켰습니다. 그 정점은 1936년에 내린 '유사종교 해산령'입니다. 두 사람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고, 1원 이상의 금전수합 역시 금지되었습니다. 유사종교 해산령에 따라 각도 경찰국은 종교시설물을 폐쇄시키고, 종교지도자들을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1936년 6월 6일, 일경이 보천교 간부 24명을 연행하였고, 이틀 후에는 경찰 수십명이 밀어닥쳐 본소 성전의 제기와 일월상, 제단마저 전부 뜯어갔습니다. 6월 15일에는 보천교 건축물을 강제로 경매에 부쳤습니다."

 정읍에 있던 보천교 본소 중심건물인 십일전은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해체되어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건설재료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1938년 경 사진으로 십일전 기둥으로 조계사 대웅전을 짓는 모습이다.
 정읍에 있던 보천교 본소 중심건물인 십일전은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해체되어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건설재료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1938년 경 사진으로 십일전 기둥으로 조계사 대웅전을 짓는 모습이다.
ⓒ 조계종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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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차경석은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의 영웅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은 뜯겨져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 대웅전이 되었고, 본소 정문이었던 보화문은 옮겨져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

"월곡 차경석은 옷 두벌만 지니고 다니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항상 도망다녔습니다. 그는 상해 임정이나 독립단체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다 협조해 주었습니다. 차경석 셋째딸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 선생도 여러 차례 정읍을 비밀리에  찾아와 차교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보천교는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의 심장부였습니다. 정읍은 독립운동의 메카였습니다.

월곡 차경석 선생이 일제와 친일언론에 의해 친일파, 사이비교주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히고 잃어버린 보천교의 역사가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그를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의 영웅, 새 역사의 문을 연 위대한 지도자로 받들게 될 것입니다." (안경전 상생문화연구소 이사장, 근.현대사에서 보천교의 위상과 역할)

관련기사: 김좌진 장군 항일운동 자금지원한 '보천교'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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