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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여성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인이기보단 집단적으로 성별화된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남자 선배들은 나를 면전에 두고 '두들겨 맞은 여자애' 이야기를 꺼냈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개중에는 친히 '포항여고 그 계집애'라는 별명을 하사한 선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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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나는 모 대학의 신입생으로 이제 막 새로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안면을 튼 학과 선배들이 나에게 출신지를 물을 때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포항시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면 선배들, 특히 남자 선배들의 반응은 미리 연습이라도 해둔 것처럼 비슷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포항? 혹시 포항여고?" 하고 되물었고 그렇다고 하면 곧바로 낯선 이름 하나가 호출됐다. 바로 시인 박남철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중략)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박남철 <첫사랑> 부분 발췌

나보다 보통 일이 년, 많게는 삼사 년 앞서서 문학을 공부한 남자 선배들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나를 면전에 두고 '두들겨 맞은 여자애' 이야기를 꺼냈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개중에는 친히 '포항여고 그 계집애'라는 별명을 하사한 선배도 있었다.

남성이 여성을 폭행하는 장면을 묘사한 시에 무려 '첫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인 박남철 시인은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은 여러 교실과 강의실에서 꾸준하게 읽히고 있다고 한다. 이 시는 물론이고, 남자 선배들이 건넸던 웃기지 않는 농담이 아직도 내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하나의 촉매제에 불과했다. 십 대 시절부터 문학을 사랑했다고 자부하던 내가 품을 수밖에 없었던, 어찌 된 일인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강해졌던 의문과 석연찮음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세계문학을, 특히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중장년의, 혹은 노년의 백인 남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1세계, 백인, 남성이라는 조건의 조합은 작가군 안에서 막강한 실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머릿속에 나이든 백인 남자를 들여놓은 나는(그리고 그는 꽤 오랫동안 그 속에서 살았다) 백인 남자 작가의 생각은 모두 옳으며 나 또한 그들처럼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심지어 책을 읽기도 전에, 표지에 쓰인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그들을 존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인류의 영원한 정신적인 유산을 써낸 사람들인데. 그 이유만으로도 그들이 창조해낸, 역시 성별이 남성인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기란 쉬워도 너무 쉬운 일이었다.

이제 나는 삼십 대 중반의 여성이고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리베카 솔닛이 최근에 쓴 글은 어떤 작가를 추종씩이나 하던 십 대 시절를 상기시키고도 남았다. 솔닛은 더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작가로서, 오늘날 페미니즘에 관한,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글을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솔닛의 신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The mother of all questions)의 출간 소식을 기쁘게 기다린 사람이 비단 나 하나는 아닐 것이다.

 굳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성비나 고전 반열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의 성비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여성에 의해서, 여성을 위해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수가 얼마나 열세한지를.
 굳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성비나 고전 반열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의 성비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여성에 의해서, 여성을 위해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수가 얼마나 열세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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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죽음'을 맞았던 이들

이 책은 구성부터가 매우 간결하고 강렬해서 구성이 곧 메시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책의 전반부는 여성들이 사회로부터 강요당하는 침묵(1부, 침묵이 깨어지다)이, 후반부는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대상화하는 남성 중심적 서사에 관한 비판( 2부, 이야기를 깨트리다)이 주를 이룬다.

앞서 말한 남성이 쓰고, 남성이 이끌어 가는 이야기에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경험은 리베카 솔닛이 말한 여성에게 강요되는 침묵과 관련 있다. 굳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성비나 고전 반열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의 성비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여성에 의해서, 여성을 위해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수가 얼마나 열세한지를.

이는 여성들에게 근사한 이야깃거리가 없거나 여성 작가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여성들이 말하고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도록 침묵을 강요하고 그 억압의 체계가 상당히 견고한 탓에 발생한 비극이라고 봐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고, 그 결과 여성의 서사가 빈약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리베카 솔닛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침묵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살아 있는 죽음이나 다름없고 가끔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죽음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고무시키고 때로는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이라는 돌벽에 우리를 내던진다. 해방은 늘 부분적으로나마 이야기를 짓는 과정이다. 이야기를 깨뜨리고 침묵을 깨뜨리고 새 이야기를 짓는 과정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한다.'

여성이 내내 침묵에 길들여지는 동안 남성들은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남성 중심의 서사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나고 포자처럼 널리 퍼지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고 회자된다.

이 이야기들은 정말이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이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에서 언급한 헤밍웨이나 잭 케루악의 작품은 여전히 걸작으로 칭송받으며 읽히고 또 읽힌다. 역사상 가장 자유로웠던 인간은 아직도 <그리스인 조르바>이며 <롤리타>의 험버트는 '금단의 사랑 때문에 파멸한 남자 대표'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문제는 이 이야기들이 여성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며 여성성을 왜곡하고 훼손한다는 데 있다. 여성들은 들러리나 마찬가지로 어쩌다가 등장하지만 남성에 의해서 죽거나 폭력을 당한다. 이와 반대로 여성을 최후의 선으로 상정하며 예찬하고 숭배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또한 혐오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남성 중심의 서사를 밀어내고 여성의 이야기를 늘여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여성이 침묵을 깨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세상이 온통 남성의 이야기뿐인 것이 싫다면,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페미니즘에 입각한 비평이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비평은 페미니즘에 입각해서 작품을 해석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성이 비평의 주체라는 이유로 인해서 특수하고 부차적인 비평의 방법론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페미니즘 비평을 둘러싼 편견은 단순하다. 한마디로 '예술을 예술로 보지 못한다'는 것.

'포항 출신이라는 여자애에게 어떤 시에 등장하는 '포항여고 계집애' 농담을 했을 뿐인데 웃지 않고 정색하더라'. 이는 솔닛이 본문에서 언급한 스탠딩 코미디언 루이스 C.K.(최근 그의 성추행 가해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는 자신의 성추행 혐의를 인정, 사과하고 활동을 중단했다)가 '페미니스트들은 농담을 못 받아들인다'라고 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술에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마치 수사관처럼 여성혐오적인 요소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 페미니스트들의 관점, '제아무리 위대한 작품도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발각되면 일말의 가치도 없는 작품으로 폄훼하는' 세력이 공유하는 시각. 이것이 널리 알려진 페미니즘 비평에 관한 편견이다.

이러한 편견에 의해서 의욕이 꺾인 여성들은 싫어하는 작품을 접하고도 솔직한 감상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라, 비평의 주체가 '예술을 예술로 볼 줄 모른다'는 비아냥과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검열관'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페미니즘 비평은 검열이 아니라는 점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에 대해 '남자들이여, 검열은 권력이 예술 작품을 억압하는 걸 말하지 누가 그 작품을 싫어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랍니다'는 말로 일축했다. 진정으로 해로운 것은 페미니즘 비평이 아니라, 여성혐오가 가득한 작품들을 명작이라고 비호하며 여러 독자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읽히는 것이 아닐까?

 여자들은 <운수 좋은 날>을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운수 좋은 날>을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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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운수 좋은 날>을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헤밍웨이나 잭 케루악, 나보코프를 읽는 것은 어떻게 보면 위험할 수 있다. 솔닛이 위대한 비평가로 칭한 아서 C.단토의 주장대로 예술은 충분히 도덕적 피해를 끼칠 수 있으며 실제로 종종 그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전체주의의 관료들이 예술을 억압한 것은 예술에 잠재된 위험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몇 개월 전 한국에서도 문학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혐오적인 요소에 대한 비난이 트위터를 휩쓴 적이 있다. 가장 빈번하게 논의 대상에 오른 작품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이 작품의 주제는 '가난하지만 가족을 사랑하고 근면한 가장인 주인공에게 닥친 비극'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트위터의 수많은 여성들은 주인공 김첨지는 아내를 구타하는 가정폭력범이며 작가는 결말부에 여성을 죽임으로써 그의 잘못을 두둔하고 주인공을 연민한다고 평했다. 더 나아가서 <운수 좋은 날>은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상대로 가르칠 만한 작품이 아니며 교과서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트위터 내 여성들에게 지적당한 작품으로 김동인의 <감자>, 이상의 <날개> 등이 있다. 또 일부 여성들은 지금 교과서에 수록된, 일제강점기에 남성작가들이 쓴 소설 대부분이 짙은 여성혐오를 깔고 있으며 이제는 교과서에 수록되는 작품들도 바뀌어야 한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드디어 여성들이 싫은 작품을 싫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들이 더는 침묵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제 일련의 남성중심적인 서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고전들은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을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미덕이 많은 작품'이라고 두둔하면서 생명력을 부여하기엔,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작품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창비·오마이뉴스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공모 기사입니다. (공모 관련 링크 : https://goo.gl/9xo4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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