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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이제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고 그래야지. 그래야 연애도 하고." 할머니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너도 이제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고 그래야지. 그래야 연애도 하고." 할머니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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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걸그룹 F(x)의 멤버인 엠버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계정에 "내 가슴은 어디에?(악플에 답하며) Where is my chest?(Responding to Hate Comments)"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영상 속 그녀는 "엠버의 가슴은 어디 있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친구와 함께 '자신의 가슴'을 찾아 나선다.

엠버는 과거 SNS에 "'너는 여자처럼 언제 할 거야?' 저는 여자예요. 여자는 원하는 스타일로 사는 거예요. 이런 거(질문) 좀 그만합시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나도 같은 질문을 들은 적 있다. 소위 '남자처럼' 꾸미고 다녀서냐고? 아니, 뚱뚱해서다.

겨울이었다. 막 스무 살이 된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마지막 휴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때마침 설이라 할머니댁에 가족 모두가 모였다. 당연히 '여자들'은 한데 모여 송편을 빚고, 남자들은 텔레비전 앞에 누워있었다. 문득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서희는 아주 예뻐졌더라. 어릴 때는 사내애 같던 게."

나는 서희 언니가 누군지 알았다. 아니, 몰랐다. 그녀는 내게 어떤 실체가 아니었다. 늘 친척들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무용한다는 애, 아주 참하다는 애. 그 말들로 만들어낸 어떤 뭉뚱그린 몸이, 내게는 김서희였다.

그녀가 어떤 이들의 눈에 '사내아이' 같았던 시절은 아마 10살 무렵까지일 것이다. 서희 언니는 이제 스물넷이다. 한차례 대화가 지나가고, 송편만 빚던 할머니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너도 이제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고 그래야지. 그래야 연애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중학교 때 숏컷에 체육복 바지만 입고 다니던 과거가 있다곤 하나, 지금의 나는 말하자면 충분히 '여자애'처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할머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았을 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살 빼야지, 살 빼서 '여자'가 되어야지.

뚱뚱한 여성은 뚱뚱한 남성과 다르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여성'임을 의심받는다. 하지만 남성은 어떤가. 뚱뚱한 남성에게 "'남자니까' 살 좀 빼"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너무 뚱뚱하면 남자로 안 느껴져요"라는 표현은 '메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등장했다. 그 전에는 어땠는가. 남자에게 뚱뚱함은 대개 '인격'이고, '푸근함'으로 여겨졌다.

비단 성적 매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뚱뚱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남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말하는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 여자의 특성, 남자의 특성에서 그들은 충분히 '남성'의 카테고리 안에 속할 수 있다. 뚱뚱한 남자들은 남성로서의 모든 특성을 인정받는다. 이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할 것은 아마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남성들 본인일 것이다.

뚱뚱하지만 사람 좋고, 호탕하고, 돈도 잘 쓰는 친구가 "걘 남성으로서는 좀 그렇지"라는 평가를 듣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있다면 그래, 나도 그냥 내 가슴을 찾으러 떠나야겠다. 반대로, 뚱뚱한 여자는 어떤가. 비만한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한 현실 인식을 부정할 수 없다. 내 몸은 단순한 실체가 아니다. 사람들의 말을 통해 만들어진다.

"살 안 빼?", "돼지 같아", "너 때문에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솔직히 두 분 중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 누굴 뽑을까요?", "행동 굼뜬 거 봐", "건강을 위해 하는 말이야"... 질문과 답이 쌓여 내 몸이 만들어진다. 남자들은 잘 경험하지 않는 일이다. 그들에게 체중은 단점이지만, 내게 체중은 '반드시 고쳐야할 문제점'이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뜬금없이 복도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이름에 발을 멈췄다. 유진이는? 에이, 걘 다리가 좀 짧잖아. 연희는? 걘 얼굴이 진짜, 와... 웃음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이 들려왔다. 그럼 OO이는? 그들은 폭소하고 말았다.

"걘 여자로 치면 안 되지."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왜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왜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넷플릭스의 <투 더 본>(To The Bone, 2017).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왜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넷플릭스의 <투 더 본>(To The Bon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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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왜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사람들의 말로 구성된 현실의 몸은 곧 내가 인식하는 몸을 만들어낸다. 이는 실체적인 나의 몸과 완전히 다른 형태다. 뒤틀릴 대로 뒤틀어진, 괴기한 모양새다.

그러나 실체의 몸도, 현실의 몸도, 인식 속의 몸도 전부 내 몸이기에 난 그 속에서 길을 잃는다. 여기에 이상 속의 '완벽한 몸'까지 비집고 들어서면,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식이장애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 현실 속의 몸도, 인식 속의 몸도 내가 여성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몸만이 젠더를 허락한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 좁디좁은 젠더 규범 안에 완벽하게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나는 감히 여성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지 못한다. 이것은 반대로 그 칭호를 하사받은 여성들이 얼마나 억압당하고 있는지 증명하고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실제 그녀들은 그 협소한 젠더 규범 안에서 살고 있다. 즉, 이것은 나만의, 비만인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성의 몸은 수많은 이들의 말로 인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사회는 성적 매력과 여성의 규범적 정의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니게 되었고, '여성적'이라고 인정받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로 취급받게 됐다. 사회가 말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생식 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존재다. 여성들이 수많은 질문을 받는 이유다.

"네가 파인 옷을 입고 와서 그런 거 아냐?"
"여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잖아."

고깃덩어리로서의 주제와 정도를 파악하라는 질문들이 여성의 몸을 만든다. 볼륨감이 있고, 날씬하고, 얼굴은 작고, 코는 높고, 헤어라인은 깔끔하고, 승모근은 없는 몸을 위해 여성이 인식하는 자신의 몸은 그야말로 조각조각난다.

그뿐인가. 나는 노출이 많은 옷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한다. 클럽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몇 번의 위협을 겪고 한동안 밤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국의 클럽에선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무렇게나 뻗쳐오는 손이나 '부비부비'를 견딘다. 스킨쉽에 대한 암묵적 허락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춤을 추고 싶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엉덩이에 성기를 부비는 것까지 감수해야 하는 건가. 제재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겐 정말로 위협적인 남자들이 있다. 난 강남의 일부 클럽에서 일명 '뺀찌'(입장 거부)를 먹을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다. 내가 클럽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는 순간 그 공간 안에서 가장 계급이 낮은 존재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설마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남자가 클럽 뺀찌 더 많이 먹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친구의 손을 막무가내로 잡아끌며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는 남자에게 "저희는 관심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그는 나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너한테 한 얘기 아니거든, 돼지X아."

뭐, 그때 그 사람이 생각해낸 욕이 이거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혹은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수작 거는 것을 방해해서 '너무나 기분 나쁘셨을 수도' 있다. 이유 불문하고, 난 인적이 드문 새벽의 클럽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말이 또 내 몸 한구석에 뒤틀린 몸을 만들어냈다는 거다. 그들이 만든 몸 안에 갇힌 나는 규범에 맞는 몸이 되기 위해, 젠더를 획득하기 위해, 그리고 삶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수많은 몸을 더 꿈꿔야만 했다.

'여성으로 허락받는 몸을 꿈꾸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넷플릭스의 <투 더 본>(To The Bone, 2017)이라는 영화는 거식증 환자인 주인공이 치료를 위한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넷플릭스의 <투 더 본>(To The Bone, 2017)이라는 영화는 거식증 환자인 주인공이 치료를 위한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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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가 무엇일까? 적게 먹고 움직이기? 나는 수많은 다이어트를 해봤다. 단백질 다이어트, 홍초 다이어트, 원푸드 다이어트, 퍼스널 트레이닝, 덴마크 다이어트... 물론 정석 다이어트도 했다. 내 인생 대부분이 정석 다이어트와 요요의 반복이었다. 체질 때문이었냐고? 아니, 나는 운동에 소질이 없었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은 음식뿐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그럴 수밖에 없도록 자라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다이어트는 내 몸과 정신을 망쳤다. 이후에 찾아온 것은 식이 장애였다. 넷플릭스의 <투 더 본>(To The Bone, 2017)이라는 영화는 거식증 환자인 주인공이 치료를 위한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침대 밑에 토한 봉지를 숨겨두고 대부분은 이뇨제와 다이어트 약을 물처럼 먹는다. 여자들은 토하고, 윗몸 일으키기 때문에 멍이 든다. 또 굶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괴기하게 느껴질 법한 양의 음식을 밀어 넣고, 아무런 이유 없이 지하철에서 쓰러진다. 사회가 허한 몸을 찾기 위해.

나는 다이어트 실패가 부끄럽지 않다. 게으르고 의지가 없다고? 위의 모든 일을 내가 수행했고, 수행해오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매일 토하는 건 생각보다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엠버는 가슴을 찾으러 떠났다. 아니, 그녀는 떠나는 대신 비디오를 올렸다. 그녀는 수많은 질문에 답했고, 여전히 답하고 있다. 나는 사는 내내 '마른 몸'이라는 파랑새를 찾아 헤맸다. 아니, 그냥 '정상' 인 몸, "그 왜 뚱뚱한 애 있잖아"가 아니라 그냥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몸을 꿈꿨다. 그걸 완전히 그만둘 수 있을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뒤틀리고 거대한 내 현실의 몸을 이끌고 그들이 여자만 할 수 있다는, 또 여자가 해서는 안 된다는 일을 한다. 짧은 치마를 입고 클럽에 가서 신나게 몸을 흔든다.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고, 진한 화장을 한다. 설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내가 감히 글 쓰고 말하고 '쿵쾅'거리는 게 너무나 거슬릴 그래, 당신들을 위해.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창비·오마이뉴스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공모 기사입니다. (공모 관련 링크 : https://goo.gl/9xo4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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