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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16살 때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입학한 이듬해 소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지요."

지난 16일 김귀선 애국지사(1913.12.19.~ 2005.1.16.)의 큰아드님이 사는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를 찾았을 때 김윤수(77)씨가 한 말이다. 그는 이어서 "어머니는 92살로 돌아가시기 전 2개월 정도 치매를 앓으셨는데, 그때 날마다 독립만세를 부르셨으며, 일본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하시면서 마루 밑으로 들어가시곤 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울컥 눈물을 흘렸다. 순간 기자도 가슴이 뭉클했다.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귀선 지사(89살 때)
▲ 김귀선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귀선 지사(89살 때)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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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가슴 속의 응어리가 컸으면 치매 상태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얼마나 일제 순사가 무서웠으면 마루 밑으로 숨는 행동을 했을까? 시대의 아픔을 겪지 않은 기자로서는 그저 가슴이 멍멍할 뿐이다.

큰아드님 김윤수씨는 김귀선 지사의 판결문과 공판에 회부된 소녀회 조직원 11명의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기사(1930.9.30.), 전남여자고등학교의 명예졸업장(1972.5.25.), 건국포장증서(1993.4.13.) 등과 함께 푸른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님의 사진 한 장을 기자 앞에 내어 놓았다.

흰 머리에 눈이 쑥 들어간 모습의 김귀선 지사는 89살 때 되던 해인 1993년에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는데 그때 옥색 한복 차림에 붉은 색 훈장을 단 모습의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생의 마지막 기로에서 받은 훈장이나마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위로했을 듯싶어 기자는 김귀선 지사의 옥색 한복차림의 사진을 오래도록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에서 좀 더 일찍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감옥살이 끝에 병든 육신을 이끌고 고단한 삶을 이어온 기나긴 세월을 보살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판사'를 꿈꾸던 소녀

 '공판에 회부된 소녀회원들' 기사(동아일보,1930.9.30)
▲ 동아일보 기사 '공판에 회부된 소녀회원들' 기사(동아일보,1930.9.30)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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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벌교 출신인 김귀선 지사의 아버지 김용국은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한 실력파로 귀국하여 법관이 되는 길을 마다하고 상업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법관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제 겨레를 심판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법관보다는 상업으로 큰돈을 벌어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인텔리 집안의 김용국과 강보성의 귀한 첫딸이라는 뜻으로 이름도 귀선(貴先)으로 지은 아버지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딸을 광주로 유학시켰다. 적당히 태어난 동네에서 바느질이나 익혀 시집을 보내던 시절에 광주 유학의 길은 파격적인 선택이었으며 그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김귀선 지사는 '판사'를 꿈꾸는 소녀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학지인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의 생활은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판사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김귀선 지사는 광주여고보 재학 중이던 1929년 5월 비밀결사 소녀회(少女會)에 가입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소녀회는 1928년 11월, 당시 광주지역 학생 비밀결사운동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장재성(張載性)의 누이동생인 장매성(張梅性)의 주도로 민족독립과 여성해방을 취지로 하여 조직된 비밀결사대였다.

59살 되던해에 받은 전남여고 명예 졸업장
▲ 명예졸업장 59살 되던해에 받은 전남여고 명예 졸업장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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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선 지사의 건국포장(왼쪽), 국가유공자증서
▲ 국가유공자증서 김귀선 지사의 건국포장(왼쪽), 국가유공자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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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929년 11월 3일 조선인 여학생에 대한 일본인 학생의 희롱이 발단이 되어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시위항쟁의 주동학생들이 구속되자 이에 항의하여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白紙同盟)을 단행하였다.

이 일로 1930년 1월 15일 김귀선 지사는 동급생 11명과 함께 일경에 잡혀 같은 해 10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러야했다. 딸을 광주까지 유학시킨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을 포함해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법정으로 들어서는 어린 여학생들을 그저 바라다보아야만 했으니 그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 일로 김귀선 지사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감옥에서 받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고문의 강도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가혹했다. 그 예로 이선경(1902.05.25 ~ 1921.04.21.) 애국지사의 경우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비밀결사조직인 구국민단(救國民團)에 참여하다 잡혀가 고문 끝에 19살의 나이로 숨지는 등 일제의 고문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대담하는 김귀선 지사의 아드님 김윤수 씨
▲ 김윤수 대담하는 김귀선 지사의 아드님 김윤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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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되리라던 소녀는 퇴학처분으로 학업의 길을 중단하였지만 식민지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 동안 순천시 매곡동에서 야간학교를 세워 민족의 얼과 문맹퇴치에 앞장서게 된다. 김귀선 지사가 다니던 광주여고보는 훗날 전남의 명문 전남여자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되는데 1972년 5월 25일, 이 학교에서는 김귀선 지사에게 감격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김귀선 지사 나이 59살 때 일이다.

김귀선 지사는 2남 3녀를 두었으나 33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보따리장사 등 갖은 고생 끝에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내야 했다. 그러한 어려움 끝에도 아이들은 반듯하게 자라 큰아들인 김윤수(77)씨는 순천시 의회의원과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날 대담을 위해 만난 김윤수 씨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본인의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김귀선 어머니를 평생 모신 아내가 췌장암으로 서울 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곧바로 상경하려고 가방까지 싸놓은 상태라 전화기에 축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경황인데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한다는 기자의 방문을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어스름 저녁, 어머니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다 듣고 일어서려는데 굳이 몸도 불편한 분께서 30여분 거리에 있는 순천버스터미널까지 손수 운전을 해서 데려다 주는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순천역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는 말했다.

"저는 어머니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실이 무엇보다 자랑스럽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비록 제가 초등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지만 언제나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을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족정신을 실천하신 어머님은 제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김귀선 지사 아드님 김윤수 씨와 대담 하는 기자
▲ 김윤수 2 김귀선 지사 아드님 김윤수 씨와 대담 하는 기자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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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비록 가진 것은 없고,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사회를 고발하고 오로지 정의와 정직을 삶의 지표로 살아온 그의 삶은 순천시 의회의장을 역임한 사실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래된 차를 손수 운전하여 순천버스터미널까지 기자를 데려다 주며 흔드는 그의 손 너머에는 푸른 옥색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그의 어머니, 김귀선 애국지사도 함께 환한 얼굴로 기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김귀선, #항일독립운동, #김윤수, #여성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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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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