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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다섯 명은 결국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차라리 천형이라고 믿고 싶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오는 18일부터 사흘간 마지막 세월호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오마이뉴스>는 긴급 기획을 편성해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이들에게 조그마한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좋은 기사 원고료)은 전액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전달됩니다. (후원하기) http://omn.kr/olvf [편집자말]
[2014년 4월 16일] 답 없는 휴대폰

세월호 미수습자 양승진 선생님의 아내 유백형씨 숙소에서 나와 세월호 선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이희훈
"여사님, 여사님, 빨리 뉴스 봐보세요!"

김 대리의 다급한 목소리. 대형마트 반찬코너에서 일하던 아내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속보, 속보, 속보….

"어머나! 이게 무슨 소리야?"

곧장 옷을 갈아입고, 마트를 빠져 나왔다. 눈앞에 택시가 보였다. 철커덕, 탁.

"아저씨, 빨리요, 빨리!"

택시는 쏜살같이 달렸다. 하지만 아내의 뛰는 가슴만 못했다. 남편이 일하는 학교가 이렇게 멀었던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내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남편의 휴대폰은 응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일관된 소리.

"뚜루루루, 뚜루루루...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아내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제발 살아만 있어주세요."

답이 없었다. 문자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문자 확인하면 바로 전화 주세요. 꼭이요!"

2014년 4월 16일의 일이었다. 1313일이 지난 지금까지, 남편은 답이 없다.

[1986년 3월 23일] 신혼여행지 제주도

세월호 미수습자 양승진 선생님의 아내 유백형씨가 남편이 그려진 액자를 들고 있다. ⓒ 이희훈
1985년 8월 17일 토요일. 경기도 안성, 지하 1층에 있는 백운다방. 오렌지색 투피스. 검은 줄무늬 양복.

아내(유백형)는 아직 생생하다. 남편(고 양승진)을 처음 만났던 날, 만났던 곳, 입었던 옷... 유도를 했다던 교사 1년차 스물아홉 청년은 덩치가 산만했다.

"아휴, 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아, 네네..."

어색했던 맞선 자리. 아내는 뚱뚱하고 말수 적은 그 청년이 맘에 들지 않았다. 전화번호도 주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안녕히 가세요."

일주일 후,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엄마의 다급한 손짓. 어서 받아보라는 재촉이었다.

"여보세요."
"네, 지난주에 만난 양승진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커피 한 잔 하실래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10시 30분.

'뭐야, 이 시간에...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옆에 앉아 귀동냥을 하던 엄마의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

"만나봐, 어떻게 한 번 보고 사람을 안다니?"

화장도 하지 않고, 대충 겉옷을 걸쳤다. 안성 터미널 앞 2층 소라다방. 구석에 있던 덩치 큰 청년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시간도 늦었는데 불러내서..."
"아니에요.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이야기가 오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내일 서울대공원 가실래요?"
"네? 네... 그래요."

일요일, 8월 땡볕의 서울대공원. 김치찌개를 먹던 청년은 또 땀을 뻘뻘 흘렸다.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을 툭 건넸다.

서울대공원을 걷고, 평택에서 영화를 보고, 안성에 와서 대림동산에 들렀다. 다리가 아파 벤치에 앉았는데 청년이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슈퍼 쪽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엔 아이스크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두 개도 아니고 하나야?'

자세히 보니 쌍쌍바. 큰 덩치의 청년은 톡 하고 아이스크림을 갈라 한쪽을 건넸다.

"날씨가 많이 덥죠?"

청년의 이마에는 여전히 땀이 송골송골. 아내는 속으로 웃었다. 썩 멋있진 않지만, 그 나름의 자상함, 그 나름의 재미.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은 두 사람은 자리에 일어났고, 대림동산을 나오는 길에 처음 손을 꼬옥 잡았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 두 사람은 1986년 3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2014년 4월 15일] "좋겠네, 제주도 또 가고"

세워호 미수습자 양승진 선생님 부인 유백형씨가 미수습자 가족 회의시간에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 회의실에는 남편의 사진이 여전히 걸려 있다. ⓒ 이희훈
"좋겠네. 제주도도 가고. 나는 신혼여행 때 가보고 한 번도 못 갔는데!"

2014년 4월 15일, 아내는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농담을 건넸다. 남편은 "허허" 웃었다. 남편은 담임교사는 아니었지만, 인솔교사 자격으로 수학여행길에 올랐다.

"잘 다녀와요."
"응, 갔다올게."

남편은 아내가 단단히 챙긴 큰 가방을 짊어진 채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 얼마 뒤 오전 수업이 끝날 즈음, 남편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

"이제 배 타러 인천으로 가."
"조심히 다녀와요."

제주도를 향해 가던 세월호는 4월 16일 아침 진도 앞바다에서 뒤집혔다. 아내는 단원고에서 출발해 진도로 향하는 1호차 버스에 올랐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를 반복... 통화 목록의 '남편' 두 글자 옆에 '70'이란 숫자가 새겨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에서 더 이상 "뚜루루루, 뚜루루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아내는 주저앉았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여객선 침몰지 방향을 바라보고면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팽목항에는 더이상 생존자 구조선이 들어오지 않았다. ⓒ 이희훈
아내는 진도가 어딘지도 몰랐다. "미국에 가는 것처럼" 너무 멀게 느껴졌다. 아니, 지옥으로 가는 버스 같았다. 그땐 진짜 지옥으로 가는 버스인지 몰랐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진도실내체육관에 도착했다. 아수라장. 분명 앞은 보이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소리는 들리는데, 들리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아웃포커싱, 모든 소리가 '우웅우웅'으로 들렸다.

딱 하나 선명했던 것. 체육관 한 편에 붙은 넓은 종이. 아내는 내달렸다. 삐뚤빼뚤 검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구조자 명단.' 종이를 훑는 시선을 따라 입이 함께 움직였다.

"양승진, 양승진, 양승진, 양승진, 양승진, 양승진, 양승진, 양승진... 어떡해... 없어."

아내는 또다시 주저앉았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병원이었고, 팔엔 수액주사 바늘이 다닥다닥 꽂혀 있었다.

"여보, 우리 신혼여행 갔던 제주도에 혼자 가기 싫었던 거야? 그래서 진도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2017년 3월 23일] 결혼기념일 선물

남편 얼굴 앞, 몸져 누운 아내 세월호 참사 후 6개월째 되는 날을 하루 앞둔 2014년 9월 15일, 진도실내체육관. 미수습 양승진(단원고 교사)씨 아내 유백형씨가 편두통약 두 알을 먹은 뒤 진도체육관에 누워있다. ⓒ 소중한
세월호 미수습자 양승진 선생님의 아내 유백형씨가 사용했던 컨테이너 숙소도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 이희훈
아내는 철쭉꽃 피던 때 진도에 와서 쨍쨍 내리쬐는 땡볕도, 펑펑 쏟아지는 눈도 마주했다. 꽉 찬 달을 보며 추석을 보냈고, 호오호오 손을 불며 설날도 보냈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아내는 마냥 남편을 기다렸다.

처음엔 군용침대 딱 하나가 진도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아내의 자리였다. 참 비좁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빠져나가고, 아내는 휑한 체육관에 덩그러니 놓였다.

아내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그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면, 절로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2014년 4월 16일 이후, 아내는 기적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마술이라도 부려 바닷물을 싹 빨아들이고 싶었다. 어떨 땐 바다에 풍덩 들어가 남편을 데려오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적은 오지 않았다. 2014년 11월 11일. 미수습자 가족들은 해양수산부의 수중수색 종료 방침을 받아들였다. 팽목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땐 금방 세월호를 인양할 걸로 믿었다. 인양만큼은 기적이 아닌 줄로만 알았다.

인양을 바라는 것도 기적을 바라는 것이었을까. 세월호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팽목항에서의 기다림 역시 길어졌다.

대통령 같지 않은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얼마 후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2017년 3월 23일의 일. 기적이었을까. 그날은 서른한 번 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여보, 당신이 보내준 결혼기념일 선물이에요? 이거 기적인 거죠?"

이제 배가 올라왔으니 한 달이면 남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아내는 생각했다.

[2017년 11월 18일, 그리고 1985년 8월 17일] 줄무늬 양복

양승진 선생님이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입었던 양복을 목포로 가져왔다. 왼쪽 상의 주머니에는 푸른색 손수건, 셔츠에는 잘 맨 넥타이, 셔츠 속에는 깨끗이 잘 빤 속 옷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 이희훈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양승진 선생님의 물품들. 모두 집이나 학교에 있던 것들이다. 1313일 동안, 세월호에서 남편의 흔적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 이희훈
참사 후 1313일이 지나 아내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다(2017년 11월 18~20일). 시신 없는 장례식. 기적은 없었다. 끝내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물론, 남편의 물건 어느 하나 찾지 못했다.

"다른 미수습자 가족은 옷가지라도 찾았던데..."

그것마저 부럽다. 하루에도 수차례, 아내는 유류품을 모아두는 컨테이너에 나가본다. 매번 한숨을 내쉬며 돌아선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원망의 말도 쏟아내 본다.

"내가 챙겨준 가방이라도 좀 보내주지... 내가 생일 때 사준 등산화도 신고 갔잖아. 그거라도 좀 보내줘. 이 매정한 사람아..."

남편의 장례를 치르기로 마음먹은 후, 아내는 세월호를 자주 찾아간다. 전엔 가슴이 아려와 그저 두려웠던 세월호. 남편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끼려면, 이제 외면할 수만은 없다.

짜디짠, 그리고 차디찬 바다에 있었던 1073일. 그 시간을 포함해 3년 7개월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내는 세월호에서 남편의 체취를 느낀다. 아내만 느낄 수 있는 공감각적 체취. 세월호는 남편의 마지막 시공간을 담은 유일한 존재다. 장례를 치르고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곧 존재니까.

남편을 찾지 못해서, 아내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해보지도 못했다.

아내가 돌아갈 집에는 몸이 불편한 팔순의 노모가 있다. 아내의 몸 역시 3년 7개월 동안 한없이 망가졌다. 정신과 약을 오래 먹어 위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잇몸이 무너져 이미 임플란트 하나가 원래 치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허리·어깨·가슴 통증과 소화불량·두통·메스꺼움이 항상 따라다니고, 예전에 비해 시력도 많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아내는 하늘에 있는 남편의 앞날은 수도 없이 생각해봤다. 2017년 11월 14일 밤, 아내는 터덜터덜 걸어 세월호 앞에 섰다.

"여보, 이제 당신을 보내줘야 할 것 같아. 여태 내 마음 속에 당신을 담아두고 있었는데 이제 훨훨 날아가. 당신이 항상 그랬잖아. '나는 저 세상에 가더라도 선생님 될 거야'라고. 하늘에서도 좋은 선생님이 돼서 학생들과 행복하게 잘 지내요. 여보, 사랑해요. 보고 싶고, 항상 잊지 않을 거예요."

이틀 후 발급 받은 두 사람의 혼인관계증명서. 남편의 이름 옆에 '사망' 두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자주 입던 검은 줄무늬 양복을 챙겼다. 장례식 후 양복을 태워 유골함에 유골 대신 넣어야 한다. 1985년 8월 17일,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도 남편은 검은 줄무늬 양복을 입고 있었다.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양승진 선생님의 양복. ⓒ 이희훈


태그:#세월호, #미수습자, #장례식, #양승진, #유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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