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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원전은 총 3곳이 가동중이며, 섬 북부에 2곳, 섬 남부에 1곳이 가동중이다.
▲ 대만 원자력 발전소 현황 대만에서 원전은 총 3곳이 가동중이며, 섬 북부에 2곳, 섬 남부에 1곳이 가동중이다.
ⓒ 홍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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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작년 10월 경주 지진에 이어 또다시 지진이 발생하면서 우리나라도 이제 더 이상 지진 안전국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문제는 한반도 동남권에 밀집한 원자력 발전소이다. 신고리 5,6호기 공사마저 재개된 지금, 원전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은 가시질 않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원전 제로를 천명한 아시아 국가가 있다. 바로 대만이다. 대만은 2025년 원전 제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대만은 어떻게 탈원전을 이루었을까? 대만의 탈핵운동을 주도한 녹색시민행동연맹(綠色公民行動聯盟 GREEN CITIZENS ACTION ALLIANCE - GCAA)의 홍순한 부사무총장을 대만 타이베이 YMCA호텔에서 지난 11일 만났다.

대만의 탈원전 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대만 4번째 원전 건설 예정지는 해수욕장과 소규모 어업이 이루어지던 해변가이다.
▲ 대만 4번째 원전 건설 예정지 대만 4번째 원전 건설 예정지는 해수욕장과 소규모 어업이 이루어지던 해변가이다.
ⓒ 홍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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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피해범위 보이시죠? 대만의 전체 면적과 비슷합니다."

홍 부사무총장은 후쿠시마 피해 범위와 대만 전체 지도를 비교한 슬라이드를 보며 설명했다. 1978년 대만에 첫 원전이 세워진 이래 현재 대만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총 세 곳이다. 이 중 첫 번째 원전은 내년이면 가동 40년이 되어 폐로 절차에 들어간다. 마지막 원전의 폐로 예정 연도는 2025년이다. 대만이 2025년 완전한 탈핵을 목표로 하는 이유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고리 5·6호기가 이슈가 되었듯 대만은 건설중인 4번째 원전이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대만의 모든 원전은 계엄령 당시 계획되거나 건설되었다. 4번째 원전 역시 계엄령 당시였던 1980년 건설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87년 계엄령 해제 후 탈핵운동이 시작되면서 공사는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핵폐기물 문제였다. 대만은 본 섬 북부에 있는 란위섬이란 곳에 핵폐기물을 버려왔다. 그러나 섬이라는 특성상 높은 습도와 염분으로 핵폐기물이 손상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섬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다오족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기도 했다. 96년에는 북한에 핵 폐기물을 수출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한국의 여러 환경단체에서 반대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개입으로 핵 폐기물 북한 처리도 실패했다.

탈핵운동을 정권에 의지하면 한계가 온다

대만의 핵폐기물을 버리던 섬인 '란위섬'은 핵폐기물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 대만 핵폐기물 섬 '란위섬' 대만의 핵폐기물을 버리던 섬인 '란위섬'은 핵폐기물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 홍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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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전까지 정부는 원전을 20년 연장시키고 4번째 원전을 신규 가동하려고 했습니다."

이 주장은 대만 국민당 계획이 아닌 민진당 계획이었다. 대만 정당의 탈원전 정책을 단순히 구분하자면 현재 야당인 대만 국민당은 원전을 지지하는 정당이다. 계엄령 당시부터 정권을 잡아온 국민당은 현재 대만의 원전 체제를 설계한 정당이다. 반대로 현재 여당인 민진당은 탈핵을 주장하는 정당이다.

홍 부사무총장은 탈핵과 정치성을 결합하면 정치적 이슈로 확장시킬 수 있으나, 이에 따른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며 운동의 주체성이 정치성으로 인해 훼손된다고 밝혔다. 실제 대만은 87년 계엄 해제 이후 여러 탈핵단체들은 민진당과 협업하여 국민당과 대립각을 세워가며 탈원전 정책을 이끌어 갔다, 이로 인해 탈원전이 정치 쟁점으로 부상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민진당 천수이볜 총통이 정권을 잡자, 이후 민진당은 탈원전 논의를 중단하였다. 이로 인해 2000년 중반부터 2010년까지 탈핵운동은 큰 침체기에 접어든다.

그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대만의 반핵운동은 들불처럼 확대되었다. 2011년 4월 6개 주요 도시에서 반원전 시위가 일어났다. 이 때 당시 정당 차원에서 참여는 허용되었지만, 그들이 주도하지도 못하고 발언 기회도 주지 않았다. 당시 핵심 구호는 "NUCLEAR GO ZERO" 였다. 제로의 의미는 4가지였다. 재해0, 원전0, 폐기물0, 그리고 정당에서 다루는 것도 0이었다.

특히 탈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진당 뿐 아니라 다양한 정당의 지지자의 참여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했다. 원전 반대가 최소 50%가 되어야 원전도 멈출텐데 민진당의 지지율은 30-40%에 불과했다. 탈핵운동의 방향이 중도층과 국민당 지지자까지 포함되어야 했던 이유이다.

우리는 어떻게 탈핵에 성공했을까? 

원전에 대한 안전문제를 두고 국민당 지지자와 주부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 국민당 지지자와 주부들의 참여 원전에 대한 안전문제를 두고 국민당 지지자와 주부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 홍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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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집중한 것은 원전의 미래세대인 젊은층 이었습니다. SNS에 초점을 맞춰 이슈 타켓팅을 했습니다."

홍 부사무총장은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원전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전이 단순 전문 영역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시민들의 다양한 참여를 강조했다, 실제 그들은 연 400-500회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탈핵 강연을 했다. 실제 국민당 마잉주 지지자였던 주부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또한 유명 가수가 탈핵 완장을 차고 공연하기도 하고, 대만의 여러 밴드를 모아 반핵을 주제로 앨범도 만들었다. 또한 한국의 청룡영화제 같은 대만영화제에 대만배우들이 탈핵 스티커를 가지고 참가하기도 했다. 원전 문제에 쉽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특히 반핵깃발은 한국의 세월호 리본처럼 상징이 되었다. 원래 이 깃발은 평범한 카페 사장이 만들어서 걸어두고, 몇 장 인쇄해서 친구들 나눠줬을 뿐인데 SNS를 통해 확장되어 수 천명이 깃발을 예약하였다.

수제품이다 보니 이 깃발을 원하는 사람들은 2개월을 기다리기도 했으나, 수요는 줄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 깃발은 3만장이 넘게 팔렸다. 서점, 농산품가게, 결혼식장 방명록에도 사용되는 등 누구나 쉽게 탈핵을 표현하고 참여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 깃발은 마잉주 정부에서 불공정하게 진행하려던 원전 찬반투표를 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2013년 무려 22만 명이 참여하는 반핵운동이 확산되었고 아이 엄마들도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잉주 정부가 원전을 계속 유지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2014년 8개 주요도시 13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타이베이 메인스테이션 앞 주요도로가 막혀버렸다. 그리고 2014년 청년들이 국회를 20일 점거한 '해바라기 운동'이 발생했다.

그 때 무려 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완공 직전이던 4호 핵발전소는 건설 중단되었고, 2016년 당선된 차이잉원 총통은 탈핵 정책을 승인하면서 대만은 탈원전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녹색시민행동연맹은 다양한 탈핵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7년 탈핵영화제
▲ 녹색시민행동연맹 녹색시민행동연맹은 다양한 탈핵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7년 탈핵영화제
ⓒ 녹색시민행동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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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부사무총장은 대만의 탈핵운동의 성공을 두고, 시민참여, SNS와 젊은 층의 확산 등을 요인으로 꼽았다. 무엇보다 원전문제는 단순히 전문가 영역이 아닌 시민참여와 민주주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홍명근 개인블로그에 중복게재됩니다. 본 기사는 6월민주포럼 기획 및 후원으로 취재되었습니다.



태그:#지진, #원자력, #시민, #민주주의, #탈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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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바꿈세상을바꾸는꿈,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그리고 지금은 한반도평화경제포럼 사무처장입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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