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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학력고사 1993년 8월 20일 대입 수능이 실시되면서 학력고사가 폐지됐다. 대한뉴스를 캡쳐했다.
▲ 1986년 학력고사 1993년 8월 20일 대입 수능이 실시되면서 학력고사가 폐지됐다. 대한뉴스를 캡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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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는 1989년 6월 22일 대학생 과외 교습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학비를 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학생들의 대정부 투쟁을 누그러뜨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없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1년 7월 22일 여름방학 기간만 초중고 학생의 학원 수강을 허용하는 조치가 발표됐다.

과외 교습과 학원 수강이 허용되면서 사교육 시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학원 수강이 허용되자 중고생들이 오가는 길목에는 으레 학원들이 생겨났다. 동네 골목마다 보습학원이 들어서는가 하면 대입학원은 중고생을 대상으로 새벽과 저녁 시간대에 단과반을 개설했고, '소수정예'니 '특수그룹'이니 하는 종합반을 편성하여 고액의 학원비를 받았다.

사교육 시장이 팽창하는 가운데 인기 강사의 강의에는 모집 정원을 초과하는 수강생이 몰렸고, 유명 입시학원의 여름방학 강좌는 매진 사태가 발생했다. 대학생들의 과외 교습도 전성기를 맞았다.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학생들의 경우 월 100만 원 이상을 받는 고액 과외가 성행하기도 했다.

대입 평준화 정책의 빗장이 풀리다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던 1993년 8월 20일 대입 수학능력시험(수능)이 처음 실시됐다. 주입식 교육의 상징이 돼버린 학력고사의 시대가 저문 것이다. 대입 수능의 도입은 암기 위주 평가에서 벗어나 대학 교육에 필요한 사고력과 응용력을 중심으로 수험생을 평가하겠다는 취지였다. 수능 실시와 함께 대입전형이 변경되어 내신 반영률이 높아졌고, 대학별 고사가 자율적으로 실시됐다.

김영삼 정부는 대입 수능을 도입한 다음 1995년 5월 31일 교육개혁안(5·31교육개혁)을 발표했다. 9개 항목으로 구성된 5.31교육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린교육사회, 평생학습사회 기반구축, ▲대학의 다양화와 특성화, ▲초중등교육의 자율적 운영을 위한 학교공동체 구축, ▲인성 및 창의성을 함양하는 교육,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학입학제도, ▲학습자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는 초중등교육 운영, ▲교육 공급자에 대한 평가 및 지원체제 구축, ▲품위 있고 유능한 교원 육성, ▲1998년까지 교육재정 GNP의 5% 확보 등이었다.

5.31교육개혁이 시행되면서 초중등학교에서는 수준별 수업을 이유로 우열반 편성이 가능해졌다. 창의성을 함양하는 교육 실현을 이유로 다양한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가 설립됐다. 대학 교육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이유로 대학 설립이 용이해져 다양한 특성의 대학들이 문을 열었다. 학문 융·복합화를 이유로 각 대학에서는 학과의 통폐합과 학부제가 시행되는 한편, 전문대학원이 개설됐다.

교육사의 한 획을 그은 5.31교육개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성공적인 교육개혁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교육정책으로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경감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김영삼 정부의 5.31교육개혁은 그동안 지속해왔던 평준화에 기초한 교육정책의 폐지를 의미했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이유로 평준화의 빗장이 풀리자 대입 경쟁은 격화됐고,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은 가중됐다. 국가 개입 최소화와 시장 기제의 활성화라는 5.31교육개혁의 기조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하에서 한층 심화했다.

학원 1번가, 강남구 대치동

노량진 학원가 1980년대 노량진 학원가가 학원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 출신의 재수생들이 접근하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 노량진 학원가 1980년대 노량진 학원가가 학원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 출신의 재수생들이 접근하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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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 금지라는 전두환 정권의 강압적인 통제 속에서 1980년대 사교육 시장은 재수생 중심의 입시 학원이 주를 이뤘다. 당시 노량진 학원가는 재수생을 대상으로 종합반과 단과반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재수생 중심의 노량진 학원가가 학원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 출신 재수생들이 접근하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강남구 대치동이 학원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과외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대치동 일대에 중소 규모 학원들이 등장했다. 대치동 학원들은 다수보다는 소수 학생을 대상으로, 특정 과목을 전문적으로 교습하는 방식이었다. 노량진 학원가가 유명 입시학원을 중심으로 '소품종 대량 생산방식'이었다면, 대치동 학원가는 전문 학원 중심의 '다품종 소량 생산방식'이었다.

5.31교육개혁으로 대입 전형이 다변화되면서 명문대를 겨냥한 대치동 학원가의 맞춤형 교육방식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서울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에 응시하려는 수험생들의 수요와 대치동 학원가의 맞춤형 교육 방식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1990년대 중후반이 되자 강남의 학원가에는 석박사 학위를 소지한 전문 과외강사들이 등장하여 사교육 특구의 권위를 더했다.

IMF 외환위기의 한파 속에서도 대치동 학원가는 불황을 타지 않았다. 믿을 건 오로지 나뿐이라는 풍조가 형성되면서 '대학 진학열'과 '전문직 선호' 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경쟁 구조가 고착되는 가운데 명맥을 유지하던 과외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판결이 나온다.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는 '학원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위헌 결정(98헌가16)을 내렸다.

"학교 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차별 최소화, 비정상적 교육투자 방지 등을 위해 과외를 금지하는 정당성은 인정된다. 그러나 과외교습 등 사적 교육에 있어서는 부모의 교육권과 자녀의 인격발현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가 제한할 경우에도 한계가 있다. '원칙적인 금지'와 '예외적인 허용'이라는 현행 법률의 제한방식은 고액과외 방지 등 입법 목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과외교습까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금지함으로써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대한민국 교육 40년>, 245쪽

헌재의 판결로 사교육 시장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 과외교습이 전면 허용되면서 학원 과외가 재수생 중심에서 재학생 중심으로 재편됐다. 대형 학원이 밀집한 노량진 학원가는 침체의 길로 들어선 반면 대치동이 사교육 특구로 부상하여 지방 학생들을 흡수했다. 대치동이 '사교육 특구'로 각광 받으면서 수능 난이도에 따라 아파트값이 급등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능의 난이도가 높았던 2001년 11월 3억8000만 원이었던 34평형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한 달 뒤인 12월 12%(4500만 원)가 급등한 4억2500만 원에 거래됐다.

2000년대 들어 수시 모집이 확대되고 입학사정관제가 신설되는 등 대입 전형 방식이 다양화되자 대치동 학원들은 강남 학부모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포착한 교육 방식을 고안해냈다. 논술과 면접은 물론 다양한 스펙을 요구하는 대입 전형에 대치동 학원들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학교 교육은 무기력해졌고, 사교육이 공교육을 대체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졌다.

대치동식 맞춤형 사교육은 고가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비싼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자들의 자식들이 명문대에 합격하기 쉬운 특권적인 교육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2000년 서울대 정시 모집에 합격한 서울 출신 1000여명 가운데 강남 8학군 출신 합격자의 비율은 50.6%였다는 사실은 교육 현장의 부익부 빈익빈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원 기업의 탄생과 어느 기자의 탄식

대치동 학원가 모습 강남구 대치동이 학원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 대치동 학원가 모습 강남구 대치동이 학원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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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인터넷 강의(인강)가 시작되면서 대치동의 사교육은 위력을 더해갔다. 대치동에서 태동한 학원업체가 인강 열풍을 주도하면서 강남의 영향력은 초고속인터넷망을 타고 전국의 사교육 시장을 잠식했다.

이즈음 특목고(특수목적고) 신드롬이 이는 가운데 사교육 붐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외국어고(외고) 입시를 중심으로 학원가가 번창하면서 사교육시장 규모는 2000년 7조 1200억 원, 2001년 10조 7000억 원, 2003년 13조 6485억 원으로 급팽창했다. 50억 원대의 연봉을 받는 스타강사가 등장하는가 하면, 강남에서는 초등학생들이 특정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족집게 과외를 받기도 했다. 명문대 진학을 위한 인맥 만들기 붐이 일어 유치원생은 물론, 유명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부유층 아이들의 병원 동창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사교육의 열풍 속에서 세계 최초로 대형학원이 증시(코스닥)에 상장됐다. 2004년 12월 메가스터디학원이 교육기업으로 코스닥에 상장, 증시 열풍에 편승했다. 상장 당시 1천억 원 규모였던 메가스터디학원은 2007년 3월 시가총액 1조 원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메가스터디학원은 시가총액 2조 원을 돌파하여 코스닥 3위로 올라섰다. 당시 1위는 네이버의 NHN, 2위는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이었고 5위가 아시아나항공이었다.

사교육 학원이 교육기업으로 탈바꿈하여 증시에서 연일 상한가를 치던 그즈음 어느 기자의 칼럼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서울지역의 이른바 명문 대학의 캠퍼스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개천의 용'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입시제도는 잘사는 집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 쉽도록 바뀌었습니다. 잘사는 집 아이들의 학력 수준이 높아졌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도 탓이라고 믿습니다. 제 경험이 그 증거입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 인생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것을 꼽으라면 80년대의 입시제도를 들겠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미워했던 군사독재정권이 만든 제도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는 저 같은 '행운'을 만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전두환 정권의 교육 정책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 권복기, '전두환 정권이 그리운 단 한가지', 한겨레 2007년 6월 29일

민주화 이후 교육 양극화가 극심해진 현실에 대한 어느 기자의 회고와 탄식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감의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서 시행된 강압적인 평준화 정책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다.

독재 정권에서 추진된 교육 평준화 정책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 구조를 혁파하지 못했다. 이런 현실에서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와 정보화를 명분으로 평준화의 빗장을 풀어버린 결과 교육 양극화가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뒤이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이르면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교육정책은 한층 심화됐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각자도생의 첨예한 생존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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