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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며 큰 의미를 두고 상당한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최근 한국교회는 많은 이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등록 교인이 10만 명 넘는다는 명성교회의 부자세습은 500년 전 중세교회보다 더 철저한 교회 개혁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다.

라은성, 이상규, 양희송 지음
▲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 라은성, 이상규, 양희송 지음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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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두 사람의 교회사 교수와 한 사람의 기독 운동가가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역사를 되새겨 보고 있다.

라은성, 이상규, 양희송, 세 저자는 마르틴 루터 이후 500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구성하여 종교개혁의 핵심 인물, 사상, 사건을 밀도 있게 소개하여 개신교인이 아니더라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한국 교회사와 오늘날 한국교회 상황을 다루는 부분까지 개신교인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의 시선까지 공정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 역사를 개관하며 라은성 교수가 한 말이 심장을 찌른다.

"제도를 변화시키면 인간성이 변화될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목회 대물림, 즉 세습을 금지한 교단 헌법도 어기고 세습을 강행한 명성교회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 한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개혁 대상이 되어 버린 대형교회의 모습이 개혁되어야 할 교회의 단편일 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이나 혁신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인간성의 변화는 진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107쪽 

일반적으로 종교개혁하면 루터를 떠올리지만, 사실상 개혁 신학을 꽃피운 이는 칼뱅이다. 책에 따르면, 칼뱅은 개혁 신학의 모든 것을 한 그릇에 담아 <기독교강요>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더불어 자신이 조직한 장로회를 통해 장로정치를 실현했던 제네바에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유럽의 모든 사람이 와서 개혁 신학을 배울 수 있게 했다. 이 점에 있어서 칼뱅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혁 신앙인은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칼뱅의 학문하는 자세나 목회하는 자세가 어떠했는지에 한국교회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공부했고, 침대에 앉아서도 책을 읽고, 비서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 적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공부와 집필 활동에 매진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칼뱅의 주석들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걸작이 되었다." - 84쪽

그렇다고 칼뱅은 책상머리에만 앉았던 사람이 아니다. 저자는 매주 3회의 신학 강의와 매주 화요일에는 장로회를 이끌었고, 병든 자를 방문하는 사역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칼뱅은 인생 후반부를 스위스 제네바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1559년 50세에 제네바 시민권을 얻기 전까지 무려 20년 동안 시의회에 참여할 수 없는 외국인 신분의 불법체류자였다는 것. 그러나 칼뱅은 신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를 개혁 신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칼뱅에게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가벼움은 그들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열을 올리고, 동성애 퇴출 등에 적극 나서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자신의 정체성을 한두 가지의 소신과 행태로 치환하고 이를 강렬하게 추구하는 과잉 주체화는 인종주의를 내건 미국 극우 세력들과 다를 바 없다. 왜 그럴까? 한국 교회사를 다룬 저자 이상규 교수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의 부족을 그 원인의 하나로 꼽는다.

"1950년 한국 교회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부족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 무조건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내면서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했고, 국가권력과 교회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다." -281쪽

이승만 이후 한국교회는 수적 성장을 절대시하며 교회에 대한 평가 잣대를 오직 규모의 크고 작음에 국한하는 교회 성장론에 매몰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교회 성장주의는 필연적으로 교회 구성원을 두고 헌금을 얼마나,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수적 성장을 절대시한 결과 성장 아닌 가치들, 예컨대 정당한 치리, 의와 거룩, 성결, 이웃 사랑과 베풂 등 기독교 본래의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경시되었다. 물질적 풍요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축복 지향적 신앙 형태가 이 시기를 풍미하여 기독교가 기복 신앙으로 심하게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289쪽

저자는 먼저 개혁해야 할 교회 내부 문제는 외면하고 외부로부터 교회 정체성이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과잉 주체화에 빠진 한국 교회가 중세 말기의 가톨릭과 닮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더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건축에 매달리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은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팔았던 교황 레오 10세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종교적 헌신을 성공과 성장의 보증수표라고 선전하며, 하나님을 이용해서 공포를 파는 종교 사업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왔다. 그들을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모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특별하게 '개혁된'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개혁된 때를 기억하며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질 때 의미를 갖는다. 또한, 개혁자들의 모토는 개인이든 교회든 본질상 늘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개혁신학자였던 칼뱅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개혁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장차 궁극적인 한 때가 오기 전까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요구 앞에 겸허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개신교가 종교개혁이란 자신들의 기원을 상기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살려 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개신교 자체에 내장된 개혁의 본능을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와 연관되어 있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개신교의 개신교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은 개신교 자체의 정체성에도 부합하고, 한국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바람직한 존재 방식으로 찾는 일과 직결된다. 역사 앞에, 하나님 앞에 늘 갱신되기를 기대한다." -391쪽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은 16세기 유럽부터 21세기 한국까지 교회의 타락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개혁을 말하는데, '종교'라는 단어가 자꾸 거슬린다. 참 오만한 말이다. 비서구인의 눈으로 보기에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는 세상엔 단 하나의 종교만 있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을 때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 당대 유일한 종교 권력이었던 가톨릭교회였다는 점에서 유럽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500년이 지난 비서구권에서조차 종교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냥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과 사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교회개혁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더욱이 한국교회 모습까지 진단하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다.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 - 16세기 유럽부터 21세기 한국까지

라은성 외 지음, 을유문화사(2017)


태그:#종교개혁, #명성교회, #칼뱅, #세습,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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