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주말, 오랜만에 다시 일본 후쿠오카를 찾았다. 저렴한 숙소를 찾다 보면 번화가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에 머물게 되는데, 매번 숙소에서 텐진의 번화가로 가는 길에 화려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식 장식으로 한껏 붉게 번쩍이는 이곳의 이름은 '하카타 좌', 다양한 공연들이 벌어지는 극장이다.

일본어도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가뜩이나 짧은 일정인데 공연장에서 몇 시간이나 보내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매번 지나쳤었는데, 이번에는 한 번 '도전'을 외쳐본다. <부부 만재>라는 연극인데 과연 세 시간이나 되는 공연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 극장
 일본 극장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공연은 오후 4시였다. 온종일 뭐가 그리 바빴는지 아직 한 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터라, 하카타 좌 옆의 이치란 본점에서 '원조 후쿠오카 라면' 한 그릇을 급하게 비웠다. 공연이 끝나려면 한참이 남았으니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공연 시작까지 30분 남았기에 미리 예매해 둔 티켓을 찾고, 공연장에 들어갔더니... 아, 난장판이다. 귀하게 차려입고 들어가야 할 것만 같던 입구와는 딴판으로, 2층의 홀을 가득 채운 수많은 가판대와 무언가를 잔뜩 사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다.

'헉. 이 난장판은 다 뭐지?'

극장의 근사한 외관에 압도된 여행자는, 턱시도는 입지 못했을망정 청바지는 입지 말자며 챙겨 입고 나왔는데, 발을 내딛자마자 마주친 공연장 입구의 시끌벅적함이 놀랍기만 하다. '하카타 좌'의 표식이 찍힌 수많은 기념품들, 달달한 후식부터 다양한 종류의 도시락들까지, 공연장 입구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를 사고 있는 '인파'를 만납니다. 왜 공연장 안에서 이렇게나 많은 종류의 '하카타 좌'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 걸까요? 게다가, 저 맛있어 보이는 빵들과 도시락은, 정체가 뭐죠?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를 사고 있는 '인파'를 만납니다. 왜 공연장 안에서 이렇게나 많은 종류의 '하카타 좌'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 걸까요? 게다가, 저 맛있어 보이는 빵들과 도시락은, 정체가 뭐죠?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아니, 공연장에 들어가는 길인데 왜 다들 정신없이 뭘 사는 거야?'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공연 안내 책자 하나만 챙겨서 자리를 잡는다. 일본의 부부 만담가의 인생에 대한 '수다스러운' 코미디가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졸지 않고 무사히 중간 휴식시간을 맞이했다.

"중간 휴식은 30분입니다."


안내방송과 함께 갑자기 사람들이 소란스럽다. 화장실에 가는 거겠지 하고 있었는데, 3층에서 내려다본 1층 객석이 장관이다. 모두가 자리에서 도시락이나 먹을 것들을 꺼내놓고 휴식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공연 직전에 먹었던 라면이 아직 그득했지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일어섰다. 마음이 급해져서 입구의 장터로 뛰어 내려갔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 상점들이 열려있다. 참깨가 줄을 맞춰서 공연장의 매듭 모양으로 그려진 단팥빵을 하나 골라 들고, 같은 형태의 매듭이 그려진 차도 한 병 챙겨서 자리로 올라갔다.

좌석이 3층이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두가 무릎 위에 근사해 보이는 도시락을 펼쳐놓고 맛있게 먹고 있었어요. 갑자기 배가 고파졌는데, 도시락이 아직 남았을까요?
 좌석이 3층이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두가 무릎 위에 근사해 보이는 도시락을 펼쳐놓고 맛있게 먹고 있었어요. 갑자기 배가 고파졌는데, 도시락이 아직 남았을까요?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근사한 공연장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우리네 공연장에서 무언가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안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물도 가져가지 못하게 했던 경험도 떠오르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런던 여행에서 들렀던 프롬 공연장이 떠오른다. <BBC 프롬>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음악 축제는, 여름마다 한 달 동안이나 '로열' 앨버트 홀에서 벌어지는 '클래식' 공연이다. '로열 (왕립)'과 '클래식 (고전 음악)'이라는 단어에 짓눌린 여행자는 한국에서도 입지 않던 원피스를 챙겨 넣었는데, 근사한 공연장의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고 나서야 실수를 알아챘다.

공연장의 바닥에는, 사이클을 타다가 자전거까지 끌고 들어온 사람이 누워있기도 하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유로운 차림과 저마다의 자세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피스에 구두까지 챙겨 입은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들은 편안한 자세로 편안하게 '같이' 공연을 즐겼으며, 엄숙함이 아닌 '동참'으로 공연을 풍부하게 했다. 이런 '신나는' 클래식 공연장이라니,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로열 알버트 홀에서 클래식 축제가 열려요. 한 달동안 이어지는 다양한 공연은 그들의 일상과 매우 가까운 느낌이예요. 몇 년 전 만난 공연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공연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해마다 여름이면, 로열 알버트 홀에서 클래식 축제가 열려요. 한 달동안 이어지는 다양한 공연은 그들의 일상과 매우 가까운 느낌이예요. 몇 년 전 만난 공연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공연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여행지에서 만나는 장면들에 놀랄 때가 많다. 그동안 '당연하다' 느꼈던 것들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에서 특히 그렇다. 문화적인 차이야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은연중 강요받았던 '엄숙함'이 벗겨지는 순간을 맞이하면 억울할 때가 있다. 괜한 겉모습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국립 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의 곳곳에서는 바닥에 주저앉은 한 무리의 아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어른들은 호기심 가득한 그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며 미술 그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벌써 몇 년이나 마녀 엘파바가 날아다녔을 것 같은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위키드> 전용 극장에서도, 중간 휴식 시간이 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이스크림?'을 외치는 청년들이 통로를 활보한다. 우리들의 공연장에서 이런 '자유로움'을 찾아볼 수 있는가?

런던 중심에 있는 국립 미술관에서 만난 장면이예요. 학교의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그 시대의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도 직접 보여주고 있었어요! 아, 근사하지 않아요?
 런던 중심에 있는 국립 미술관에서 만난 장면이예요. 학교의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그 시대의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도 직접 보여주고 있었어요! 아, 근사하지 않아요?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대학교 입시를 마치고 맞게 된 자유시간 동안, 학교에서는 시청각실에서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하루는 <아마데우스>(1984)가 상영하기에 들어갔다가 첫 장면부터 깜짝 놀랐다. 분명히 '모차르트'라는 클래식 거장이 작곡한 오페라 공연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껏 멋을 낸 귀족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야유와 함성을 자연스럽게 던지면서 공연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나에게 모차르트란, 클래식이란 반짝이는 명패를 달고, '품위'와 '예절'을 엄격하게 요구하던 영역인데 말이다.

'그 당시의 빈에서 오페라라는 건, 그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음악 콘서트였을까?'

옆 동네 후쿠오카의 하카타 좌에서 시작된 상념이 18세기 빈의 모차르트에까지 번졌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이다. 내가 그동안 매달렸던 '예의'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 말이다.

<햄릿>이 공연되는 극장에서는 한없이 근엄해야 할 것 같고,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간 뮤지컬 극장이니 물도 마시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물론 쉬는 시간, 공연장 밖에서는 먹을 수 있지만). 아무리 들어도 생소한 클래식은 언제 손뼉을 쳐야 하는지 몰라서 잔뜩 긴장한 채, 공연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옆 사람의 박수 타이밍을 훔쳐 오느라 눈치 보는 데 더 집중했었다. 억울하다. 왜 그런데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즐기지를 못했을까?

극장에서 파는 단팥빵
 극장에서 파는 단팥빵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여전히 '예의'와 '체면'의 경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경계를 '제대로' 모르기에 앞으로도 계속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봐야 할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 볼 생각이다.

좋으면 좋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부끄러운 것은 아니니까. 괜히 '예의'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그 순간을 즐겨야 하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억울하기도 하고. 그리고, 다음에 하카타 좌를 찾을 땐 꼭 '제일 맛있는' 도시락을 사야겠다. 속이 꽉 찬 단팥빵으로 채우지 못한 2%는, 그 날을 위해 남겨둔 것이니까!

덧붙이는 말 : 이걸 써놓고 다듬는 동안, 포항에 강진이 발생했다. 당장, '내일'이 불확실한 현실에 부딪히고 나니, 더욱 더 쓸데없는 것들에 '낭비되는 에너지'가 아깝기만 하다. 지금부터의 삶은 분명히 '어제'와는 달라야 할 테니, 솔직하게 '지금'을 즐겨보는 게 어떨까?


태그:#일상 비틀기, #하카타 좌, #부부만세, #로열 알버트홀, #내셔널 갤러리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