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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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지방 출신의 30대 여성이 서울에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여성혐오와 불합리 등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라 남동생에게 밀려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남세희(이민기)와 계약결혼을 하게 된 윤지호(정소민), 가부장이 없는 가정에서 남성중심적인 사회로 나와 비혼주의를 내걸고 생존투쟁을 벌이는 우수지(이솜), 옥탑방에서 현모양처를 꿈꾸면서 남자친구인 심원석(김민석)이 자수성가형 CEO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양호랑(김가은). 평범한 이들의 삶을 대표하는 세 주인공의 삶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탓에 SNS상에선 이 드라마를 '페미니즘 드라마', '착한 드라마'라고 평하고 있다. 시청률도 나쁘지 않다.

이성애자, 유성애자 여성을 위한 맞춤형 로맨스, 그 외의 여성은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정의하는 여성과 약자는 지극히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여성은 이성애자, '유성애자'(무성애자의 반대말-편집자 주)이면서 생물학적으로도 여성인 존재뿐이다. 이성애-유성애 로맨스를 표방하는 드라마에서 동성애자 혹은 무성애자의 존재는 지워지기 일쑤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젠더퀴어나 트랜스젠더 여성의 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 사회는 트랜스젠더 여성 혹은 젠더퀴어에 대한 합의는커녕 성 소수자에 대한 인식조차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약자로서 여성의 여러 특성이 교차되는 지점을 잘 반영하고 있기에 더욱 아쉬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지방 출신, 다양한 분야에서 감정노동,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하고 있는 30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이 드라마가 주목받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드라마에서 레즈비언 혹은 양성애자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 젠더퀴어 캐릭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어떤 이는 여성으로 어떤 이는 성 소수자, 약자로서 여성과 고민을 공유하는 존재로서 등장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무성애자가 '목석'이라는 사회적 편견, 더욱 조장해서야

 이번 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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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무성애자 단체인 AAW(Asexaul Awareness Week)는 10월 22일부터 10월 28일을 '무성애 가시화 주간'으로 지정했다. 무성애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주간은 2016년부터 시작해 올해 두 번째로 공표됐다.

지난 10월 23일 방송된 <이번 생은 처음이라> 5화에서는 초반부터 동성애자, 무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장면이 등장했다. 주인공 남세희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연애에도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직장동료들과 상사인 마상구(박병은)이 남세희의 성적 지향성을 두고 5만 원짜리 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남세희가 무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한 마상구는 남세희가 윤지호와 결혼하겠다고 말하자 "웃기지 마! 네가 어떻게 결혼을 해! 무성애자인 놈이 어떻게 결혼을 하냐고"라고 응수한다. 이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는 대사로 보일 여지가 있다.

사교적이지 않은 개인의 성격을 성 소수자의 특성으로 치부해, 타인의 성적 지향성을 멋대로 추측하고 유희거리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 감정을 그대로 반영한 예다. 이성간의 연애에 관심이 없는 남자를 게이로 오해하는 '혐오의 클리셰'는 이미 여러 번 지적됐다. 그러나 동성애자에 비해 늦게 알려진 '무성애자'는 그 개념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이 단어에 대한 이성애중심적인 해석 때문에 남세희처럼 비사교적이고 이성 연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비하하는 언어로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무성애자'는 상대에게 성적 끌림, 로맨틱 끌림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성 소수자다. 그러나 성 기능이나 사회적 관계 형성에는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는다. 로맨틱 끌림이 없는 무성애자도 타인과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다. 설사 마상구와 직장동료들이 성 소수자에 대해 무지한 캐릭터라는 설정이었더라도 편견을 더욱 조장하는 대사였다. 극중 남세희가 '무성애자'인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캐릭터 상 그렇게 보일 여지는 충분하다. 작가가 무성애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서술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걸크러시' '비혼주의'... 우수지가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얼의 꿈을 꿔야 하는 이유

 이번 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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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사전은 '걸크러시(Girl crush)'를 여성이 동성(同姓)에게 느끼는, 성적인 감정이 수반되지 않은 강한 호감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에서는 걸크러시의 용례가 더 넓어져,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거나 강한 능력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걸크러시'라고 자주 부른다. 웹 매거진 <아이즈>는 걸크러시를 '남성에게는 인기가 없을 것처럼 보이거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쁘지 않은 여성 연예인을 가리키는 말처럼 활용된다'(2016년 3월 10일 <아이즈> 걸크러쉬가 뭐길래)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우수지(이솜)도 잘못된 걸크러시의 용례 중 하나가 아닐까.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부터 '걸크러시', '공격적 비혼주의자'로 정의된 수지는 이름과 다르게 걸걸한 목소리, 순댓국을 좋아하는 털털한 성격에 대형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특이한' 여자로 설정되어 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수지는 브래지어를 귀찮아하고, 수지타산에 맞는 연애를 추구하고, 하고 싶은 말은 가리지 않고 하는 멋진 여자다. 배우 이솜의 신체적 특성과 결합되면서 흔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은 더욱 강조된다. 마상구와의 계약 연애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사이다' 같은 언행을 계속 보여주는 수지에게 감탄하지 않을 여성 시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걸크러시'라는 단어는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동성애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위험성이 있다. 국내외 많은 성 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꾸준히 지적해 온 문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우수지 캐릭터를 다루는 모습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작중에서 가장 털털하고 적극적인 우수지는 현실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 중 한 명이지만,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이솜의 큰 키와 수려한 외모, '바이크를 탄다'는 드문 취향으로 희귀하고 멋진 여성 캐릭터로서 자리매김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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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지가 남자와의 연애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성 시청자들이 안전하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로 남았다.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모습은 우수지를 통해 이미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레즈비언 혹은 양성애자라는 특성으로 새로운 여성 이미지를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드라마는 굳이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성애자이자 유성애자, 생물학적 여성을 위한 생활밀착형 판타지로 남는 길을 택했다. '걸크러시'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캐릭터 메이킹에 전혀 새로움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특히 tvN 드라마 <굿 와이프>의 '김단'이 보여주었던 성 소수자 여성 이미지를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방영 시기는 '성소수자의 가시화 주간'과 겹친다. 13일부터 오는 20일까지는 혐오범죄에 희생된 트랜스젠더에 대한 추모 기간이다. 지난 10월 22일부터 28일은 무성애자 가시화 기간이었다. 물론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여성혐오적인 사회구조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드라마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종, 섹슈얼리티, 계급, 국적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범주가 존재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세 주인공들은 물론, 시청자들도 다양한 범주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성과 약자의 다양성에 대한 심도깊은 성찰이 반영된다면 더욱 좋은 드라마로 끝맺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생은 처음이라 페미니즘 성소수자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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