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있었고,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기자 말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음식이 있다. 내가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갔던 일이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계곡에 자리를 잡고 카레를 만들던 중 넘어져 이마를 크게 다쳤다. 출혈이 심해 내 얼굴 전체가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때 옆에서 끓고 있던 카레의 향과 피비린내가 섞여 나는 한동안 카레를 먹지 못했었다.

그날 전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내가 커피에 집착하는 이유

구청에서 마련해 준 작은 조사실은 원래 있던 사무실을 간이 칸막이로 막은 임시공간이라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한쪽에는 어느 행사에서 썼을 현수막과 행사용품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조립식 패널로 막은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고, 책상 하나와 의자 3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누가 봐도 여기는 절대 편안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극단적으로 표현해놓은 공간이었다.

"진짜 너무 하네. 적극적으로 조사에 협조하려고 했던 사람도 여기 들어오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게 꾸며 놓았네."

함께 간 배 조사관이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느냐며 언짢아 하다가 담당공무원을 찾아가 다른 공간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문을 나섰다.

나 역시 좀 언짢았으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고 온 가방에서 노트북과 오늘 조사에서 참고할 서류를 꺼냈다. 이 공간에서 만날 사람은 일명 '오송회 사건'을 담당했던 전 전라북도 대공분실 수사관이었다.

1981년 전라북도 군산의 한 고등학교의 교사들이 80년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듣고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자며 학교 뒷산에 올라가 막걸리로 술을 붓고 묵념을 지낸 일이 있었다. 한 학생의 신고로 이곳에 모였던 선생님들은 대공분실로 연행되었고,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막걸리를 부었던 것은 북한을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하고 반국가단체를 조직한 일로 둔갑되었다. 이들 단체 이름이 바로 '오송회'. 다섯 명의 교사가 소나무밭에서 만든 조직이라는 뜻이었다.

1982년12월8일자 경향신문기사 군산제일고 교사들이 불온서클을 구성한 것이 적발되었다는 기사. 본래 9명의 교사가 입건되었다.
▲ 1982년12월8일자 경향신문기사 군산제일고 교사들이 불온서클을 구성한 것이 적발되었다는 기사. 본래 9명의 교사가 입건되었다.
ⓒ 변상철

관련사진보기


잠시 후 돌아온 배 조사관은 준비된 조사실이 여기밖에 없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할 수 없지. 놔둬. 조사할 때 우리가 조금 더 신경 쓰는 수밖에... 고생 좀 하자."

물과 사탕, 초콜릿 등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도...

"커피에 왜 그렇게 집착해?"
"수사 자료는 없어도 커피 없으면 조사를 못해."
"그래도 하루에 열 잔도 넘게 마시면 심장이 버텨내지 못할 걸?"
"그나마 설탕이나 크림을 넣지 않으니 다행이지. 걱정해줘서 고마워."

처음 조사관 생활을 한 이래 처음 대공수사관을 조사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대공수사관에게 대공수사의 허점을 캐물어야 한다는 것에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밤샘 잠 못 자며 머릿속으로 수십 번도 더 조사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조사를 하던 당일 날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10시간가량 조사하는 동안 커피를 10여잔 가량을 마셨다. 그날 이후 조사를 앞두고 난 늘 넉넉히 커피를 준비한다. 믹스커피부터 에스프레소까지 커피라면 무엇이라도 있어야 했다.

이때 노구의 건장한 한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우리가 기다리던 그 수사관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준비해둔 자리로 안내한 뒤 서로 인사를 했다.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사실 오늘 조사하려는 이 남자는 이미 여러 차례 출석통보를 했지만 모두 다 거절한 상태였다. 결국 동행명령장이라는 강제구인장 비슷한 것을 발부하고 나서야 이렇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본인이 사는 거주지로 우리가 찾아와서야 겨우 나온 것이다. 그러니 이 남자를 바라보는 우리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수십 년 지난 일인데 뭘 조사한다고. 기억도 없고 나이가 들어서 기억나는 것도 없으니 빨리 끝냅시다."

앉자마자 우리한테 내뱉는 소리하고는....

남자에게 건넨 서류 하나

이곳에 온 모든 전직 수사관들이 하는 이야기다. 기억 없는 과거,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그래서 빨리 이 시간을 흘려버리고 싶은 사람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지만 여러 번 들어도 전혀 면역되지 않고 동의되지 않는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분노 지수는 하늘을 찌른다.

남자의 바람과는 다르게 늘 그렇듯 조사는 오래 진행되었다. 피해자들의 주장대로 고문 가혹행위, 범죄사실을 허위로 조작했는지를 물었지만 역시 모두 부인할 뿐이었다. 그렇게 수 시간이 흘렀다. 떳떳하지 못한 과거의 환부를 스스로 도려내면 좋을 것을 또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왜 이들은 이토록 비겁하고 나약할까. 이런 사람들이 안보와 국가를 운운하는 것이 더욱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의 칼을 빼어들 차례였다. 스스로 부끄러운 범죄를 도려내지 못하니 자백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줄 시간인 것이다.

"오송회를 만든 것이 교사 5명이 소나무 밭에서 맹세를 하고 난 뒤 붙인 이름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교사들 스스로 그런 이름을 만들었다고 자백한 것이라고 하셨죠?"
"아, 그렇다니까. 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만들어. 간첩들이 말 안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아. 참 답답하네. 이 양반들."

우리가 '이 양반들'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상대방에게 얕보이고 있다. 이런 젠장!

"조직 당시 5명이 있었다는 건데, 그럼 이걸 좀 보시죠?"

남자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하면서 수사관은 천천히 서류를 훑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당시 교사들의 수업시간표였다. 당시 수업시간표에 따르면 조직을 맹세했다는 그날 5명 중 3명의 교과목 수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업의 출석확인도 서명되어 있었다. 소나무 밭에 있어야 할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하고 있었으니 이들의 알리바이는 깨진 것이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고문하고 조작했는지, 어느 선까지 이 조작에 가담했는지를 확인하면서 이 사건의 조사는 마무리 되었다. 들어올 때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비겁한 남자의 뒷모습만 우리에게 보였다.

서류를 정리하고 청사를 나서는데...
배고프다...

청사 밖을 나서니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이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이 사건 피해자였다.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예, 아직 식사도 못하셨죠? 저랑 식사하러 가시죠. 전주 오셨으니 비빔밥 드셔야죠?"

그리고 보니 7시간 가까이 밥도 먹지 못하고 이러고 있다.

"예,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주비빔밥 기대되네요."

10시간 만에 먹은 비빔밥

말은 이렇게 하면서 따라 나섰지만 사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픔을 가진 사람의 상처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어찌 맘 편하랴. 조사관 일을 시작한 이래 피해자와 있는 시간은 늘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이들은 우리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들어주고 살펴준다는 고마움 때문에 밥 한끼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내 준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데 어찌 매몰차게 거절하겠는가.

택시를 타고 잠시 이동하니 곧 가려던 밥집이 나왔다. '가족회관'이란 간판의 식당이었다.

가정회관 상차림 가정회관에서의 상차림, 상 가운데 올라온 계란찜
▲ 가정회관 상차림 가정회관에서의 상차림, 상 가운데 올라온 계란찜
ⓒ 변상철

관련사진보기


예전부터 동네마다 ○○회관이란 이름의 식당들이 꽤 있었다. 보통 그런 간판의 식당들은 고기를 구워먹거나 설렁탕, 갈비탕 등을 파는 그런 식당들이었다. 그래서 가족회관에 들어가는 내내 이 집이 비빔밥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일까 하는 의심 아닌 의심이 계속 들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런 의심은 싹 사라졌다.

식당 안에서 나의 시선을 압도했던 건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가지런히 쌓여져 있는 거대한 놋그릇 더미였다. 황금 색 산처럼 쌓아 올려진 그 놋그릇은 이곳에서 손님들에게 무엇을 내놓을지 극명히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메뉴는 비빔밥 그리고 모주.

뜨거운 뚝배기에 담겨 지글지글 하는 소리와 함께 비벼먹는 비빔밥을 주로 먹던 나는 이날 차가운 놋그릇에 나오는 비빔밥을 먹었다.

"비빔밥은 원래 찬 놋그릇에 비벼먹어야 맛있죠."

그분은 우리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밥을 시켰다. 뭐, 이곳에 사시는 분이 시키셨으니 어련히 잘 시키셨을까 하는 마음에 믿고 기다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밑반찬 몇 개가 나왔는데 그 중 계란찜이 눈에 들어왔다.

상 가운데 뚝배기에 담겨진 계란찜이 놓여졌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계란찜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계란찜이 살아있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계란찜이 부풀어 오르면서 쉼을 쉬듯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부풀어 오른 높이가 딱 그릇 크기의 절반까지였다. 처음 가져왔을 때보다 계란찜의 크기가 2배가 된 것이다.

계란찜을 보고 있는데 비빔밥이 나왔다. 놋그릇에 가지런히 놓인 밥과 야채는 정갈하지만 화려했다.

"가능하면 젓가락으로 비비세요. 숟가락으로 비비면 밥이랑 야채가 으깨져서 맛이 없다고 하네요."

알려준 대로 젓가락으로 비벼보는데 맘처럼 쉽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겨우 밥을 비벼 드디어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짜지 않은데 간은 풍성하고 달지 않았다. 야채는 무르지 않아 씹힐 때마다 각각의 식감이 살아있었다. 그렇지만 함께 씹히는 밥과 이질적이지 않고 잘 섞이는 조화로운 맛이었다. 역시 전주는 비빔밥!

절반쯤 비웠을 때 언제 주문하셨는지 모주가 나왔다. 알콜은 거의 없으나 몸을 데워 주는 모주가 한 모금 들어갔다. 계피향과 술찌끼의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몸이 적당히 기분 좋은 상태의 체온으로 올랐다.

"제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을 때 물고문을 여러 차례 당했어요. 그 뒤로는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면 얼굴에 수건을 씌워서 면도해주는데... 면도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아요. 그리고 음식도 국물이 들어간 음식은 못 먹겠더라구요."

수건이 씌운 얼굴에 물이 쏟아지는 경험, 욕조에 얼굴을 처박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일상의 박탈.

비빔밥은 그에게 특별한 음식이었다. 맛있는 음식으로서의 비빔밥이 아니라 고통스런 기억을 꺼내지 않기 위한 일상의 투쟁 중 하나인 것이다.

맛있게 식사하고 나오면서 나는 같이 간 조사관에게 "여기 비빔밥 정말 맛있지 않냐?" 하고 물었다. 배 조사관은 쳐다보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10시간 만에 뭐라도 먹으면 맛없는 음식이 어딨어?"

그래, 우린 10시간 만에 비빔밥을 먹은 거였어.

* 오송회 사건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 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을 '오송회(五松會)'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구속했다. 이후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고,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들에게 고문, 가혹행위로 조작되었음을 확인하고 진실규명을 결정하였다. 지난 2008년 11월 25일 광주고등법원은 오송회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관련자들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변상철님은 '지금여기에'(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 사무국장입니다.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지금여기에"라는 단체에서 일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