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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 류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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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裸木)의 계절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는 나목(裸木)의 계절, 삽상한 초겨울 아침이다. 11일 아침, 거실에 비친 초겨울의 따사한 햇살을 즐기고 있는데, 여강(驪江) 건너 여주시 점동 도리마을에 사는 농사꾼 시인 홍일선 아우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주 형님, 이제 여독은 좀 풀리셨나요?"
"네, 아우님 덕분에…."
"오늘 제가 원주로 가도 될까요?"

"좋습니다. 오십시오."
"그럼, 류인호(柳寅瑚. 81. 항일운동원주기념사업회장) 선생과 통화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농부시인 홍일선
 농부시인 홍일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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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홍 시인은 중국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항일유적지 이곳저곳을 나에게 묻기에 졸작 <항일유적답사기>를 한 권 우편으로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는 귀국 후 답사 소감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담시(譚詩)로 쓰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특히 윤동주 시인과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에 대한 행적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윤동주 생가와 그의 무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대로 아는 대로 들려줬다. 그리고 나는 류자명 선생에 대해서는 깊이 모르지만, 그 어른의 손자가 원주에 산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무척 반가워하며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잘 아는 리학효씨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그러자 홍 시인은 곧장 리학효 씨와 통화해 류자명 선생 손자 류인호 씨와 만나기로 했다면서, 기왕이면 셋이서 같이 자리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때 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다녀올 계획이라 귀국 후에 만나자고 약속한 바 있었다.

곧 홍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1시 원주터미널 TV 앞에서 세 사람이 만나자고 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그 순간 원주 귀래에 사는 박명수 화백이 원주 중앙시장 옆 원주문화재단에서 제7회 개인전 '삶과 사유와 예술전'을 연다고 초대받은 생각이 떠올랐다. 거기서 작품을 감상한 다음, 약속장소로 가면 시간이 얼추 맞겠다고 시간 계획을 세운 뒤 채비를 차렸다.

망양정에서 바라본 동해 바다
 망양정에서 바라본 동해 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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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 화첩기행'

무게 때문에 잘 휴대하지 않는 EOS 카메라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휴대폰 셔터를 누르는 것은 나는 어쩐지 사진을 모독하는 느낌이 들었기에 꼭 사진이 필요할 때는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더니 카메라조차 무거울 줄이야.

오전 11시 무렵 원주문화재단 창작스튜디오 전시실에 가자 이른 시간 탓인지 박 화백 혼자 텅 빈 전시실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강원도로 내려온 후 그의 그림을 죽 보아온 즉, 작품을 볼 때마다 노련미랄까 완숙미가 한결 더해졌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관동별곡 화첩기행. 나는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전직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처럼 관동별곡이 입안에서 흥얼거려졌다. 

강호애 병이 깁퍼 듁님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니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박 화백의 작품 '관동별곡 화첩기행'은 원주 간현에서 시작해, 여주 여강을 거쳐 금강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휴전선 아래 고성에 이르러서는 멀리 금강산 남단 낙타봉을 그리고는 더 이상 가지 못한 채, 글 한 편을 썼다.

더는 갈 수 없는 저 북녘 땅
이제는 바다와 철책선이 내 앞을 가로막고
김씨 이씨 박씨 내 형제를
유구한 역사 한 민족을
주적이라고 외치라 한다.

다행히 그는 그 몇 해 전, 금강산이 개방됐을 당시 다녀온 듯 관동팔경 중 총석정만 그리지 못하고 다른 일곱 곳은 모두 다 화폭에 담았다. 나는 울진 망양정까지 그의 작품을 마음의 눈으로 읽은 뒤 원주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류자명 선생 평전들
 류자명 선생 평전들
ⓒ 류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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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우리 세 사람은 오후 1시 정각에 만나 가까운 밥집에서 마음의 점을 찍으며 류인호 선생으로부터 할아버지 류자명(柳子明) 선생의 행적을 들었다.

우근(友槿) 류자명 선생은 충청북도 충주 사람이다. 본명은 류흥식(柳興湜)이지만, 별명 '류자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석주의 소개로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영화 <암살>에도 소개됐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우근은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 1927년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 입달학원에서 강의했고, 1930년 상하이 강만의 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 류기석 등과 함께 '불멸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6년 중국군과 협력해 전시공작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 무정부주의자 훈련소인 민단훈련소의 참모 이우관 등과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하이부를 조직해 친일파 유길명에 대한 처단을 시도했다.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와도 교류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한중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우근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해 중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근은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특히 중국인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만년에는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됐다.

나는 그분이 아나키스트로 독립운동가로만 알아왔는데, 이번 손자와 만남에서 원예 농학자(農學者)로 3천 명의 제자를 길러낸, 중국에서 대단히 이름을 떨친 국보적인 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방 후 1950년 6월 25일 귀국선에 오르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그날 한국전쟁이 발발해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1985년 망명지 후난성 창사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류인호 회장
 류인호 회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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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숱한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의병장 후손을 만났지만 류인호 선생은 다른 어느 후손보다 당당해 보이며 인생에 대해 긍정적 자세였다. 이분 역시 다른 후손처럼 가방 끈은 짧은 데다가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류기용)의 부역 때문에 연좌제로 엄청 힘든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중기 기사로 자신의 역경을 스스로 개척해 온 인물이었다.

최근 충주시에서 다행히 할아버지 생가를 복원한다고 한다(2018년 준공 예정). 뒤늦게나마 고향 땅에 할아버지 행적을 바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고, 웃는 모습이 할아버지 류자명 선생 사진과 흡사했다.

점심 식사 후 세 사람은 다시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온 후 거기서 류인호 선생을 먼저 보낸 뒤 홍 시인과 나는 가까운 찻집에서 이런저런 차담을 나누었다. 자연히 원주에 거주하는 김지하 시인 이야기에서부터 서정주 시인과 미당문학상에 얽힌 여러 문인들 이야기 등을 나누며 "사람의 행적은 그 말년을 봐야 한다"고 탄식하다가 우리는 지조 높은 윤동주, 이육사의 시세계를 더듬었다. 우리 의형제는 절차탁마하면서 서로 하산길을 조심하자고 격려한 다음 거기서 헤어졌다(관련기사 : '병든 수캐' 미당 서정주를 "최고의 민중시인"이라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이즈음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사라졌으며 좋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태그:#류자명, #홍일선, #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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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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