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요즘 한 소비자 협동조합에서 생산단지에 견학 온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작은 협동조합에서 출발하여 조합원들의 힘으로 많은 위기와 고비,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처럼 발전한 모습을 보면서 조합원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일반 견학 온 사람들은 협동조합의 중요성, 건강한 먹을거리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지역과 상생하는 고용 창출과 6차 산업을 성공적으로 만든 사례에 관심 있는 많은 지자체장들이 방문을 하였는데 이들이 남기고간 사인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놓은 것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난 5월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지자체장들의 사인은 정치인들의 사인에 묻혀버렸다. 유명한 정치인들의 사인이 워낙 많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견학 온 사람들은 내 설명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유명 정치인들이 다녀간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앗, 안철수다."
"유승민도 있네."
"어, 내가 좋아하는 심상정도 왔다 갔네."
"우와! 문재인 대통령도 왔다 갔는가보네."


나는 정치인들의 사인이 걸리고 난 이후부터는 지자체장들이 다녀간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견학을 하는 사람들이 내 설명에는 관심이 없다. 유명 정치인들 이름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견학온 사람들한테 한 마디 말로 끝내버린다.

"이것은 정치 과잉입니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정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정치 또는 정치인이 다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힘센 유명 정치인이.

물론 정치를 통해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고 법과 제도만 바꾼다고 다 해결되는 것인가? 자신은 바꾸지 않고, 자신이 속해 있는 작은 집단이 변하지 않고 법과 제도만 바꾸면 나머지는 다 따라서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유명 정치인을 내세우는 마음속에는 자기 과시의 허세는 없는지? 아님 권력에 의존하는 비주체적인 인간형은 아닌지. 그도 아니면 중요한 가치를 지키는 것에는 관심 없고 오직 권력지향적인 발로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가 많다. 그 단적인 사건이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사건이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분신 항거했다.

전태일은 자신을 불태워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한 것이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며" 외쳤던 전태일 정신은 그의 어머니 이소선으로 이어졌다.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노동자와 함께 투쟁하고 절망하고 울고 웃고 승리했다.

전태일 정신은 이렇게 이어져 40여 년 동안 이 땅의 노동운동, 민중운동, 민주화운동 한 가운데서 피어린 투쟁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노동자들이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숱한 고문, 투옥, 회유, 협박 등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전태일 정신과 같은 아름답고 정겹고 또 고결한 가치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태일 정신은 이처럼 엄중함에도 언제부터인가 전태일 정신이 가벼이 여겨지고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 발단은 2007년 대통령선거 무렵부터였다. 모 노동운동 조직이 천박한 자본가 정치세력을 공공연하게 지지했다. 그 조직은 그런 행위가 전태일 정신을 배반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마치 자신들이 전태일 정신의 주체인 양 행세하기도 했다.

전태일 정신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넘어 그 정신을 천박하고 부도덕한 자본가 정치 세력에게 갖다 바칠 위기에 처한 것이 2012년 대선 때이다.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랍시고 전태일과의 만남을 시도했다가 무산되었다.

이처럼 언제부터인가 전태일은 중요한 선거 때만 되면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태일 정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역사적으로 얼마나 엄중한 우리의 유산인지를 모르는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에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노동계를 초청하는 만찬자리에 전태일이 즐겨 먹었다는 콩나물밥을 준비했다는 기사가 자랑 삼아 나왔다. 이는 당면한 노동문제에 대한 진정성 없는 이미지 이벤트에 전태일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태일 정신을 이렇게 가벼이 여겨도 좋은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수정권도 아닌 진보정권에서 좋은 뜻에서 기획한 행사인데 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냐?"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전태일이 있어야 할 자리는 그런 높은 곳이 아니라 지금도 찬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는 노동자들한테 있다 그들한테 따뜻한 콩나물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는가? 

선거 때만 되면 전태일 정신이 몸살을 앓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전태일 정신은 정치권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우리 민중의 드높은 이상이요 가치임을 알아야 한다. 전태일의 유명세를 이용한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전태일 정신은 그렇게 천박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순결한 이상향이다.

전태일 정신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전태일 정신은 엄중하다.


태그:#전태일, #이소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