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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한양대 특훈교수는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체제의 철폐를, 2016년 촛불혁명은 박정희체제의 정치 유산을 계승한 박근혜정권에 대한 적폐청산을 요구한 것으로 역사적 동질성을 갖는다"고 했다.

김 교수는 10일 부산 민주시민교육원에서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마산)이 공동으로 마련한 '부마민주항쟁 3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밝혔다.

김재홍 교수는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 부마항쟁과 2016년 촛불의 역사적 동질성'에 대해 발제했다.

그는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통치 18년 전체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사회문화적 불만이 누적돼 대학생층이나 재야 민주화 세력뿐 아니라 일반 시민 다수가 가세한 가운데 분출된 민중봉기 성격이었다. 유신체제 아래 첫 민중봉기였다"고 했다.

그는 "2016 촛불혁명은 박정희정권의 직접적 후계자인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 파면하고 적폐청산을 이끌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박정희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는 결과를 성취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그래서 부마항쟁과 2016년 촛불은 박정희체제의 청산이라는 연결고리로 역사적 동질성을 갖는다"며 "38년 이상의 시간을 넘어 동일한 목표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라 했다.

부마항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그는 "박정희 정권의 김영삼 의원에 대한 국회 제명이 도화선으로 작용했고 발발 후의 전개 양상을 보면 내연해 온 사회경제적 불만에 불이 당겨진 것처럼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배경은 박정희정권의 공작정치에 의한 야당 및 언론 탄압이고, 박정희식 군사권위주의적 산업화로 누적돼 온 사회경제적 모순이었다"고 했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에 대해 설명했다. 김 교수는 "부마항쟁은 김영삼 의원 국회제명까지 감행한 박정희 공작정치에 항거했고, 2016촛불도 국가정보원이 하수인 노릇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각 분야 블랙리스트 등 공작정치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 박근혜는 기업으로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내 스포츠 재단 설립이나 최순실의 딸 정유라 지원금으로 쓰도록 한 것이 뇌물 또는 직권남용이 되어 형사재판을 받고 있으며, 이렇게 기업의 돈을 동원하는 수법은 박정희 개발독재 때 생긴 정경유착 행태다"고 했다.

또 그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박근혜 정권에서 중용된 많은 고위직 인사가 박정희 정권 출신이거나 그 친인척들이었다"며 "이는 박정희 부녀 정권이 똑같이 가산제 국가(patrimonialism)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한 연결고리였다"고 했다.

김재홍 교수는 "박정희체제의 청산을 요구한 부마항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2016년 촛불혁명과 동질성을 가진다"며 "향후 촛불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박정희체제의 근본적 청산여부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마산 부마항쟁기념사업회는 10일 부산 민주시민교육원에서 "부마민주항쟁 3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마산 부마항쟁기념사업회는 10일 부산 민주시민교육원에서 "부마민주항쟁 3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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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조작, 배후세력과 총기사건 조작"

학술심포지엄은 1부 '박정희 군부독재와 부마민주항쟁', 2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의 쟁점과 과제'로 나눠 진행되었다.

이은진 경남대 교수는 당시 마산 상황에 대해, "시내에서의 시위는 경남대생들이 주도하고, 이들을 뒤따르는 안정적인 공단 노동자는 물론이고, 떠돌이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더욱 격렬"해졌다고 했다.

이 교수는 "시위참여 동기는 대학생 시위로 인한 도덕적 규범의 설정, 물가 상승과 불황에 따른 경제적 고통, 어둠이 주는 익명성, 술이 주는 대담함, 비가 가져다 주는 비극적인 분위기"라고 주장하였다.

지주형 경남대 교수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미 정부는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을 승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개선에 대한 압박을 취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미국에 대해, 지 교수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막기보다는 그것을 방치하였다"며 "부마항쟁에는 박정희 정권을 승인한 미국 지배 국제질서에 대한 저항이라는 성격도 있었다"고 했다.

이병규 동명대 교수는 "부마민주항쟁은 결국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는 단초가 되었으며, 이후 5·18광주민주항쟁과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길을 내었다고 할 것"이라며 "부마민주항쟁의 정신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하고, 그리고 이것은 향후 헌법개정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선미 부산대 교수는 부마민주항쟁에서 기존에는 "총기사용과 관련한 조작은 마산에 국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산에서도 총기사용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내기도 했다.

김 교수는 "총기 사건이 먼저 조작된 것은 마산이었다. 10월 18일 밤 10시 마산시 창동 황금당 골목에서 시위 참가자가 사용한 사제총기를 수거했다고 발표되었다"며 "그런데 문제의 총기는 길이 15센티 남짓에 두께 1.15센티의 원통형으로, 볼펜 정도의 크기에, 조잡하기 짝이 없는 '딱총 수준'이었다. 기자회견장의 기자들 사이로 조소가 흘렀다. 이후 총기 사건과 관련한 수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부산에서도 총기사건이 조작되었다. 당시 황선용의 동생이 총포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동생으로부터 해당 총포사의 총을 건네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증거는 없고 허위자백으로만 사건이 구성되었다"고 덧붙였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은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부마항쟁이 확산되어 1960년 4·19의 이승만 퇴진과 비슷하게 박정희를 퇴진시켰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며 "그런 면에서 친미파 김재규가 부마항쟁을 혁명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개량화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4·26 이승만 퇴진강권으로 4·19혁명을 개량화시킨 미국의 공작과 비견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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