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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사는 제주에 장모님이 내려와 계신다. 운동을 조금씩 하시는 게 좋은데 잘 움직이려 하지 않으신다. 억새가 엄청 좋으니 따라비오름에 가자고 권해본다. "산에 올라가는 건 아니지?" 몇 번이나 산꼭대기에는 올라가지 않기로 다짐을 한다. 80이 넘었으니 산에 오르는 건 무리인가 보다. "그냥 억새만 구경하고 올 겁니다."라 약속하고 따라비 오름에 갔다.

억새가 하얗게 피었다. 넓은 산자락을 다 차지했다. 뭐가 볼 게 있는지 높이 자라 머리를 내밀고 쳐다보고 있다. 바다를 보고 싶나 보다. 바다를 볼려면 이 아래에서는 안 되고 오름 위로 올라가면 될 텐데....

제주 표선 따라비 오름 아래쪽에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 따라비 오름의 억새꽃 제주 표선 따라비 오름 아래쪽에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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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로 올라가지 않는 조건으로 오른쪽 산자락 길을 돌기로 한다. 자세히 보니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있다. 자주쓴풀이 옹기종기 햇볕바라기를 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자주색 꽃이다. 내복까지 껴입은 장모님이 겉옷을 벗으신다. 산에 오면서 가방은 왜 매고 오셨는지...내가 받아 든다.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자고 조른다.

제주의 오름에 요즘 많이 피어있는 꽃. 자주색의 자태가 아름다운 꽃이다.
▲ 자주쓴풀 제주의 오름에 요즘 많이 피어있는 꽃. 자주색의 자태가 아름다운 꽃이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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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몇 송이가 올망졸망 피어있다. 역시 자주색이다. 약간 색이 옅긴 해도 자주색이다. 가만히 보니 자주색 꽃이 많다. 왜 가을꽃은 자주색이 많을까? 반면 봄에는 노랑꽃이 많은데.... 궁금증이 해결될 가능성이 없을 땐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게 상수다.

여름에 많이 피는데, 가을 쑥부쟁이는 자주색을 띠고 있다.
▲ 쑥부쟁이 여름에 많이 피는데, 가을 쑥부쟁이는 자주색을 띠고 있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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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유가 다닥다닥 피었다. 제주 가을꽃의 대명사라 해도 손색이 없다. 내 생각엔 성읍 영주산 꽃향유가 가장 아름답다. 꽃이 머리를 까딱 들고 해를 바라보고 있다. 남쪽 면에만 꽃이 빼꼭히 붙어있다.

생각보다 장모님이 잘 걸으신다. 산정기가 느껴지시나 보다. 지팡이만 있으면 저 위에도 올라가겠는데 라 하시며 앞서 걸으신다. 어라! 살짝 꼭대기 올라가실 생각이 있다는 뜻 같다.

제주에 피는 가을꽃의 대표적인 존재다. 꽃잎이 해를 바라보고 있다. 해바라기다.
▲ 꽃향유 제주에 피는 가을꽃의 대표적인 존재다. 꽃잎이 해를 바라보고 있다. 해바라기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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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잔대가 가는 허리로 살랑거리고 있다. 자주색 초롱을 달고 하늘하늘 바람 따라 살랑거린다. 이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흰 꽃술대가 초롱 안에 든 촛불 같다. 짙은 향기가 날 것 같다. 향기가 피어오른다면 어떤 향기일까? 그야 말할 것도 없이 자주향이지. 자주향이 있던가?  따라비 오름을 가을에 올라와 보면 무조건 자주향이 있게 되는 거다. 그러나 섬잔대는 독초다. 그냥 잔대는 무미의 맛이 있지만, 섬잔대는 먹으면 큰일 난다.

제주에 가을에 많이 피는 아름다운 초롱모양꽃이다. 섬잔대는 독이 있어 먹으면 큰일난다.
▲ 섬잔대 제주에 가을에 많이 피는 아름다운 초롱모양꽃이다. 섬잔대는 독이 있어 먹으면 큰일난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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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많이 돌아왔다. 세 갈래 길이 나타난다.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 것이다. 입구에서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경사가 완만하다. 이길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거다. "이 길로 올라가면 힘들지 않게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돌아가는 것보다 올라가서 내려가는 게 더 쉬울 걸요" 장모님께 넌지시 권유반 강요반 올라가자고 조른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아 기분이 좋아지신 장모님이 못이긴 척 산길로 올라선다. 길가에 청미래덩굴 열매가 정말 빠알갛게 익었다. 빨간 립스틱 촌스럽게 바른 연속극 여인의 입술 색 같다.

망게라고도 부른다. 초록잎색과 명확히 보색의 빨간색이다.
▲ 청리래덩굴 열매 망게라고도 부른다. 초록잎색과 명확히 보색의 빨간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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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기는 힘들다. 사실 올라가는 쪽에서 보이는 꼭대기는 중간 정도밖에 안 되고 그 중간에서 또 올라간 만큼 더 올라가야 따라비 정상이 나타난다. 장모님을 조금 기만한 셈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가을꽃은 자주색이다. 엉겅퀴조차 짙은 자주색으로 꽃을 마감하려 하고 있다.

가을꽃은 자주색이다 라는 명제가 귀납적으로 오류임을 증명하는 꽃이 나타났다. 노란색 미역취꽃이 그것이다. 대부분 다른 미역취꽃은 졌는데, 11월 초순까지 이렇게 견디는 놈도 있다. 사람도 어려운 때 잘 견디는 사람이 있다. 장모님은 아내와 함께 중간 정상의 벤치에 앉아 쉬신다. 시원한 바람과 앞에 펼쳐지는 따라비오름의 세분화 구와 아름다운 곡선에 기분이 산뜻해지신 거다. 힘들다는 말씀이 없다.

봄에 많이 보이는 노란색 꽃이다. 가을 산을 노랗게 물들이는 대표적인 꽃이다.
▲ 미역취꽃 봄에 많이 보이는 노란색 꽃이다. 가을 산을 노랗게 물들이는 대표적인 꽃이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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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정상 바로 밑에 청아한 흰 꽃이 피어있다. 이번 가을엔 못 보나 했던 물매화다. 그냥 청초롭다. 건강미가 넘치면서 화장을 해도 싱그럽게 한 20대 젊은이들 같다. 물매화가 많기로는 송당의 용눈이오름만 하랴. 이쁘고도 이쁘도다. 풀 속에 빼꼭이 얼굴을 내밀고 오가는 이의 시선을 받고 환히 웃고 있다. 저렇게 살지어다. 누구에게도 저렇게 청초롭고 우아한 미소를 보여주는 삶이 될지어다.

가을 동부지역 오름에 피는 이쁜 꽃이다. 흰색꽃이 억샌 풀들 속에서 귀티나게 자리잡고 있다.
▲ 물매화 가을 동부지역 오름에 피는 이쁜 꽃이다. 흰색꽃이 억샌 풀들 속에서 귀티나게 자리잡고 있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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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비 오름의 능선과 길이 우아한 곡선을 만들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걷는다. 사연들이 다 있을 거다. 자동차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아들을 둔 부모도 있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남친과 함께 손잡고 걷는 남녀도 있을 거다. 제주사는 딸내집에 왔다가 어쩌다가 따라비오름 꼭대기까지 올라와 버린 80대 할머니도 있다. 딸과 함께 걷는 모습이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희한하다.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아내의 걸음걸이가 나이가 들수록 장모님 걸음걸이와 꼭 같아져 버린 것이다.

세개의 분화구가 서로 엉켜 멋있는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표선지역의 대표적인 오름이다.
▲ 따라비오름 세개의 분화구가 서로 엉켜 멋있는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표선지역의 대표적인 오름이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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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비오름은 분화구 셋이 서로 엉켜 있다. 한 분화구 아래에 하얀 꽃이 피었다. 억새일까 갈대일까? 억새와 갈대는 많이 헷갈린다. 물 기까이 있으면 대부분 갈대이고 산에 있으면 대부분 억새다. 거의 비슷한 종이란다. 저 산꼭대기에 있는 흰 꽃은 분명 억새일 거다. 아래 분화구에 있는 것은 잘 모르겠다. 그것 알려고 내려가고 싶지는 않다. 분화구는 비가 오면 약간 물이 고인다. 그러니 갈대가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저러나 갈대면 어떻고 억새면 어떤데?

따라비오름의 능선엔 억새가 피었다. 분화구 안에도 억새일까? 아니면 갈대일까?
▲ 따라비오름의 억새 따라비오름의 능선엔 억새가 피었다. 분화구 안에도 억새일까? 아니면 갈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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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을 억지로 높은 곳까지 올라오시게 했어도 일말의 양심은 있다. 저 놓은 곳은 안내하지 않는다. 사실 저곳에 가야 저 멀리 표선일대가 훤히 보이는데. 분화구 셋 갈라지는 아래까지 내려와서는 제일 낮은 봉우리로 올라간다. 저 멀리 오름들이 이어져 달리고 있다. 사실 오름들은 독립체다. 오름들의 산꼭대기는 저렇게 평평하다. 분화구가 있기 때문이다. 산꼭대기가 육지처럼 뽀족하지 않은 것은 폭발한 화산이기 때문이다.

오름 능선에 철모르는 철쭉이 피었다. 하고 있는 몰상이 약간 어리숙해 보이기도 한다. 봄인 줄 알고 피었더니 가을이었나 보다. 조금 있으면 추울 텐데 어쩔런지... 가까운 앞날이 암울하다. 요즘 취업 준비하고 있는 젊은이들 앞날 같다.

가을에 핀 철쭉꽃이다. 안타깝다. 곧 추울텐데....
▲ 철쭉꽃 가을에 핀 철쭉꽃이다. 안타깝다. 곧 추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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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은 계단길이다. 나무널판자로 길을 잘 만들었다.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아니다. 두 발 중에 한발만 자꾸 내려가고 한발은 평지를 걷게 된다. 어기적거린다. 올라오실 때는 불평 없던 장모님이 약간 보이지 않는 짜증을 내신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다. 올라왔으니 내려가야 하는 건 당연지사이니 말이다. 다 내려오니 또 새로운 꽃이 보인다. 송장풀이다. 끝물이어서 화려함이 사라졌다. 시들기 전 마지막으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저게 바로 사라져가는 존재의 아름다움인가 보다.

시들고 조금 남았다.
▲ 송장풀 시들고 조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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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려오니 또 억새들이 반긴다. 억새 보러 오긴 했어도 가을꽃을 본 게 더 기분 좋다. 장모님이 화장실을 찾으신다. 근데 없다. 전엔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지? 억새는 키가 크다.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사위인 내가 망을 보아드렸을까요 보아드리지 않았을까요?

산 아래 넓은 지역에 억새풀꽃이 하얗게 피었다.
▲ 따라비 오름의 억새 산 아래 넓은 지역에 억새풀꽃이 하얗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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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을 은근슬쩍 모시고 따라비오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왔다. 가까이 있어서 잘 가게 되지 않는 오름인데, 억새 핑계로 가을 자주꽃만 실컷 보았다. 보람찬 하루였다.


태그:#따라비오름,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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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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