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본 기사의 사진은 모두 60mm*70mm 크기의 중형필름으로 촬영 후, 직접 스캔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사이즈 조정 외 다른 보정은 없습니다. 사진 설명 앞의 괄호에 있는 정보는 필름의 명칭입니다. - 기자 말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하다. 그중에 봄과 가을은 기후로 보나 경관으로 보나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여름과 겨울에 비해 빠르게 지나가기에 참 아쉽다. 더구나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그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어느 날 꾀가 생겼다. 이 가을을 길게 보낼 수 있는 묘책 말이다. 늦여름, 강원도 산간지방을 찾아가 남들보다 일찍 가을을 맛보고 점차 위도와 고도를 낮추어가며 떠나가는 가을을 곁에 잡아두는 방법이다. 남들이 들으면 픽 웃어버릴 만큼 단순한 방법이지만,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들뜬 마음으로 강원도 민둥산에서부터 가을 여행을 시작했었다.

(Pro160NS)적상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유산의 능선. 오른쪽 제일 높은 곳이 향적봉이다. 종주는 그 오른편으로 화면을 벗어나 진행한다.
▲ 덕유산 능선 (Pro160NS)적상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유산의 능선. 오른쪽 제일 높은 곳이 향적봉이다. 종주는 그 오른편으로 화면을 벗어나 진행한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무릎 부상 후 수술, 그 뒤 재활의 시간을 가지면서 언제 다시 산을 밟으려나 했다. 꾸준히 자극을 늘려가면서 한계점을 체크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엉뚱한 계기로 무릎이 견뎌 줄 역치값이 꽤나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학여행 때 학생들을 인솔해서 한라산 정상을 찍고 내려온 일이었다. 19Km의 당일 산행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학생 인솔자라는 책임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날 이후 그동안 미뤄왔던 긴 산행을 조금씩 시작했다.

능선이 부드러운 덕유산은 시도해볼 만 했다. 다양한 종주 구간들 중 최고로 인정받는, 육십령에서 출발하여 향적봉을 넘어 내려가는 코스는 아니었어도 총합 22km에 달하는, 종주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경로를 선택했다. 1박 2일로도 소화할 수 있는 길이었지만 2박 3일로 계획을 짰다. 가을의 정수를 보다 천천히 마음에 새기고 싶었고 별 촬영의 기회를 두 번 가져서 실패율을 좀 더 낮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2박 3일간 걸었던 코스.

황점마을에서 시작(16:00) - 삿갓재 대피소(1박) - 무룡산 - 동엽령 - 백암봉 - 중봉 - 향적봉(1박) - 백련사 - 삼공주차창(16:30)

이 기사에서는 황점마을에서 백암봉까지의 여정을 다루고자 한다.

모포를 빌리는 돈이 아까워 침낭을 챙겼고 5끼니 식량, 물, 옷가지 등을 넣은 후 필름 10롤에 바디만 1660g인 카메라 하나와 렌즈 3개를 넣었다. 별 촬영을 위해, 접어도 68cm가 되는 대형 삼각대도 하나 챙겼다. 보통의 짐에서 10kg는 더 얹은 셈이다. 그래도 중간에 있는 대피소 덕에 야영 짐을 넣지 않아도 되어서 평소보다는 나름 가벼운 편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스틱을 샀다.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니 스틱을 사용할 생각 자체를 못 했었는데 이번 산행에서는 꼭 필요할 것 같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스틱은 이번 산행에서 1등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오르막에서 온몸의 힘을 함께 사용하니 내리막에서 사용할 힘이 축적되었고 내리막에서는 다리에 쏠리는 하중이 분산되어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도 무릎이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황점마을에서 삿갓재 대피소로

오후 네시가 되어서야 들머리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만약 아침에 출발할 수 있었다면 육십령에서 시작했거나, 황점마을에서 시작했더라도 월성계곡을 따라 월성재로 올라 삿갓재를 거쳐 대피소로 갔을 것이다. 이날 선택한 코스는 황골계곡을 따라가는 길이었는데 서북 방향으로 올라 처음으로 주 능선을 만나면 바로 그곳에 삿갓재 대피소가 위치해 있다.

짐이 가볍다면 한 시간 반 정도에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코스였다. 오르막도 심하지 않았고 바로 왼쪽으로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어서 피로감을 덜어주었다. 본격적인 갈수기는 아니었지만, 가을비가 내린 지 꽤 된 시점이었는데도 계곡물이 풍성했다.

(Ektar100)갈잎들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 황골계곡(1) (Ektar100)갈잎들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1분간 노출을 주어 물의 흐름을 담았다. 낙엽이 물과 함께 휘돌아 내려갔다.
▲ 황골계곡(2) (Velvia50)1분간 노출을 주어 물의 흐름을 담았다. 낙엽이 물과 함께 휘돌아 내려갔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양손이 자유롭지 못해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두다 보니 좋은 풍경을 만날 때마다 짐을 풀어야 했다.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고 시간이 꽤 흐르게 되었지만 애초에 그런 시간을 고려해서 여정을 짰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 시간을 쉬는 시간으로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여유로웠다.

같이 산행을 준비하고 함께 길을 나선 동행인이 참 편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보통의 등산객과는 달리 나는, 거추장스럽고 투박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느라 생각보다 지체되는 시간이 긴데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함께 경치를 감상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한 번 찍는 데에 드는 시간은 최소 5분에서 길게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Velvia50)바람이었는지 세월이었는지, 고목의 윗부분이 꺾여나갔고 조금 남은 몸뚱이에 작은 생명들이 자라고 있었다.
▲ 황골계곡(3) (Velvia50)바람이었는지 세월이었는지, 고목의 윗부분이 꺾여나갔고 조금 남은 몸뚱이에 작은 생명들이 자라고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숨이 찰 만하면 이정표가 나와서 발걸음을 재촉해주었다. 마지막 500m 정도는 경사가 꽤 있었다. 100m를 남겨놓고는 친절하게도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동안 고르게 쉰 만큼의 숨을 3분 만에 다 몰아쉬게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쯤 삿갓재 대피소가 눈에 들어온다.

가을이 한창인 주말, 대피소는 한가했다. 동엽령을 지나서는 심심찮게 등산객을 마주칠 수 있었지만, 그 전에는 종주 능선을 걷는 내내 사람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설천봉과 향적봉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접근성 때문일 것이다.

이날의 저녁은 가장 근사한 만찬이었다. 식재료를 계속 배낭에 넣어서 다녀야 하기 때문에 다음날부터의 끼니는 소시지와 누룽지, 통조림식의 밑반찬 조금이 전부였으나 첫날의 저녁만큼은 미리 밑간을 해 둔 소고기 스테이크로 포식을 했다. 7시간 정도 상온에서 숙성이 되어 간과 향이 제대로 배어있었다.

(Velvia50)바질, 로즈마리, 소금, 올리브유로 버무려 비닐팩에 꽁꽁 싸 두었던 스테이크 두 덩어리.
▲ 부채살 (Velvia50)바질, 로즈마리, 소금, 올리브유로 버무려 비닐팩에 꽁꽁 싸 두었던 스테이크 두 덩어리.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
▲ 산중만찬 (Velvia50)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밤이 되니 별이 쏟아질 듯 많았다. 휴대용 적도의를 들고 갔다면 은하수를 필름에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낭에 5kg의 무게를 더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점상 사진은 애초에 포기하고 일주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믐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별이 빛났다. 9시부터 12시까지 작은 풍차를 고명으로 하여 별이 지나간 자국을 기록하기 위해 셔터를 열 계획이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산의 일교차가 너무 컸던 탓에 렌즈에 이슬이 계속해서 맺혔기 때문이다. 밑에서는 보통 11월 초순까지는 두세 시간 정도 렌즈를 열어놓는 것이 가능했던 어렴풋한 경험 탓에 핫팩을 챙기지 않고 올라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날의 별 사진은 핸드폰 카메라를 이용해 심심풀이로 담았던 것이 유일하다.

핸드폰 기본 카메라에 셔터스피드와 ISO 등등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ISO1500에 20초 노출로 찍은 사진. 조리개는 고정으로 1.8
▲ 삿갓재대피소에서 핸드폰 기본 카메라에 셔터스피드와 ISO 등등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ISO1500에 20초 노출로 찍은 사진. 조리개는 고정으로 1.8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아침 햇살은 대단히 붉었다. 가을 잎사귀의 갈색빛에 힘입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물을 끓이고 마른 누룽지를 약불에 불려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8개인 줄 알고 가져왔던 소시지가 12개여서 반가웠다. 모든 것이 부족한 산에서는 이렇게 소박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Ektar100)대피소에서는 일출이 시원하게 보이지 않는다. 앞 능선에 가리기 때문. 깔끔하고 장엄한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무룡산으로 떠난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 삿갓재대피소에서 보는 일출 (Ektar100)대피소에서는 일출이 시원하게 보이지 않는다. 앞 능선에 가리기 때문. 깔끔하고 장엄한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무룡산으로 떠난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Ektar100가뜩이나 붉은 산이 햇살로 더 붉어졌다.
▲ 아침햇살 (Ektar100가뜩이나 붉은 산이 햇살로 더 붉어졌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Ektar100)점점 하늘이 파란 빛을 띠고 있다.
▲ 해 뜬지 30분 뒤 (Ektar100)점점 하늘이 파란 빛을 띠고 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시린 아침 공기를 마시고 있다. 바로 위 사진과 비슷한 시각, 같은 방위를 향해 찍었으나 필름이 달라 극명한 색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사진은 포지티브(슬라이드), 바로 전 사진은 네거티브.
▲ 나란히 (Velvia50)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시린 아침 공기를 마시고 있다. 바로 위 사진과 비슷한 시각, 같은 방위를 향해 찍었으나 필름이 달라 극명한 색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사진은 포지티브(슬라이드), 바로 전 사진은 네거티브.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간밤 뒤적여놓은 배낭을 다시 갈무리하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10km의 산길이 기다리고 있었고 처음 가보는 길인지라 어느 정도의 굴곡이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묘한 기대감이 마음을 두드렸다. '덕유'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갈 길이 조금은 편하지 않을까 짐작해보기도 했다.

첫 번째 큰 굴곡은 무룡산이었다. 대피소에서 소요시간은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보통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구간인데 가을 풍경이 자꾸만 뒷덜미를 간지럽혀, 오던 길과 능선 밑을 내려다보며 셔터를 누르다 보니 멈춰있는 시간이 많았다. 출발한 지 20분 만에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40분을 걸은 후 30분 동안 사진을 찍었다. 어차피 등산의 목적이 필름에 덕유산의 깊은 가을을 담아오는 것이었으니 목적 달성을 성실히 한 것과 같다.

(Velvia50)뒤 풍경이 궁금하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대피소를 떠나 처음 뒤로 돌았을 때 들어온 풍경.
▲ 갈색 덕유 (Velvia50)뒤 풍경이 궁금하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대피소를 떠나 처음 뒤로 돌았을 때 들어온 풍경.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온통 갈색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녹색 침엽수가 돋보인다.
▲ 갈색 사이 녹색 (Velvia50)온통 갈색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녹색 침엽수가 돋보인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무룡산 가는 길.
▲ 걸어야 할 길 (Velvia50)무룡산 가는 길.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출발한지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어느덧 떠나온 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를 만큼 먼 곳으로 와 있었다.
▲ 걸어온 길 (Velvia50)출발한지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어느덧 떠나온 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를 만큼 먼 곳으로 와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처음 가는 산행길에서는 눈앞의 봉우리에 깜빡 속는 경우가 자주 있다. 가장 가까운 언덕이 제일 높아 보이는 법이기에 목적지가 바로 그곳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애써서 올라가 보면 마음속에서 옛날 유머 중 한 대사가 떠오른다. '이 산이 아닌개벼~'

무룡산을 오를 때 그랬다. 바로 앞의 봉우리가 무룡산 정상인 줄 알았다. 저 계단만 올라가면 첫 번째 포인트는 정복하는 거라고 동행인과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무룡산 직전의 또 다른 작은 봉우리에 불과했다.

(Velvia50)오전 내내 만난 등산객은 딱 두 명 뿐이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고 동행인과 함께 뒷모습을 담아보았다. 빨간 배낭 옆의 생수가 2리터짜리임으로 미루어 배낭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 뒷모습 (Velvia50)오전 내내 만난 등산객은 딱 두 명 뿐이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고 동행인과 함께 뒷모습을 담아보았다. 빨간 배낭 옆의 생수가 2리터짜리임으로 미루어 배낭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막상 무룡산에 오르니 생각보다 전망이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직전의 헬리포트기점이 일출을 담기에는 더 적절해 보였다. 아무리 잠시 쉬더라도 전망이 좋은 곳에서 쉬어야 피로가 풀리는 법이다. 조금 더 안락하고 흡족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고자 발길을 재촉했다. 동엽령까지 가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계획했는데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부드러운 능선이 다소 심심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주변과 앞뒤를 보면서 감탄하다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10km 정도의 능선길 중 절반이 넘는 구간에서 사방이 탁 트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바람은 시원하지, 하늘은 푸르지, 게다가 가을이라니. 능선을 걷는 내내 행복감이 더해졌다.

(Velvia50)
▲ 걷다가 쉬다가 (Velvia50)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높이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다르다.
▲ 동쪽 방면 (Velvia50)높이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다르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고도로 인해 빨갛고 노란, 화려한 색은 없었지만 덕유산의 나무들은
 녹슨 철같이 투박한 붉음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 동엽령을 향해 (Velvia50)고도로 인해 빨갛고 노란, 화려한 색은 없었지만 덕유산의 나무들은 녹슨 철같이 투박한 붉음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동엽령에 도착했다. 삿갓재 대피소에서 출발한 지 4시간 반 만이었다. 매우 느리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사진을 찍느라 쉬었던 시간이 1시간이 넘었던 것을 계산하면 평균 소요시간인 3시간 20분에서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힘들다 했었다.

점심은 마트에서 사 온 빵 한 꾸러미였다. 작은 깨찰빵 12개. 양도 양이지만 그 식감이 퍽퍽하여 평소라면 한 자리에서 둘이 다 먹기에는 무리인 양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스포이드의 고무를 눌렀다가 놓을 때 주둥이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가 나의 입술에서 나타났다. 다 먹고 나서야 턱이 아픈 줄 알았다.

가을 햇살이 따사로워 졸음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잠시 데크에 등을 깔고 누웠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20분이 지나있었고 동행인은 옆에서 허공을 응시하며 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편안한 시간이었다. 낮은 곳 위에 두고 온 모든 업무과 근심 걱정은 온데 간데없고 입을 열면 언제나 한 웅큼씩 들어오는 시린 공기가 전부였다.

(Velvia50)동엽령의 경치가 수려하지는 않았지만 가을 산의 상징인 억새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 동엽령의 억새 (Velvia50)동엽령의 경치가 수려하지는 않았지만 가을 산의 상징인 억새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Velvia50)3일 내내 이런 하늘이었다. 쉬는 데크에서 위를 올려다본 모습.
▲ 억새와 하늘 (Velvia50)3일 내내 이런 하늘이었다. 쉬는 데크에서 위를 올려다본 모습.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여기서부턴 다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그 경사가 매우 완만했지만 이미 발바닥에 온 피로가 몰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20분에 한 번꼴로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던 것 같다. 이 고생을 왜 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생이 아니니까 하는 겁니다"라고 말이다.

걷는 행위 자체는 힘이 들지만, 그로 인해 얻는 것과 상쇄한다면 그것은 고생이 아니다. 문어 다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턱에 안간힘을 써 가며 그것을 열심히 씹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쉽다. 힘드냐고 물으면 당연히 힘들다고 대답하겠지만 그 물음을 듣기 전, 그 행위는 씹는 어려움이 아니라 먹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산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힘들어 보이고 미련해 보일지 모르지만 정작 산을 직접 밟는 사람에게 등산은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그 힘든 와중에서도 오던 길을 돌아가 다시 사진을 찍고 돌아오곤 했다. 아래 사진을 마지막으로 첫 번째 기사를 마무리한다. 백암봉에 짐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을 한 뒤, 아픈 발바닥을 끌고 다시 돌아가 찍어온 사진이다. 기울어 가는 햇빛이 능선만을 골라서 오색빛깔로 밝히고 있었다.

(Velvia50)골짜기에는 서서히 어둠이 찾아들고 능선에는 나뭇잎을 관통하는 역광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 백암봉에서 돌아본 풍경 (Velvia50)골짜기에는 서서히 어둠이 찾아들고 능선에는 나뭇잎을 관통하는 역광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태그:#덕유산, #종주, #필름사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