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드배치에 반대하며 지난 9월 19일 분신한 뒤 다음날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빈소가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뱡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며 지난 9월 19일 분신한 뒤 다음날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빈소가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뱡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11월 7일. 공교롭게도 '한반도 전쟁 불사'를 함부로 입에 담고 있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방한하는 날, 한반도의 평화를 외치며 온몸을 불살랐던 고 조영삼 형님의 사십구재다. 내가 그와 호형호제로 인연을 맺었던 것은 그가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오마이뉴스>에 한창 기사를 올리기 시작하던 2009년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우리는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당시 나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사는 소박한 시골 생활을 풀어나가고 있었고 그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선생과의 인연이며 북한에 다녀와 독일 망명객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는 독일 바이에른주 뷔르츠부르크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이념 따위를 떠나 한결같은 목소리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했다.

비장함 속에서도 그는 늘 연로하신 부모님과 조국 산천을 그리워했다. 조국 산천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들꽃 하나까지 그리워했다. 이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그가 아주 감성적이며 소박한 삶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국에 돌아와 시골 빈집을 얻어 농사를 지어가며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송 선생, 주변에 살만한 곳 좀 물색해 놔요.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함께 농사짓고 삽시다. 낮에는 농사일하고 저녁에는 막걸리 사발 기울여가며 이웃사촌으로 재미나게 삽시다."
'재독 망명인' 조영삼(왼쪽 두번째, 뒤 사람)씨가 비정향장기수 이인모 선생(왼쪽 세번째)과 함께 1991년 무렵, 경남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에 나들이 했을 때 부축하기도 했다.
 '재독 망명인' 조영삼(왼쪽 두번째, 뒤 사람)씨가 비정향장기수 이인모 선생(왼쪽 세번째)과 함께 1991년 무렵, 경남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에 나들이 했을 때 부축하기도 했다.
ⓒ 김영만

관련사진보기


그는 독일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20년간의 망명 생활을 접고 2012년 12월 31일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던 부모님조차 만나지 못했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의 묘지를 참배했다는 이유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게 긴급 체포됐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했다.

"하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정원 직원들이 영접을 나왔더군요. 북한에 가서도 안내원들에게 나를 선전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고 싸워가며 할 말 다 했습니다. 국정원에 끌려가 조사받을 때 겁날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앞서 귀국하여 밀양에 자리를 잡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농촌에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노동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시골 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돕지 못했다. 그 무렵 고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농사일을 하던 나는 아내와의 불화로 그가 독일에서부터 원했던 시골집을 챙길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가 고흥에 다녀갔을 때도 제대로 따듯한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서운한 기색 없이 내 걱정을 했다.

"나도 언제 감옥에 갈지 모르는 처지지만 힘냅시다. 좋은 날이 오겠지요."

그는 결국 불합리한 재판 끝에 1995년 통일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로부터 초대를 받아 북한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의 묘지에 참배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나는 대전 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에게 큰아들 인효 녀석과 면회를 간 적이 있다. 그는 면회실 유리 벽 사이로 환하게 웃으며 <한겨레>신문을 펼쳐 보였다. 노래하는 큰아들 인효가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을 위한 서명운동과 함께 거리공연을 하고 있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인효야 고맙다. 너 같은 젊은이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성님,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한국에 들어오기 전, 독일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성치 않은 몸으로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보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애정을 품고 살아가는 그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가 예의 그 호탕한 웃음과 함께 덧붙여 말했다.


"걱정 말아요. 여긴 호텔입니다. 조폭들이 내게 인사를 꾸벅꾸벅 합니다. 최OO 회장도 이곳에 있는데 내가 똑바로 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하! 나중에 내가 감옥에서 나와 골목에서 칼을 맞게 되면 그놈이 사주한 것일 겁니다."

말과 행동이 거침없는 그였지만 이념과 상관없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도왔고 또한 그와의 인간적인 정을 잊지 못해 감옥조차 불사하고 북한에 다녀왔듯이 그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신세 진 것을 잊지 않는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함께 생활했던 박충흡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공장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주머니를 털어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힘쓰고 있는 유학생들을 아낌없이 도왔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교도소 면회 당시 내가 얼마간의 영치금을 보내 준 것에 거듭 고마움을 표하며 만기 출소하고 나와 꼬박꼬박 밀양 사과를 보내주기도 했다.

또한, 우리 부자가 그가 살고 있는 밀양의 비좁은 서민 아파트에 찾아갔을 때 안방을 내주고 자신은 거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비닐하우스 짓는 골조 작업을 해가며 녹녹지 않은 생활을 꾸려 나갔지만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국정 농단으로 참담하게 무너져 내린 조국의 현실에 늘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촛불 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축하주를 나누자고 할 정도였다.


"송 선생, 지금 뭐 하고 있소. 우리는 지금 축하주 한잔하고 있는데 송 선생도 멀리에서나마 같이 합시다."

하지만 그의 기쁨도 잠시였다. 북한 미사일 발사와 사드 배치 등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에 달하고 미국의 트럼프는 전쟁 불사를 함부로 내뱉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그와 평소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전화 통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송 선생, 거기 생활을 어떻습니까? 지낼 만합니까."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성님도 잘 지내시죠?"
"나야 늘 그렇죠. 건강 챙기시고 잘 지내세요."
"독일이라도 다시 들어가십니까?"
"하하! 혹시 압니까? 어디 멀리 떠날지..."

평소에도 말투에 비장감이 묻어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전화 통화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울먹거리는 큰아들 인효로부터 비보를 전해 들었다.


"아빠, 인터넷 검색해봐, 조영삼 아저씨가... 아저씨가..."
사드반대를 주장하며 분신으로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추모식이 20일 오후 경북 성주 초전면 마을 회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사드반대를 주장하며 분신으로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추모식이 20일 오후 경북 성주 초전면 마을 회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사드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고 조영삼씨의 마지막 노제가 23일 오후 경북 성주군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진행됐다. 유족들은 노제에 앞서 사드가 배치되어 있는 롯데골프장 입구에서 추도기도회를 가졌다.
 사드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고 조영삼씨의 마지막 노제가 23일 오후 경북 성주군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진행됐다. 유족들은 노제에 앞서 사드가 배치되어 있는 롯데골프장 입구에서 추도기도회를 가졌다.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장례식장에서 그의 아내 엄계희씨로부터 알게 된 것인데 분신 결행 직전에 평소 가까이 지내던 주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 전화번호도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내 핸드폰이 꺼져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려 했을까. 그때 전화를 받았던 박충흡씨의 말에 따르면 평소 때와 다름없는 인사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평소에도 그랬듯이 두려움 없는 당당한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가 유서의 말미에 '저의 행동에 설왕설래 말이 많은 줄로 사료 됩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듯이 그의 분신에 대해 설왕설래 말이 많다. 그는 유서에서 "당신들이 즐겨 사용하는 '우리 민족끼리' 처럼 말로만 '민족' '민족'하지 말고 민족 앞에 모든 걸 내려놓으십시오"라고 북한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를 북한을 추종하는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문재인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일부 몰지각한 자들은 온몸으로 보여준 그의 진심을 왜곡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의 분신을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서에서도 밝혔듯이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성공해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했을 정도다.

그가 언젠가 <오마이뉴스> 기사 " 삼대 세습 반대하는 나, 왜 북한에 갔나"를 통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죽어서도 '보편적 정의'가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스스로 말하고 있는 '왕따' 였던 것이다.

똥오줌 가리지 못하고 무조건 북한을 적으로 일삼고 있는 자들과는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지만 그나마 말을 섞어 볼 만한 나름 진보주의자들마저 그를 꺼려했었다. 그가 독일에서 한국에 돌아와 재판을 받을 무렵 몇몇 진보주의자라 여겨지는 자들과 소통을 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내게 말했다.


"박 기자가 참 좋은 일을 하더군요. 한번 만나고 싶어서 박 기자한테 여러 차례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더군요. 박 기자 만나면 얘기 좀 전해 주세요. 만나고 싶다고."

자칭 지식인,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이 그를 꺼려했던 이유 중의 하나를 그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땅에서 아직은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는 국보법 관련자인 저와 악수를 하다간 "앗, 뜨거!"하고 데일지 모른다는 피해의식 내지는 강박관념 때문 아닐까요?"



그는 피해의식이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몸을 던져 자신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어내 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뒤늦게 그의 참뜻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가 평소에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이 모여 그의 참뜻을 기리고 있다.

사망 후 49일이 지나면 사자의 영혼이 하늘로 떠나는 날이라고 한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밀양성당 납골당에 다녀왔다. 그의 어린 아들 한얼이와 아내를 만나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터널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앞서 달리던 서너 대의 자동차들이 엉망으로 늘어서 있었다. 내가 30여 초만 빨리 달렸어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 흘리며 갇혀 있을 뻔했다.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결정했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사내, 조영삼.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불태웠다. 자동차 사고 현장만 보아도 가슴이 뜨끔 해지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도 없는, 그 스스로 선택한 분신의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교통사고 현장의 긴 터널을 빠져나면서 숨 막히는 컴컴한 어둠, 그의 온몸을 휘감아 왔을 처절한 고통 저편에서 그 어떤 강렬한 빛이 다가왔을 것이라는 상상만 할 따름이었다.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파드마 삼바바의 저서 <티베트 사자의 서>에 보면 사후, 중음계에 이르면 살아 있을 때 얼마나 자비롭게 살아왔는가, 그 이력만큼의 빛을 보게 된다고 한다. 그 빛은 자비심이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진 그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강렬한 빛이 되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 한반도의 평화의 빛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면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의 빛을.


태그:#고조영삼, #분신, #독일망명객, #사드배치, #한반도 평화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