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막걸리 가게 할때. 아들 둘과 빨래하는 조혜자(앉은 이)
▲ 막걸리집 앞에서 막걸리 가게 할때. 아들 둘과 빨래하는 조혜자(앉은 이)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그해 겨울 난리 때, 금단추 달린 코트를 입고 갔어요. 신발은 구두를 신었고요."

67년 전 중공군(중국인민해방지원군)의 참전으로 피난 갈 때 상황을 조혜자(청주시 사창동. 73세)씨는 엊그제 일처럼 뚜렷하게 기억하며 이야기한다. 피난을 가는데 구두에 코트라니, 더군다나 금단추 옷을 입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하자, "우리 아버지가 그만큼 부자 였어요"라고 한다.

여섯 살 박이 조혜자는 어머니와 오빠, 언니, 그리고 갓 돌이 지난 여동생과 함께 김천으로 걸어서 피난을 갔다. 다리가 부러질 듯 아팠는데, 어느 날인지 코트에 달려 있던 금단추는 누군가 훔쳐가고, 구두마저 잃어버렸다. 발은 꽁꽁 얼어 동상이 걸렸다.

맨발로 다닐 수가 없어, 어머니는 새끼줄로 발을 감쌌고, 코트도 새끼줄로 감싸 바람을 막았다. 그렇게 피난길에서 돌아 올 때는 반 거지 행색이었다. 금 단추 옷을 입었던 아이가 왜 몇 개월 만에 반 거지 행색을 하게 되었을까?

돈을 광목자루에 담아...

증언하는 조혜자
▲ 조혜자 증언하는 조혜자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에 청주 대흥관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일하던 조춘흥(1910년생)은 일본으로 건너 가 중화요리점을 차렸다. 그곳에서 1937년 5월에 강덕화와 결혼을 해 나가사키, 히로시마에서 살았다. 1남 1녀를 낳고, 셋째 조혜자를 낳은 것은 1945년 7월 4일이다.

조춘흥은 백일 지난 해방둥이 조혜자를 안고, 가족과 함께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부산을 경유해 청주에 도착한 그는 대마공장 앞에 쌀가게를 차렸다. 대마공장 터는 현재 청원구청과 청주경찰서가 위치해 있다. 당시는 대마공장과 철도건널목이 있어 교통요지였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집안 살림은 풍족했다. "집 안에 쌀가마가 가득했고, 트럭이 수시로 가게를 들락거렸어요. 광목자루에 담은 돈을 세느라 고생 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조혜자는 기억한다.

그렇게 부러울 게 없이 살았던 그녀의 가정에 악마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6.25가 발발 한 지 며칠 후 캄캄한 밤에 웬 낯선 사람들이 조춘흥 대문을 두드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아내 강덕화에게 "나갔다 올 테니 애들 잘 봐라"며 집을 나갔다.

며칠 후 보도연맹원들이 청주경찰서에 있다는 소문이 있어, 여섯 살 박이 조혜자를 앞세워 청주경찰서 뒷마당으로 갔다. 강덕화는 남편의 밥 해오라는 소리에 부지런히 밥을 해갔다. 하지만 조춘흥은 밧줄에 묶인 상태에서 트럭에 실려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초여름이었다.

"애기업개로 청춘을 바쳤어"

졸지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혜자는 장년이 될 때까지 불행의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야만 했다.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해 한국전쟁이 났으니, 학교문턱을 밟았다고 할 수도 없다.

겨울난리 피난길에서 돌아 온 1951년부터 그녀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도맡아해야 했다. 엄마가 시작한 것은 자본금이 들지 않는 떡장수였다. 청주~충주 국도변의 청주초입에 있는 밤고개에서 떡판을 내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엄마가 쌀을 절구통에 빻아 체로 쌀을 치면, 그녀는 쑥을 뜯어다 고물을 만들어 엄마한테 줬다. 그렇게 바람떡이며 여러 종류의 떡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팔아 생계를 근근이 이어갔다. 하지만 떡 장사로 다섯 명의 입에 풀칠을 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셋째 조혜자가 애기업개로 입을 덜어야 했다.

애기업개로 서울청파동의 낮선 집에 발걸음을 한 것이 11살 때이다.

"옆집 사는 27세 언니가 50줄의 남자 재취자리를 얻어 시집갔어요. 나를 심부름꾼으로 데리고 갔는데 1년 만에 이혼을 해, 나도 덩달아 그 집을 나왔어요."

다음에 간 곳은 약수동이었다. 그 집 남자는 석유회사를 경영했고, 여자는 성당유치원 교사였다. 성당유치원으로 애기를 업고 가면 엄마가 젖을 주었다. 그 집에 있을 때가 12~13세였는데 툭하면 연탄집게로 맞았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분유가 없어, 연탄불 위에 물이 담긴 양재기를 올려놓고 분유가루를 묽게 개어 아기한테 줘야했어요. 그런데 일하다 보면 분유가루를 연탄불에 쏟았는데 그럴 때마다 연탄집게로 죽도록 맞았어요."

그렇게 청춘을 애기업개로 살다가 가난이 지긋지긋해, "이렇게 사는 것 보다는 아무한테나 시집 가서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에 19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했다.

막걸리집 2층 다락방엔 아들 둘이 올망졸망 앉아 있어

생활공간인 다락방에서.
▲ 다락방에서 생활공간인 다락방에서.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남편의 어깨에 기대기 위해 결혼을 했지만, 구두수선장이였던 남편의 일은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서울 숭인동에서 막걸리집을 차렸다. 노가다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는데, 닭발, 돼지등뼈가 주요 안주였다. 국수를 팔기도 했는데, 준비한 국수가 팔리지 않는 날에는 온 식구의 식사가 국수로 대치되었다.

막걸리집은 명색이 가게일 뿐 번듯한 점포가 아니었다. 1층의 조그만 가게에는 냉장고도 없고, 그릇을 얹어 놓을 선반도 없었다.

"스뎅(스테인레스)도 아닌 사발대접 5~6개를 벽에 박아 놓은 못에 걸어 놨어요. 그러다 보면 그릇이 쏟아져 깨지기 일쑤고, 분풀이는 애들한테 했어요."

살림집은 별도로 없었고, 2층 다락방에서 아들 둘을 키웠다. 그렇다 보니 손님 눈치를 항상 볼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키울 수 없었다. 가게에 손님이 있을 때 아이들은 가게를 통해 층 다락방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아이들은 할 수 없이 신설동사거리 정류장에 있던 전파사 문 밖에서 몇 시간이고 TV를 보아야 했다.

아이들이 다락방에 있을 때는 더욱 고역이었다. 음식을 조리하면서 열과 냄새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냄새 때문에 아이들이 다락방 문을 열면, 손님들 중 일부는 "야 임마 재수 없으니까 문 닫아"라며 아이들에게 야단을 쳤다. 그렇게 눈칫밥을 먹던 큰 아이가 지금은 49세가 되었고, 반듯한 직장인이 되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67년 전 겨울 난리 피난길이 생각난다. 출발은 구두에 금단추 달린 코트를 입은 상태였지만, 도착은 동상 걸린 맨 발에 단추 없는 코트를 입은 미치광이 모습이었다. 불행의 시작은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슬비가 내리던 날, 아버지는 어디서, 왜 죽임을 당했을까?


태그:#금단추, #구두, #겨울난리, #보도연맹, #애기업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