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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남한산성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항복하러 내려올 때도 추운 겨울 날이었다
▲ 눈 쌓인 남한산성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항복하러 내려올 때도 추운 겨울 날이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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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월. 12만 청나라 군사를 맞아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風前燈火)처럼 국채가 위태로웠다. 청나라 군사는 단순 군대가 아니었다. 귀신 잡는다는 팔기군이었다.

남한산성 행궁에 은거하던 인조는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맺기 위해 밀사를 내려보냈다. 조선인 세작을 풀어 1만 3천여의 오합지졸로 꾸려진 조선군의 군세와 한 달분의 식량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청군은 이중 삼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느긋했다.
 
조선은 세자가 내려가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성안을 꿰뚫어 보고 있는 청나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임금이 내려와서 항복하라는 것이다. 한계점에 이른 조선은 임금이 내려가면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청나라는 쾌히 승낙하면서 10개 항목의 조건을 내걸었다. 병자호란 강화조약이다.

사실, 청나라는 조선 땅이 탐이 나서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었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명나라와 일전을 벼르고 있는 청나라는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조선이 뒤통수를 칠까 봐 그것이 염려스러웠다.

수군(水軍)이 약한 자신들에게 불과 40여 년 전,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군 함대를 궤멸시킨 이순신의 후예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힘을 낭비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격상하라고 조선에 요구했지만 명나라를 아버지 나라로 떠받드는 척화파들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동정(東征)에 나선 것이다.

항복식 조선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를 행하고 있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 장면
▲ 항복식 조선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를 행하고 있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 장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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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내건 강화조약 10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1.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킨다.
2.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명나라 연호를 폐한다.
3.조선은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내놓는다.
4.조선은 장자와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낸다.
5.조선은 성절, 정조, 동지, 천추, 경조 등의 사절은 명나라 예에 따른다.
6.조선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않는다.
7.조선은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낸다.
8.조선은 청나라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한다.
9.조선은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않는다.
10.조선은 기묘년 새해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낸다.
 
명분은 강화조약이지만 청나라의 일방적인 요구사항을 명문화한 것이다. 이것은 강화조약이라기보다 청나라가 조선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항복문서다. 승자의 우월적 지위에서 강요한 조약 어디에도 삼전도에 공덕비를 세우라는 조항은 없다.

가릴 겨를이 없는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임금이 삼전도에 나가 항복의 예를 갖췄다.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치욕의 항복 의식이다. 이것도 청나라가 많이 봐주어서 얻어낸 의식이다.

청나라는 맨 처음 '읏듬 졀목은 반함하는 구슬을 입의 믈고 관을 싯고 나오미오'였다. <산성일기>에 기록된 고어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으뜸 절목은 두 손을 묶고,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한다'는 말이다. 쉽게 풀이 하면 장례에 있어 염(殮)을 하기 전 반함을 한다. 반함이란 죽은 이의 입에 버드나무 수저로 왼편에 서서 오른쪽, 왼쪽, 가운데로 쌀과 동전 또는 구슬을 채우는 것으로 저승에 가는 식량과 노자(路資)다.
 
괴기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오래전부터 있었던 중국의 항복의식이다. 진(秦)나라 삼세(三世)황제 자영(子嬰)이 유방에게 항복할 때, 흰옷을 입고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노끈을 목에 걸고, 나라를 들어 바친다는 의미로 옥새와 부절을 들고 흰 말이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나갔다.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 위해 비석을 세우다

삼전도 비 문화재청에서는 삼전도 비라고 부르지만 대청황제 공덕비가 적확한 명칭이다
▲ 삼전도 비 문화재청에서는 삼전도 비라고 부르지만 대청황제 공덕비가 적확한 명칭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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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보전한 인조가 창경궁으로 돌아와 국난을 수습하고 있을 때, '망국 3인방'이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의 은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움이 가할 듯하옵니다."

인조는 귀를 의심했다. 강토를 짓밟고 백성을 도륙한 청 태종을 성토하는 비석을 세워 백성들의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것도 부족한데 은덕을 기리는 비석이라니? 이자들이 진정 국록을 먹는 신하들이란 말인가? 하지만 청나라를 향해서 알아서 기자는 그 소리가 싫지만은 않았다.

목숨을 살려주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맏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끌려갔지만 자신을 부르면 도리 없이 끌려가야 한다. 청나라 군대가 철군을 완료한 6월 26일. 인조가 묘당에 하명했다.
 
"삼전도의 단소(壇所)를 고쳐 쌓고 비각(碑閣)을 세우라."

자신이 항복의식을 행했던 수항단을 고치라는 것이다. 대소신료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청나라는 대환영했다. 환상적인 제안이지 않은가. 자신들이 유린한 조선 땅에 전승기념비를 세워 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약체결 당시 청나라는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약은 체결됐고 지나간 일이 됐다.
 
자신들이 놓친 것을 찾아주고 스스로 세우겠다 하니 기특하고 갸륵했다. 그렇지만 속내를 감추고 '만주문자를 넣어라' '몽골문자를 새겨라' '귀부를 크게 하라' 등등 요구 조건을 내걸어 조선을 몰아세우는 지렛대로 사용했다.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사서에 삼전도비는 청나라의 뜻에 의해 세워진 비석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강요는 조선이 비를 세우겠다고 제안한 이후에 나온 실무적인 요구다.

삼전도 비 비문은 한자, 몽골문자, 만주문자 3개국 문자로 새겨져 있다
▲ 삼전도 비 비문은 한자, 몽골문자, 만주문자 3개국 문자로 새겨져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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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단 수리를 완료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 임금이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을 편전으로 불렀다.
 
"삼전도에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울 테니 경들이 비문을 지으라."

"소신은 지병으로 인하여 글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제일 연장자 이경전이 몸을 사리고 나섰다. 지병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글을 올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은 예문관에서 지어 올려야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

조희일이 꽁무니를 뺐다.

"경은 대제학이 궐위라는 사실을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때마침 예문관 대제학이 빈자리였다.
 
"소신은 글을 지을 수 없습니다."

대쪽 같은 성격의 장유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최명길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대열에 섰으나 우리나라를 침공한 청나라를 칭송하는 글은 남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딸은 봉림대군과 혼인하여 임금과 사돈 관계다.
   
"굽어 피소서."

제일 연소자 이경석이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머금었다.

"경들은 과인의 명을 거역할 것인가? 하루 안에 지어 올려라."

임금의 명이 떨어졌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신하들은 끙끙 앓았다. 글을 지어 올리자니 역사가 두렵고 거역하자니 임금의 진노가 무서웠다. 이경전은 아예 붓을 잡지 않았고 다른 신하들은 괴로운 마음으로 붓을 잡았다.
 
이튿날. 이경전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예 입궁하지 않았고 조희일은 거칠게 쓴 글을 가지고 들어왔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삼전도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조선에서 보낸 비문을 검토한 범문정은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이경석이 쓴 글은 쓸 만하나 중간에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쓰라'고 돌려보냈다.

비문을 돌려받은 인조가 이경석을 불렀다. 이경석이 낙점됐다. 제일 연소자가 떠맡은 것이다. 일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고 욕스러운 일은 연소자 몫이었다. 산성에서 목소리를 높여 척화를 주장하던 대신들은 빠지고 윤집과 오달제라는 젊은이가 희생됐다.

인조의 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이경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볼 뿐 붓을 잡지 못했다. 이경석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다. 대대로 명나라를 섬겨온 가문의 후손이다. 그러한 자신이 명나라를 부정하고 청나라를 칭송하는 비문을 남겨야 한다니 도무지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들어가 조상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붓을 잡은 그는 울분을 삼키며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붓을 놓은 그는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며 통곡했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마음 등에 업고 백길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시를 남겼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실린 삼전도비문 전문과 인조실록에 소개된 내용이다.

명과 청 사이의 조선, 미국과 중국 사이의 한국

전문

天降霜露 載肅載育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惟帝之則 竝布威德
오직 황제가 그것을 법 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皇帝東征軍士十萬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 이었다

殷殷轟轟 如虎如豼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西番窮髮 曁夫北落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執殳前驅 厥靈赫赫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皇帝孔仁 誕降恩言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十行昭回 旣發且溫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始述不知 自貽伊戚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帝有明命 如寢之覺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我后祗服 相率而歸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匪惟恒威 惟德之依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皇帝嘉之 澤洽禮優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載色載笑 爰束戈矛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何以錫之 駿馬輕裘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가지 옷이다

都人士女 乃歌乃謳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哀我蕩析 勤我穡事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皇帝班師 活我赤子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哀我蕩析 勤我穡事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金甌依舊 翠壇維新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枯骨再肉 寒荄復春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有石嵬嵬 大江之頭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萬歲三韓 皇帝之休
만년토록 우리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삼전도 비 
이수(머리 장식부분)는 당시 장인의 정교한 조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 삼전도 비 이수(머리 장식부분)는 당시 장인의 정교한 조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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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관련 인조실록 내용(인조 16년 2월 8일)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싸움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께서는 강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강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 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와 더불어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 신(臣) 이경석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한성부판윤 신(臣) 오준이 왕명을 받들어 씀.
예조참판 신(臣) 여이징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조선 강토를 짓밟고 백성을 도륙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를 칭송하는 비문이 완성됐다. 이제 비석 조각을 떠맡은 공조(工曹)가 곤경에 빠졌다. 석장들이 정과 망치를 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돌을 캐오는데도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나라는 화강석 지반이다. 화강석에 글을 새기면 천 년 이상 간다. 누가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는데 오래가기를 바라겠는가. 결국 가평에서 미석을 가져다 글씨를 새겼다. 미석은 무르기 때문에 글씨가 쉽게 마모된다.

삼전도 부조
▲ 삼전도 부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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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어린이 공원에 있던 비석이 주민들의 민원으로 석촌호수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부조가 빠졌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부끄러운 장면이다. 치욕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하긴, 십여 년 전에도 붉은색 스프레이 테러를 당한 일이 있다. 지우고 버린다고 치욕의 역사가 지워질까? 그렇다면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치욕일까? 자랑일까?

광개토대왕 비가 있는 집안은 선조들이 말 달리며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우리 땅이었다. 하지만 그 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우리의 영역을 벗어났다. 지금은 중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그 땅에 켜켜이 쌓인 흔적을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다. 지키지 못하는 역사는 치욕이다.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하지 못해 화를 자초한 병자호란. 척화를 주장하는 척화파들의 논리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어찌 배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 명나라에 조아리던 머리를 청나라로 돌렸을 때, 그들이 쥐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했다. 그 알량한 권세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를 자처했다.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준 미국, G2로 떠오른 중국.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에 소름이 끼치는 건 지나친 반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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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기자는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역사소설 <소현세자>를 오마이 뉴스에 12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3권으로 묶어 출간했다. 2017년엔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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