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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초상 정기룡은 '뭍의 이순신'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활약을 했다. 정시룡의 고향 경북 상주에는 그를 기려 세워진 충의사가 있고, 묘소, 신도비 등이 있다. 위의 초상은 충의사의 것이다.
▲ 정기룡 초상 정기룡은 '뭍의 이순신'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활약을 했다. 정시룡의 고향 경북 상주에는 그를 기려 세워진 충의사가 있고, 묘소, 신도비 등이 있다. 위의 초상은 충의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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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23일, 경상우도 방어사 휘하의 돌격장(선봉장) 정기룡은 경남 거창 신창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이 왜병들은 일본 침략군 3군인 흑정장정의 선봉대였다.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의 1군과 2군이 4월 21일 각각 대구와 경주를 점령한 후 경북 상주를 바라보며 북진하는 동안 흑전장정의 군대는 20일 김해를 무너뜨린 후 23일 경남 거창에 당도했다.

적병과 맞닥뜨린 조선 병사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스물다섯 나이에 무과에 장원 급제를 한 정기룡은 무예도 뛰어나고 담력 또한 출중한 청년 장수였다. 정기룡은 말을 달려 뛰쳐나가 적의 선봉대를 기습, 단숨에 왜병 10여 명을 참살했다. 이 광경을 본 군사들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어 적을 쳐부수면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이경석 <임진전란사>). 하지만 이내 적의 대군이 밀려와 정기룡 군은 본대가 있는 추풍령으로 후퇴하였다. 

4월 25일, 상주 북천에 조선 중앙군 첫 출전

4월 25일, 상주 북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순변사(변방 관리 특사)로 임명을 받은 이일의 조선 중앙군과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1군 사이에 벌어진 맞대결이었다. 이일의 조선군은 한양에서 데리고 온 정규군 60명에 급조한 농민군 등을 합해도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거의 2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다. 게다가 조선군은 이미 일본군이 턱밑까지 몰려온 줄도 모르는 채 북천 냇가에서 한가로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상주 북천 전적지 경북 상주 북천 천변에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77호인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중앙군이 처음으로 출전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이 전투에서 대장 이일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했고, 김종무 등 무수한 장졸들이 전사했다.
▲ 상주 북천 전적지 경북 상주 북천 천변에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77호인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중앙군이 처음으로 출전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이 전투에서 대장 이일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했고, 김종무 등 무수한 장졸들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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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은 상주 읍내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치솟자 군관 박정호를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때는 벌써 북천교 아래에 일본군이 잠복해 있었다. 일본군은 박정호가 다리 위로 들어서자 조총을 쏘아 즉사시킨 다음 머리를 베어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던 조선군은 이 참상을 보고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제대로 접전도 없이 도주하는 이일

곧장 소서행장의 대군이 들이닥쳤다. 대장인 이일이 가장 먼저 도주했고, 적에 맞선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일은 새재를 넘어 충주로 달려가 도순변사(조선군 총사령관) 신립에게 상주를 빼앗겼다고 보고했다.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인 진남관은 우리나라 현존 목조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웅장미를 자랑한다. 기둥이 68개나 되는 진남관은 1718년(숙종 44)에 전라 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것이다. 본래 건물은 이름이 진해루였고, 이순신은 1592년 4월 15일 이곳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감사 김수가 공문을 보내왔던 것이다.
▲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인 진남관은 우리나라 현존 목조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웅장미를 자랑한다. 기둥이 68개나 되는 진남관은 1718년(숙종 44)에 전라 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것이다. 본래 건물은 이름이 진해루였고, 이순신은 1592년 4월 15일 이곳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감사 김수가 공문을 보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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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수군의 경상도 바다 출정


4월 15일, 원균 등으로부터 왜적이 부산을 점령했다는 공문이 이순신에게 전달된다.
4월 17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로부터 일본군이 부산을 점령한 뒤 머물러 있다는 소식이 온다.
4월 20일, 경상 감사 김수로부터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 바다로 구원 출정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조정에 했다는 공문이 온다.
4월 26일,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공문이 온다. (본문 참조)
4월 27일, 조정에서 공문이 온다. (본문 참조)
5월 4일,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수군이 경상도 바다를 향해 출정한다.
5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아군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인 옥포 대첩을 이룬다.

4월 26일,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경상도와 서로 의논하여 조처하라.'는 공문을 받는다. 왜적의 침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경상 우수사 원균과 의논해서 결정하라는 뜻이다. 이 공문에는 경상 좌수사 박홍과 상의하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다. 박홍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마자 곧장 경상 좌수영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그 이후 경상 좌도 수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4월 27일 출전 명령을 받는 이순신

4월 27일, 이순신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공문을 받는다. 조정은 '급히 출전하라'면서 '원균과 힘을 합쳐 적선을 부순다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조정에서) 천 리 밖의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좋게 해석하면 '생각하는 대로 하라.'는 의미이고, 나쁘게 풀이하면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를 가지고, 그것도 원균과 의논하여 실행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순신도 곧장 출전하지는 못한다. 전라 우수영의 군대가 도착하지 않았고, 일본군의 동태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는 5월 6일 경남 통영 당포 앞바다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이루어진다. 조선군이 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을 격파하는 5월 7일의 옥포 해전보다 하루 전에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이 합세하는 것이다. (계속)

망해루 진남관 앞 망해루. 바다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이름의 이 정자는 1991년에 중건되었다. 즉 문화재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최소한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망해루에서 조금 내려가면 이순신 동상이 있고, 도로를 건너면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 거북선 모형이 있다.
▲ 망해루 진남관 앞 망해루. 바다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이름의 이 정자는 1991년에 중건되었다. 즉 문화재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최소한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망해루에서 조금 내려가면 이순신 동상이 있고, 도로를 건너면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 거북선 모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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