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4년 전, 가을이 깊던 11월의 어느 날. 친구의 생일파티 모임이 있었다. 나와 친구 셋은 아침부터 서둘러 덕수궁에 갔다. 울긋불긋 진하게 화장한 나무들이 차가운 햇살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가을에 흠뻑 취해 덕수궁 돌담길을 걷던 내 눈에 두 개의 검은 형상이 들어왔다. 한 걸음 다가갈수록 또렷이 보이는 그것은 검은 비닐로 덮인 짐이 가득한 리어카와 그 옆 벤치 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리어카는 그 검은 사람의 집처럼 보였다. 그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까닭 없이 목부터 메어왔다.

친구들은 앞으로 지나가고 나는 남아 반대편 벤치 끝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척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사람 손에는 누군가 피다버린 것 같은 얼룩진 반 토막 난 담배꽁초가 있었다. 얼룩덜룩해진 검은 코트보다 더 검어진 울퉁불퉁한 손, 발에 맞지 않는 커다란 구겨진 신발 사이 까맣게 드러난 맨발, 덩어리진 머리카락, 중력이 그 자리만 백배로 더 작용한 듯 허리가 거의 폴더처럼 접혀진 상태로 그는 축 늘어진 손끝에 매달린 축축한 담배꽁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멍하게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지갑을 열어 지폐 한 장을 꺼냈다. '날이 추운데 어디 가셔서 식사라도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에 막혀 나오질 않았다. 대신에 살며시 지폐 한 장을 검은 사람 방향으로 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다시 바라보는 순간 나는 재빨리 일어서서 친구들이 지나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거지로 보이냐?'는 고함이 들릴 것만 같았다.

친구 중 한명이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너 '셀카'찍느라 늦었지?"
"아니… 저기 어떤 아저씨가…"
"아… 나도 봤어. 돈 줬어?"
"아니… 응."

나는 괜히 횡설수설했다. 그 사람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혹시 실수한 건 아닐까?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도 한때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혼자가 됐을까? 즐겁던 마음이 사라졌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덕수궁 앞 샛노란 은행나무마저도 나뭇잎이 나무와의 이별을 예감하고 그 슬픔을 참느라 온몸이 누렇게 뜬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고2인 아들과 세운상가에 기타를 사러갔다 온 이야기를 했다. 기타를 산 뒤 근처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들어와서 '배가 너무 고프니 밥 좀 사먹게 만 원만 달라'고 했단다. 친구는 만원을 주었다.

남자가 사라지자 아들이 "엄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저렇게 사람들이 일은 안하며 사는 거야"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친구는 순간 말문이 막혀 한참을 머뭇거리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애기하지 마, 그리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라고 반박했지만 아들은 계속 구시렁했단다. 아들 잘못 키웠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며 검은 그 남자가 생각났다. 나는 "아들 말도 틀린 건 아닌데"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전남 여수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비혼인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7년 전에 췌장암 수술을 하신 아빠와 18년 전 중풍에 걸린 엄마와 함께 사는 일이 어찌 즐겁기만 할까만은, 오빠는 모든 상황을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해석하고 주변을 항상 즐겁게 만든다. 때문에 나는 오빠랑 자매처럼 잘 통하고, 한번 통화를 했다 하면 한두 시간은 기본이다.

그날도 이런 저런 대화 끝에 검은 남자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 상황도 모르면서 도와준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내게 오빠는 "잘했어, 불문곡직 잘한 거야, 내가 웃긴 얘기 해줄게"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해 봄 진해 군항제가 열렸을 때, 오빠는 엄마를 모시고 벚꽃놀이를 갔다. 늘 화려한 걸 좋아하시는 엄마는 그날따라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목욕도 안하시겠다고 떼를 쓰고 화장도 안하시고 옷도 갈아입지 않겠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꽃분홍색 벙거지 모자를 씌우고 입던 옷 채로 진해에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휠체어를 꺼내 엄마를 태우고 꽃구경을 하다 보니 엄마도 기분이 좋아져서 즐겁게 구경을 잘 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점점 많아져 휠체어가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오빠는 휠체어를 한 곳에 세운 다음 엄마에게 "주차장에 가서 차를 가져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면서 "모자가 시야를 가려 꽃구경에 방해가 되니 벗겨달라"고 하셨다. 오빠는 모자를 엄마 손에 쥐어주고 자리를 떠났다.

마침내 차를 가지고 온 오빠가 엄마를 태우려고 안았다. 순간 엄마 손에 든 모자 속에 만 원짜리 한 개가 있더란다. 무슨 돈이냐고 물어보니 엄마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고 한다.

"몰라, 어떤 아저씨가 주고 가더라."

엄마가 휠체어타고 모자를 들고 있으니 누군가 주고 간 모양이었다. 오빠는 박장대소했다. 나도 웃긴데 눈물이 났다.

엄마는 그 옛날 어려운 시절에도 변호사였던 할아버지의 막내딸로 태어나 가난을 모르고 살았고, 미스코리아 전남 '선'을 차지한 빛나는 외모 덕에 가는 곳마다 시선을 받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여자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 누군가의 눈에는 늙고 병들고 가난한 할머니로 보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문득 검은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오만 원 지폐를 슬쩍 밀어주고 가더라, 하고 말하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면 좋겠다. 깊은 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그의 슬픔에 짓이겨진 어깨가, 눈빛이, 가느다랗게 들리던 서러운 한숨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날이 추워지고 있다. 도시를 떠도는 검은 사람들에 대한 단발성 동정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없는 걸까. 그저 불편한 시선으로 그들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을 그들에게 지폐 한 장만 손에 밀어줄 수밖에 없는 나는 그저 <정읍사>의 한 구절인 "달아 높이 곰 도다샤 어기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만 간절히 외쳐본다.


태그:#덕수궁, #리어카, #노숙인, #가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