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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해외 나가 봤어?"라는 질문에 곰곰이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국외 여행이야 가 본 일이 없었어도, 어쨌든 제주도도 해외니까. 내륙 사람인 내게 제주도는 바다 건너다. 생각하면 조금 설렌다. 고등학생 때 배를 타고 흐린 날 바다를 건너 제주도로 향했던 첫 기억이 있고, 이번 여행은 벌써 나의 네 번째 제주 여행이다.

지난 여행은 온전한 '쉼'을 위해 갔었다. 제주공항 근처의 숙소를 잡은 다음 주변의 북카페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늘어지게 책을 보고 저녁엔 꼬박꼬박 회를 먹는 이박 삼일의 일정을 보내다가 만족스레 서울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좀 걸어야 할 예정이었다. 평소 나를 조금이라도 더 걷게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식구들이 좋아할 일이다. 나는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발적으로 '좀 걸어야 하는' 여행을 선택했다. 10월 28일에 열린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할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제주에 이제 막 터를 잡은 외부인인 직장 선배는 그런 날 보고는 "꼭 와야 하는 단체를 끼고 온 것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왔느냐"며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제주에서 처음으로 퀴어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제주의 퀴어들에게 진심으로 '연대'의 마음을 보내고 싶었다.

'다름'을 문제시하는 사회, '벽장'에 들어갔다

"직접 손으로 그렸다"던, 무지개 꼬리가 달린 말 마스코트가 그려진 주최측 깃발이 제주의 세찬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흐린 날씨에도 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무척 즐거웠다.
▲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의 공식 깃발 "직접 손으로 그렸다"던, 무지개 꼬리가 달린 말 마스코트가 그려진 주최측 깃발이 제주의 세찬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흐린 날씨에도 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무척 즐거웠다.
ⓒ 홍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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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에서 나고 자란 '퀴어', 성소수자다. 국내 성소수자 열 명 중 네 명은 성정체성으로 인해 차별과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경우 거의 절반(46%)이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친구사이'와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2014년 설문조사 결과).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 '퀴어'의 청소년기는 어둡지만, 그중에서도 토박이가 많이 살아서 '다름'이 익숙지 않은 지방에서 살아가는 건 조금 다른 의미다. 학창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면, 나는 무엇이 이 사회의 성소수자들을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게 하는지 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로 '좋아하는 애가 누군지'를 묻기 시작하는 나이쯤 되었을 때, 나는 또래에 비해 월등히 '어른스러운' 남자애를 몇 번 좋아해 본 외에는 여자애들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일부였다. 나는 파를 못 먹고, 밥 먹는 게 아주 느리고, 새 옷을 살 여유가 없어 대부분의 옷을 물려 입는단 것 외에는 평범한 애였다.

당시 살던 동네는 시골이었는데, 그래도 아이들은 '다른' 것에 익숙한 편이었다. 아마 군부대가 있던 지역으로, 한 학년에 반은 열 개나 되면서 한 해 동안 한 반에서 다섯 명씩 흔히 전학을 오가는 동네였기 때문인 것 같다.

하나도 문제가 없는 '파라다이스'는 아니었을지언정, 제법 긍정적인 면이 있는 환경이었다. 워낙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함께 생활해야 하는지라 서로의 '다름'이 별 문제 되지 않았다. 거기서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말든, 그건 크게 문제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여중에 입학해 옆 반의 얼굴이 하얀 애를 짝사랑하면서도, 공부도 곧잘하고 떠들썩하게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것도 좋아하는 평범한 생활을 했다. 물론 어른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선생님들은 우리들의 '방황'과 '정체성 혼란'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운동장을 같이 쓰던 고등학교의 '언니'들과 교제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그 아이들을 색출해내서 벌점을 주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것을 함께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환경은 이듬해 전학 한 번으로 바뀌었다. 전학 간 동네는 전에 살던 동네와 분위기가 좀 달랐다. 그 동네는 외부인의 유입이 거의 되지 않는 토박이들의 동네였다. 전학 간 첫 학기 초에 전교생이 '전학생'인 나를 구경하러 왔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성소수자란 사실은 금세 '아웃팅' 당했고, 그건 '낯섦'을 혐오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관용의 대상이 아닌 흥밋거리였다. '성소수자'인 것은 배척 대상이 되는 조건이었다.

하루는 복도를 지나가는데, 얼굴도 모르는 다른 반 애가 "씨X, 더러운 년"이라고 말하며 내 어깨를 일부러 밀치고 지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 모르는 상대가 단지 내가 '성소수자'라는 풍문만을 전해 듣고서는 잘 씻지 않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옮는 병이 있던 것도 아닌 나를 '오염 물질'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당혹스러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나는 '벽장'에 들어갔다. 술도 마셔 보고, 담배도 피워 보고, 자해도 하고, 친구는 이런 나를 이해하는 단 몇 명만 빼고는 제대로 사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십대가 되었다.

서울이라서 가능했던 신세계

서울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행진을 기다리던 중이다. 주최측 추산 5만 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행진할 때 선두에 서는 트럭별로 다른 음악을 트는데, '러시' 트럭이 인기가 많다. 반대 진영의 참가자가 이 트럭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 서울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 서울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행진을 기다리던 중이다. 주최측 추산 5만 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행진할 때 선두에 서는 트럭별로 다른 음악을 트는데, '러시' 트럭이 인기가 많다. 반대 진영의 참가자가 이 트럭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 홍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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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나는 폐쇄적인 지방 소도시 출신 정체성을 버릴 수가 없는 서울 거주자가 되었다. 이는 매우 복잡한 정체성이다. 무슨 행동을 하든지 사사건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눈치 보고 눈치 보게 하는 문화를 매우 싫어하는 반골 기질도 잔존해 있다. 그러면서 자유분방한 '서울 사람들'의 다양한 행각에 놀라며 조금씩 이곳 사람처럼 행동하는 양식을 배워 갔다.

내가 거의 십 년 즈음 서울에서 지내며 '정말로 이건 서울이라서 가능한 거야'라고 생각한 여러 종류의 행사와 축제들이 있지만, 그중 단연 순위권에 꼽을 수 있는 건 퀴어 축제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은 화장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간혹 그 예전 같은 반 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씨X 더러운 년놈들" 하고 욕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행진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소외와 우울은 한 묶음이다. 소외감은 실제로 고통을 준다. '왕따'를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더니, 실제로 신체적 고통을 겪을 때와 같이 전두대상피질이 활성화되고, 전전두엽피질의 활동은 위축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나오미 아이젠버거 교수팀, 2003). 마음이 아픈 것은, 정말로 아픈 것이다.

서울에서는 벌써 2000년부터 '퀴어문화축제'가 열렸지만, 지방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은 비교적 최근부터다. 대구에서 2009년 '대구퀴어문화축제'를 처음 연 것을 시작으로 2017년 9월엔 부산에서도 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이 제주였다.

제주는 최근 들어 외부인의 유입이 늘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지역성'이 강한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는 2010년 2분기 이전까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구보다 나가는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다(통계청 '인구이동통계'). 실제로 제주시 측은 축제 장소로 예정됐던 신산공원의 장소 사용 허가를 철회하며 '미풍양속', '도민정서' 등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다 보니, '여기는 나도 꼭 가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10월 28일 점심 무렵, 제주 신산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옆에 차를 대 놓고 축제가 열린 장소를 찾아 헤매는데, 눈앞에 '○○교회'라고 쓰인 차가 보였다. 순간 '서울에 있는 교회 차가 왜 여기에?'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며 '동성애 결사반대'를 외치는 측이었다. 그럼에도 공원 안쪽에서는 퀴어영화제, 성소수자 부모모임, 대학생 소수자 모임 연대 등 30개의 부스가 순조로이 운영 중이었고, 한쪽에서는 장기자랑, 토크콘서트 등이 이어졌다.

'퀴어문화축제'의 가장 설레는 때는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순간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사실 서울의 퀴어문화축제엔 최근 3년 동안 계속 참가했지만, 풍문으로 들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대치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못 봤다. 올해 여름 행진하려고 대기 중이던 '러시' 트럭 앞에 누군가가 드러눕는 것을 딱 한 번 봤지만, 그 외에는 그렇게까지 열심인 반대 세력을 본 적이 없다. 사실 해가 갈수록 같은 피켓, 같은 현수막, 같은 구호를 보게 되어 친구들끼리는 농담 삼아 "이제 새로운 것 좀 보여 주시지" 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신산공원 출구 양옆으로 반대 진영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반대 진영의 행렬은 제주시청까지 함께 걸어갔다가, 유턴해서 돌아오는 길까지 함께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측은 끊임없이 "무단 촬영을 하면 법적 대응합니다"를 외쳤지만, 그럼에도 무단 촬영을 하는 사람을 목격했고, 그중 하나가 일행과 충돌할 뻔하기도 했다.

당연히, 제주에서도 사랑이 이긴다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에서 예배를 드린 후 '말씀 뽑기'를 했다. 언제 봐도 힘이 되는 이사야서의 한 구절.
▲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에서 뽑은 '말씀'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에서 예배를 드린 후 '말씀 뽑기'를 했다. 언제 봐도 힘이 되는 이사야서의 한 구절.
ⓒ 홍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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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무지개예수' 부스에서의 예배에 참여한 일이다. 로뎀나무그늘교회, 섬돌향린교회 등의 서울에서도 '퀴어'들을 위한 각종 활동에 참여하는 교회 구성원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마주쳐 눈인사를 나누고 예배 순서지를 받았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

예배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드리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의미화되지만, 다른 동료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동성애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각별한 의미였다. 반주가 준비되지 않아 육성으로 '사랑이 이기네'를 불렀다. 이날따라 가사가 마음에 남았다.

"사랑하세, 사랑이 이기네, 모든 차별과 미워함은 우리 것이 아니니."

축제를 시작하기 전, 주최 측은 개회선언문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중 한 대목을 인용했다.

"사람들은 지구 위에서 세세토록 점점이 흩어 살 수 없는 까닭에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본래는 어떤 사람도 지구상의 특정 지역에 대해 남보다 더 우선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어떤 낯선 땅에서도 적으로 간주되지 않고 누구에서든 환대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단 하루의 축제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축제를 준비하고, 천 명의 사람들이 같이 걸으며 제주 시민들을 향해 "여기에도 퀴어가 있다", "제주에도 우리가 있다"고 알린 일이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꾸준히 그 행렬에 동참하고 싶다.

"퀴어옵서예!"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 현수막 앞에서 행진할 때 들었던 깃발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 현수막 앞 기념촬영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 현수막 앞에서 행진할 때 들었던 깃발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 이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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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성소수자, #제주퀴어문화축제, #퀴어문화축제,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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