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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코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0년도 더 된 일이다. 무슨 책이었는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셔널리즘과 젠더> <여자놀이>였던가?

주장하는 바는 대단히 센(?) 것일 수 있었는데, 그 방식이 억지스럽다거나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럽고 풍부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가 그동안 쌓아온 성찰과 내공 덕이리라. 이렇게 치즈코는 나름 내 뇌리에 강한 흔적을 남겼지만, 그간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일상에 필요한 책만 간신히 읽으며 살던 터라 자연스럽게 잊힌 상태였다.

최근 '페미니즘'이 하나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대의 내 삶에 대단히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던, 그러나 특별히 더 깊게 접해보지 못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내게 마을 이웃이 치즈코의 책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권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재밌었다. 치즈코의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어 검색하다가 이 책,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과 만났다.

노인은 왜 집에서 죽지 못할까

추석맞이 마당정리 추석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마당 잔디를 깎고 있다. 아버지는 일을 하실 수는 없었지만, 오랫만에 마당에 나와 잠시 앉아 있다.
▲ 추석맞이 마당정리 추석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마당 잔디를 깎고 있다. 아버지는 일을 하실 수는 없었지만, 오랫만에 마당에 나와 잠시 앉아 있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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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약 11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시간의 여유가 생긴 상황이라 제주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한 달 조금 더 같이 지냈다. 이제 90의 나이로 일상의 삶에서 남의 도움이 필요한 내 아버지 그리고 일상적 도움이 필요한 남편과 살아가고 있는 88세의 내 어머니.

1~2년 전만 해도 딸의 택배 짐을 등에 지고 가게로 향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빈 몸으로 좇아가며, 가슴이 조금 저릿했다. 그때의 기억이 눈에 선한데, 이제 내 부모는 그 기억 속의 부모가 아니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화들이 내 가슴 속에서 소화되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직도 그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함께 했던 게 바로 이 책이다.

치즈코의 '싱글 3부작'의 완결판이라고 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기이다. 익숙한 자신의 공간에서 필요한 간병(식사간병, 배설간병, 입욕간병 등)과 의료와 간호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죽어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성찰서이다. 죽음에서의 당사자주의라고나 할까? 당연히 이러한 죽음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얘기되는 방치된 죽음, '고독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노인이 자기 집이 있는데도 삶의 마지막을 그 집에서 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놀랍게도 그리고 가만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럽게도 가족, 더 정확히는 자식들 때문이라고 한다. '간병' 등 죽음의 과정을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심과 정당화를 위해 필요한 게 시설이나 병원이라는 것이다.

간병 수준이 높아지고, 그 기간도 길어지고, 핵가족화 되어가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간병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근대화가 되어가면서 간병이나 임종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서 맡아왔던 많은 우리의 일상이 산업의 영역, 전문가의 영역, 자본의 영역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실은 병원에서의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책에는 환자의 사망은 곧 의료의 패배인 연명 치료의 현장에서 환자를 살려내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의사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환자가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오고,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노인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괴로움에 찡그리는 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죽음의 병원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의사들의 이야기이다. 조금 더 평온한 죽음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으로 그들은 가정임종의료를 담당하는 의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올 초에 뼈가 부러져서 수술을 하느라 3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가까이 사는 내 형제들이 교대로 24시간씩 병원에 상주하면서 아버지를 돌봤다.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뽑으면 안 되는 주삿바늘을 빼버리고, 움직이면 안 되는데 자꾸만 화장실을 가겠다고 침대를 내려오려 하는 아버지를 감당하느라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린 3주간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이미 그때 병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편한 공간인지, 삶이든 죽음이든 병원에 이렇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셨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조금 더 정확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 어른의시간

이 책은 노화의 대표적 증상이기도 하고, 지금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한 치매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함께 한 과거의 역사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치매를 받아들이기가 대단히 힘든 존재라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처음인 양 다시 하고, "여기 냉장고 위 칸 작은 반찬통들에 반찬 덜어놨으니 그걸 꺼내 드시면 돼" 같은 아주 단순한 것들도 전혀 입력이 안 되는 어머니가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이제 1년쯤 되어가면서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아직 '치매'라는 말은 쓰지 않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증상에 대해서는 편하게 말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 "저번에도 얘기했잖아"라며 내가 큰소리를 냈을 때, 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다. "늙어가면서 이러는 거는 당연한 거다"라고. 맞는 말이다. 맞는 말임에도 함께 살아가는 가족은 이해만큼이나 짜증도 어쩔 수 없는 것인 듯하다.

'미지의 영역'이자 '모두의 미래'인 죽음

약주머니 세끼마다 부모님이 드셔야 하는 약을 잊지 않고 드시기 위해 약주머니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셨다.
▲ 약주머니 세끼마다 부모님이 드셔야 하는 약을 잊지 않고 드시기 위해 약주머니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셨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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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부모님의 변화를 겪으며, '늙음', '죽음' 등 우리 모두의 현실이면서도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들이 일상 속으로 성큼 들어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 현실감은 더더욱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현실감을 주지 못했던 '죽은' 언어였던 죽음, 임종 등의 단어가 이제 살아 꿈틀거린다. 나를 건드리는 '살아있는' 언어가 되었다. 죽음은 '언젠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지금만큼은'이라고 생각할 때 죽음은 항상 불행하겠지.

이 책은 소소한(?) 과학적 지식으로 아직까지도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죽음의 순간에 대해 위로와 안도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임종 직전 뇌에서는 엔도르핀이라는 진통제가 한꺼번에 나와 모르핀과 똑같은 작용을 해서 사실상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 죽음의 순간이 끔찍하고 가능한 피해야 할 그런 시간만은 아닐 수 있겠구나!

누구나 다 겪지만 겪은 사람은 죽어서 말이 없고, 살아있는 우리는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다. 미지의 영역인, 그래서 공포스러운 죽음 앞에 이제 조금 더 편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도 조금은 편해지겠지.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함께 해야 할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팁도 제공해준다. 오감 중 청각은 끝까지 유지되므로 죽음의 순간 함께 있는 가족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는 게 좋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말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구나. 그래서 삶의 순간이든 죽음의 순간이든 말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은 현재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미래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며, 늙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무력함이 일상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남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자기해방'의 힘이 필요하다고 치즈코는 말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나약하고 무력한 우리들이 순간순간 애쓰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의미있는 삶이란 뭘까? 그럼 무의미한 삶도 있는 걸까? '고독사', '안락사', '존엄사' 등 죽음에 대한 말들을 들으며, 나는 '좋은'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무의미한' 삶을 연명하지 않는 것, 삶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 안고 가는 것 등등이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이런 나의 생각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무의미한' 삶이라 할 수 있는 삶도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런 기준을 알게 모르게 들이대고 있었던가? 우리는 누가 특별히 훌륭해서 존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부여받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명이기에 존엄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진정으로 그러한가? 우리의 삶이 그다지 존중받지도 존엄하지도 못한 것이라면, 존엄사는 과연 가능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은 아마도 '위로와 위안'이 아닐까 싶다. 대면하기가 만만치 않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조금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마무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우리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있으므로 존엄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물론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생각, 판단, 느낌,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고 부대끼리라. 그것 또한 '살아있음'이겠지.

덧붙이는 글 | 다음의 개인 블로그와 yes24 개인 블로그에도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전북 남원 산내의 실상사작은학교 교사. 수다, 농담, 술, 음악,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물녁 연기, 그리고 멀리보이는 산의 능선 등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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