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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재 풍경... 산안개가 스치고 지나가는 풀밭에 강아지풀이 털 끝마다 물방울을 잔뜩 매달고 있습니다.
 한티재 풍경... 산안개가 스치고 지나가는 풀밭에 강아지풀이 털 끝마다 물방울을 잔뜩 매달고 있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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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길이의 낙동정맥 27개 구간 중 오늘은 23번째 구간을 종주하는 날입니다. 이른 새벽에 아내와 함께 서울을 떠나 아침 7시 50분 경북 영양군 수비면 한티재에 도착합니다. 한티재 공터에 차를 세운 뒤 미리 불러 둔 택시를 타고 영양, 봉화, 울진 세 개 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애미랑재까지 갑니다.

애미랑재 고갯마루에서 남쪽으로 산행을 시작해 차를 세워 둔 한티재까지 가야 합니다. 거리는 20㎞... 절대 짧지 않은 거리라 아내가 해낼 수 있을지 긴장감이 스멀스멀 몸으로 밀려옵니다. 하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간다고 하니 고갯길을 넓히기 위해 절벽처럼 가파르게 깎아 놓은 절개지로 첫걸음을 내딛으며 애써 담담한 마음으로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산행 거리 20㎞... 긴장감을 애써 누르며

'애미랑재'라는 고개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처음 애미랑재라는 이름을 대했을 때는 어머니(에미)와 아이에 얽힌 어떤 이야기가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인터넷을 뒤져 봐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고개가 영양과 봉화, 울진 경계에 있어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 애매하다 해서 애미랑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고개라는 것 자체가 산줄기를 넘는 지형이어서 한 지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고개가 어느 지역에 속할까 하는 궁금증은 사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미랑재에서 낙동정맥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만 합니다. 고갯길을 넓히기 위해 길 양쪽을 깎아 냈기 때문입니다.
 애미랑재에서 낙동정맥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만 합니다. 고갯길을 넓히기 위해 길 양쪽을 깎아 냈기 때문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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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안개가 밤새도록 휩쓸고 다녔는지 풀과 나뭇잎은 온통 물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슬처럼 풀잎 끝에 달린 물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아, 이런 게 영롱하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눈부신 풍경에 눈은 즐겁지만 다리는 물기 머금은 숲을 휘젓고 걸어가며 비를 맞은 듯 축축하게 젖어 옵니다.

풀잎에 달린 물방울 영롱하게 빛나고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30분 만에 칠보산 정상에 이릅니다. 일곱 가지 보물을 지닌 산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는 칠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많습니다. 칠보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산은 아마도 함경북도 명천에 있는 칠보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중환이라는 분이 1750년경 저술한 지리서 <택리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함경도는 산이 모두 크기만 하고 계곡이 황량해서 명산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오직 명천에 있는 칠보산이 동해 가에 위치하여 골짜기에 들면 바위 형세가 깎아지른 듯하며, 기묘하게 조각된 형상은 거의 귀신 솜씨인 듯하다."(택리지 / 이중환 지음, 이익성 옮김 / 을유문화사 / 163쪽)

칠보산 줄기가 아침 햇살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나라에 칠보산이 여러 곳 있습니다. 일곱 가지 보물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칠보산 줄기가 아침 햇살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나라에 칠보산이 여러 곳 있습니다. 일곱 가지 보물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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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은, 진주, 산호 등 일곱 가지 보물이 묻혀 있고 귀신 솜씨인 듯 기묘하다는 명천 칠보산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갈 수 없는 산입니다. 남쪽에도 칠보산이 여럿 있습니다. 충북 괴산 칠보산(779m), 경북 영덕 칠보산(810m)이 있고, 경기도 수원에도 야트막한 칠보산(234m)이 있습니다.

지금 오른 산도 칠보산이지만 그리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닌가 봅니다. 예순이 넘은 영양 토박이 택시 기사분도 영덕 칠보산은 알지만, 이곳 영양에도 칠보산이 있느냐고 반문할 정도입니다. 다른 칠보산에 비해 영양 칠보산은 족보가 좀 약해 보입니다. 영양군 홈페이지에 칠보산에서 일곱 빛깔의 쇠가 났었다는 설명이 짧게 실려 있을 뿐입니다.

"태백산맥은 없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조선조부터 우리에게는 백두대간과 13개 정맥(남한에 9개)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산맥'은 일제가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태백산맥은 없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조선조부터 우리에게는 백두대간과 13개 정맥(남한에 9개)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산맥'은 일제가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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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보물을 지닌 칠보산

칠보산을 내려와 숲에 묻혀 버린 새신고개, 깃재를 가로질러 갑니다. 가을이 깊어 가며 꽃은 거의 다 지고 말았습니다. 간혹 늦게 피어난 구절초 한두 송이가 쓸쓸하게 몸을 떨고 있을 뿐, 모두 다 꽃잎을 접고 숨죽이며 겨울 날 채비를 갖췄습니다. 여름 내내 그렇게 인색하게 잠잠하던 바람은 이제 겨울이 저만큼 다가오며 슬슬 몸을 풀기 시작합니다. 오르막길에서 땀을 쭉 뽑을 땐 바람이 시원하게도 느껴지지만, 땀이 식으면 금세 차가운 기운으로 몸속을 파고들며 본색을 드러냅니다. 바람이 제철을 만난 것입니다.

산에는 가을빛이 완연합니다. 한쪽에서는 누렇게 혹은 붉게 나뭇잎이 물들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지는 바람이 빛깔 바꾼 나뭇잎을 우수수 떨궈 버립니다. 산길에는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등 비슷한 듯 다른 모양, 다른 듯 비슷한 빛깔의 낙엽이 수북이 쌓입니다. 단풍나무 잎은 붉은 것도 있지만 누런 것이 눈에 더 많이 띕니다. 빛깔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기온, 강수량 같은 환경 탓인지, 아니면 종자 자체가 다른 것인지... 어쨌든 낙엽이 쌓여 푹신한 길을 걸으며 발은 호사를 누리고 몸은 편안함으로 가득 찹니다.

단풍을 보면 마음이 일렁입니다. 단풍의 붉은빛이 사람 마음까지도 붉게 타오르게 하나 봅니다.
 단풍을 보면 마음이 일렁입니다. 단풍의 붉은빛이 사람 마음까지도 붉게 타오르게 하나 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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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제 친구나 동료들은 골프에 푹 빠져 있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LPGA 같은 골프 얘기로 흥분하고 필드에 나갈 약속을 잡습니다.

저는 골프를 끊고 산으로 향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산에서는 다툼이 없어 좋습니다. 남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경쟁심리, 강박관념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내가 갈 길을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갈 뿐입니다. 다툼이 없으니 자연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편안한 마음에는 상념의 자락이 깃들게 됩니다. 라운딩 내내 소란스럽고 긴장해야 하는 골프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걸으며 눈은 눈대로 아름다움에 취하고 발은 발대로 편안함에 취합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걸으며 눈은 눈대로 아름다움에 취하고 발은 발대로 편안함에 취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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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이 없어 좋은 산행

몇 년 전, 아버지가 군 동기회의 마지막 모임을 하고 돌아오셨습니다. 1953년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임관하신 아버지는 10년 남짓 비교적 짧은 기간 복무하셨지만, 이후 동기들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연세가 여든을 넘기며 돌아가신 분도 많고 살아계셔도 거동하기 힘든 분들이 많아 모임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남은 회비를 1/n로 나눴다는데, 그 액수마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저도 육십 줄에 접어들며 주위 벗들이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죽기도 하고, 외국으로 떠나기도 하고, 그냥 잊히기도 합니다. 가까웠던 벗들은 하나둘 멀리 떠나지만, 새로운 벗을 사귀기는 참 어렵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도 적지만, 만난다 해도 가까워지기가 쉽지는 않은 듯합니다.

한 가지 예로, 이번까지 스물세 번 이어진 낙동정맥 종주 중에서 아내와 함께 산행한 두 구간을 빼고 스물한 구간을 ㄱ산악회와 함께 했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분들과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많이 찍으면서 후미로 쳐졌기에 제가 다른 분들과 어울리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분들에게 다가가려는 열정 자체가 잘 생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주위의 벗은 하나씩 떠나가거나 잊혀지고, 새로운 벗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그런 나이 말입니다. 참 서글픈 일이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낙동정맥 마루금이 길등재를 가로질러 갑니다. 선인들이 걸어서 넘나들던 고갯길은 운명이 두 갈래로 갈렸습니다. 길등재처럼 찻길로 넓혀지든지, 아니면 숲에 묻혀 사라져 버리든지...
 낙동정맥 마루금이 길등재를 가로질러 갑니다. 선인들이 걸어서 넘나들던 고갯길은 운명이 두 갈래로 갈렸습니다. 길등재처럼 찻길로 넓혀지든지, 아니면 숲에 묻혀 사라져 버리든지...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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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친구 만나려는 열정이 식는 것인지...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제 주위에 있는 벗들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벗을 얻으려는, 쉽지 않은 노력을 하기보다는 아직 저와 함께 있는 벗들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맞는 듯합니다. 이미 몇 년, 몇십 년을 함께한 벗들이 더욱 소중한 존재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결심 23 / 새로운 벗을 사귀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 함께하는 벗을 더욱 소중히 대하자.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만나자.

오늘 산행에서는 하늘을 향해 쭉 솟구친 춘양목을 자주 만납니다. 춘양목은 재질이 붉은빛을 띠는 적송입니다. 예전에 이 소나무를 한창 베어낼 적에 봉화군 춘양면에 이 소나무를 모아서 철도편으로 수송했기 때문에 춘양목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굵고 곧게 솟아오른 춘양목에서 소나무의 대륙적 기질을 느껴 봅니다.
 굵고 곧게 솟아오른 춘양목에서 소나무의 대륙적 기질을 느껴 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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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겉껍질이 붉은빛이 돌아 적송이라고도 하는 육송에 드는데, 춘양목이라는 이름은 집산지인 춘양의 지명을 따 지은 것이다. 춘양목은 다른 지역의 육송과는 달리 곧게 자라는 데다가 껍질이 얇고 나뭇결이 곱고 부드러우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으며, 켜면 하얘 보이기 쉬운 다른 육송과는 달리 붉은빛 또는 노란빛을 띠며, 대패질을 해 놓으면 윤기가 돈다."(한국의 발견 - 경상북도 편 / 뿌리깊은나무 / 107쪽)

우리나라 산에 소나무는 흔하지만 대개 구불텅구불텅 휘어 자라나기 일쑤입니다. 그런 소나무가 기품은 있어서 보기에는 좋지만, 목재로서는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춘양목은 굵기도 대단하지만 휘어짐 없이 쭉 뻗어 나가는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쭉쭉 뻗은 춘양목을 만날 때마다 그 대단한 위용에 놀라며 궁궐 같은 큰 건물의 기둥으로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낙동정맥의 깊고 깊은 산줄기에서 대륙적인 위엄과 기품을 지닌 춘양목을 수없이 지나칩니다. 줄기가 열 개로 갈라지며 솟아오른 '십지춘양목'에 이르러서는 두 팔을 벌려 나무를 감싸 안으며 소나무의 기를 받아 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가지가 열 개로 갈라진 '십지춘양목'입니다. 그 기를 얻어 보려고 두 팔을 벌려 안아 봅니다.
 가지가 열 개로 갈라진 '십지춘양목'입니다. 그 기를 얻어 보려고 두 팔을 벌려 안아 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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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지춘양목' 안으며 기를 받아 보기도

산행 거리가 10㎞를 넘으면서 힘들어하기 시작한 아내가 15㎞를 넘으면서는 걷는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힘들어 하다못해 절룩거리기까지 합니다.

"탁- 탁-"

무슨 소리인가 해서 뒤돌아보니 아내가 스틱 두 개를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냅니다. "왜?" 하고 물으니 "멧돼지 쫓으려고..." 합니다. 얼마 전 함께 산행할 때 멧돼지를 만난 충격이 아직 남아 있나 봅니다. 그래서 멧돼지가 나무뿌리를 캐 먹으려고 땅을 파헤친 곳이 나오면 열심히 스틱을 부딪칩니다. 아내는 멧돼지를 쫓겠다는 생각으로 스틱을 부딪치지만, 상념에 잠겨 조용히 걷던 저는 스틱 소리에 놀라며 생각을 쫓아내야 합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일월산을 바라봅니다. 1,200m가 넘는 높은 산이어서 이 주위 어디서나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일월산을 바라봅니다. 1,200m가 넘는 높은 산이어서 이 주위 어디서나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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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집니다. 랜턴 없이는 걸어가기 힘들 만큼 캄캄해질 무렵, 산길 아래로 한티재가 보입니다.

"우리 차다!"

고개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아침에 세워 놓은 차가 보입니다. 20㎞ 산행… 처음 시작할 땐 막막하기만 했는데… 시작하고 나니 끝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그런가 봅니다.

♤ 낙동정맥 23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10월 21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양군
날씨 / 구름 많고, 기온은 5~15도
산행 거리 / 19.7㎞
소요 시간 / 9시간 40분
산행 코스(남진) / 애미랑재 → 칠보산 → 새신고개 → 덕산지맥 분기점 → 십지춘양목 → 853봉 → 길등재 → 한티재
동행 / 아내와 함께 


태그:#낙동정맥, #영양 칠보산, #영양 일월산, #애미랑재, #길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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