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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아래>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로, 가장 낮은 곳에서 진실을 밝히고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자말

1965년, 통역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던 한 한국군이 있었다. 그가 전투부대에 배치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전의 경험은 그와 일가족의 삶을 어그러트렸다. 한국에 돌아온 후 매일 술에 취해 온 가족을 괴롭히던 그는 돌연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은 당시 어렸던 조카에게 의문으로 남았다.

그 조카는 대학에 입학한 뒤 시민운동에 뛰어들어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돌보았고, 외삼촌에 대한 기억으로 한국의 폭력적인 군사문화와 그 아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일찍이 군대와 전쟁, 트라우마, 진정한 평화를 고민하면서 약 20년 동안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오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만났다. 2016년부터 베트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바로 석미화 사무처장이다.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말이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다.
▲ 다시 찾은 서울 성동구의 한베평화재단 사무실에 부착된 편지들.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말이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다.
ⓒ 연꽃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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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하고 계신 일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현재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고, 이전에는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에서도 일을 했어요. 1999년 <한겨레> 연속 기사로 베트남 문제가 처음으로 한국에 알려지고, 그 결과물이자 연장선상에서 한베평화재단이 꾸려졌는데요. 오늘날 한베평화재단의 고민은 거의 20년간 활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베트남전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들이 답보상태에 머물러있다는 점이에요.

지금 우리가 인용하는 학살 피해자에 대한 조사 토대도 바로 2000년대 초반에 구수정 선생님이 조사하셨던 그 수치를 현재까지 쓰고 있는 것이거든요.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조사는 전혀 없었다고 보면 돼요. 어떤 방식이든 베트남에 대한 공식 사과와 피해자분들에 대한 지원 및 배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진상규명활동을 통해서 그것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 재단의 주요 방점이에요.

이번에 <연꽃아래>에서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을 보니 자기가 배웠던 역사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그것이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고요. (관련 기사: "'한국군 만행' 진실 덮은 연꽃무늬를 아시나요") '베트남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좀 더 쉽게 알릴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문제 해결에 어떻게 함께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게 저희한테는 가장 큰 고민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진상 규명 활동도 벌이고, 민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단계로서 시민평화법정이라는 것도 준비하고 있고요."

-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 운동의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신가요?
"사실 저는 1999년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 때부터 이 운동을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2015년에 평화박물관에서 진행했던, 생존자분들을 초청하는 사업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 문제에 관한 활동을 시작했죠.

그때 초청했던 분 중에 탄 아주머니가 계신데, 그분은 퐁니·퐁넛 학살 당시에 8살이었어요. 평화기행을 가면 늘 퐁니·퐁넛 마을 위령비 앞에 찾아가 참배하고 아주머니 댁에 가서 이야기를 듣거든요. 아주머니는 한국을 방문하시기 이전에는 한국 남자가 너무 무서웠대요.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말이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특히 남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셨던 거예요.

그런데 이후에 이 분이 한국을 다녀가시고 나서 제가 다시 베트남으로 평화기행을 갔는데, 스타일이 굉장히 화려하게 변하셨더라고요. 그러고는 저희를 굉장히 반겨주셨어요. 표정도 환하게 바뀌셨고 한국을 또 가고 싶다고 얘기를 하셨어요. 이제 한국이 자기에게는 친구의 나라이고, 추억의 나라가 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을 때 그게 너무 보람 있고 기쁘더라고요.

또 런 아저씨 같은 경우에는, 빈안 학살이 66년도에 있었는데 그 당시에 15살이셨어요. 그때 수류탄 파편이 온몸에 박혀서 지금도 여전히 그 파편 자국이 온몸에 남아있어요. 이분들이 방문하셨을 때 일정 중에 위령비와 피해자, 생존자분들의 사진을 가지고 전시를 하는 게 있었는데요. 전시의 일환으로 이분들을 초청했고, 런 아저씨가 기자회견을 준비해서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 이유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셨어요. 저희가 준비를 도와드렸는데, 그 내용을 미리 외워 오셨는지 문서를 전혀 보지 않고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발언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모두들 감동을 받았죠."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과 광주학살 그 사이

-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며, 그러한 인식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베트남전 문제가 많이 알려진 것 같지만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가 이 문제를 몰라요. 그건 베트남 전쟁에 대해 누구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죠. 궁극적으로는 이 베트남 문제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고 생각해요. 베트남전의 종전과 광주학살은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1980년에 광주학살이 일어났고, 1975년에 베트남 전쟁이 끝났어요.

이번에 해제된 광주 학살에 대한 기밀문서를 보면, 진압군으로 참여했던 군인들의 인터뷰 내용에서 그들이 베트남 전쟁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광주 시민을 베트콩과 같이 생각해서 진압을 했다는 내용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죠. 베트남 전쟁이 한국전쟁과 광주학살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연결 지점을 통해 베트남 전쟁과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볼 수 있고, 이 또한 청산해야 할 우리 역사 중 하나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요. 다만 베트남전이 한국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참전을 '자유 수호'와 같은 이념적인 문제와 경제 발전의 논리로만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홍보했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왔던 그 교육, 전쟁의 진실과 그 이면을 담지 못한 교육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한 번도 그 전쟁을 생각해본 적이 없잖아요."

- 활동을 하시면서 종종 '빨갱이'라거나 매국적인 행위라고 비난받으신 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념적인 잣대로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주장하거나 색깔론으로 끌고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요. 분단 모순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논리가 되어서 반대세력에 언제나 색깔론을 덧씌울 수 있는 것이죠. 박정희는 당시에 이 문제를 사회주의 대 자유 수호의 문제로, 굉장히 이념적으로만 국민들에게 선전을 했어요.

강원도 화천에 오음리라는 곳을 가보면 당시 베트남에 파병됐던 군인들이 훈련받던 훈련소를 베트남전 전시관으로 꾸며놓은 곳이 있어요. 그곳에서는 아주 교묘하게 패전의 오류를 덮어버리고 있더라고요.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는 패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마치 그것이 자유주의의 패배, 공산주의의 승리가 아닌 '호찌민'이라는 민족주의자의 승리인 것으로 보이도록, 즉 이념이 아닌 민족의 문제로 치환시켜버리는 거예요. 굉장히 재밌는 논리였어요.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설명이 되어있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보면 납득할 것 같았어요. 국가가 주도해서 과거를 왜곡하는 것이죠."

"단언컨대 그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죽지 않을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던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지금 대학을 졸업한 지 한 20년쯤 되었는데 처음 했던 일이 시민단체 활동이었어요. 언론활동 단체에서 일을 시작했고, 계속 관련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죠. 베트남이라는 주제에 근접해 있지는 않았지만, 감수성은 갖고 있었던 셈이에요.

그리고 이건 정말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겠는데, 저희 외삼촌이 참전했던 분이세요. 제가 베트남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전인 노무현 정부 시절에, 과거사위원회에서 3년 정도 일을 했었어요. 군대에서 일어났던 의문사에 대한 조사 작업을 하는 곳이었어요. 그때 삼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죠. 저희 삼촌도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던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위원회에서 활동하기 전까지는 삼촌이 그냥 본인의 수명을 다해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대부분이 자살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유가족들이 '자살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의문을 제기하면 그게 의문사가 되는 것이고요. 조사를 한다고 해도 대부분 당시 헌병대에서 조사했던 결과를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요.

헌병대 조사 결과에는 다분히 본인의 문제로, 즉 가정사로, 성격적인 결함으로 자살하였다고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대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가 결국 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가 거의 99퍼센트예요. 단언컨대 그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죽지 않을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그게 저의 결론이었어요.

그렇게 군대 내 트라우마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 삼촌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삼촌이 1965년도에 참전을 했고, 우리 전투부대가 처음 갔던 게 65년이에요. 그리고 학살이 1966년, 1968년도에 집중적으로 일어나거든요. 삼촌이 소속되었던 부대가 어디인지는 제가 기억을 못 해요. 그래서 정확하게 학살과의 관련성은 알 수 없지만, 저희 삼촌이 베트남어 통역병으로 근무했다는 것은 기억해요. 아마 대부분의 한국군이 베트남어를 몰랐기 때문에 학살이 좀 더 가혹했을 수 있고, 삼촌처럼 언어를 알았던 사람에게는 그 상황이 더 고통스럽게 다가왔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삼촌이 돌아가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더 여쭈어봐도 될까요?
"삼촌이 돌아가신 것을 아무도 못 봤어요. 삼촌이 한국에 돌아와서 술로 세월을 보냈고 모든 가족들을 괴롭혔거든요. 어느 한 직장에 정착해서 일을 해본 적도 없어요. 사촌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외숙모가 결국은 그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그렇게 삼촌이 혼자 살게 되고 몇 년 안 돼서 돌아가셨어요.

삼촌은 우리 집에 올 때면 문을 굉장히 세게 두드렸어요. 그 문 두드리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생길 정도였죠.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또 문을 엄청 세게 두드리고 저희 엄마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나 배고프니까 밥 좀 다오", 이러시는 거예요.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다고 말이죠. 닭죽이 조금 남아있어서 그거를 드렸더니 한 그릇을 싹 비우고 일어났어요. 그러고서 며칠 후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죠. 이웃 주민이 문을 열어봤더니 자고 있어서 문을 닫았대요. 며칠을 똑같이 잠만 자길래 이상해서 보니 돌아가셨던 거였다고 했어요.

저는 삼촌이 병으로 돌아가시거나 자연사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추측을 해요.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해서 묘도 없는 상태인데, 저희 삼촌 같은 경우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월남전 유공자 등록도 안 되어있어요. 신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유공자 혜택도 전혀 없었고요."

가해자가 될 운명에 놓였던 피해자, 참전군인

- 또 다른 참전 군인을 만나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며칠 전에도 재단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이 분은 아버지가 참전 군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 때문에 자기 인생이 꼬였다는 얘기를 하면서, 자기 가족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아버지가 베트남을 갔다 온 것 말고는 그 이유가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베트남을 가기 전과 후의 아버지가 너무 달랐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요. 그분도 신체적으로는 괜찮았지만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던 것이겠죠. 그 분은 그래도 환갑이 지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공자로는 등록이 되셨대요.

한국에서 적어도 32만 명의 군인이 월남에 갔다 왔는데 사망자 수가 5천 명밖에 안 되고 부상자 수도 1만 명가량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해요. 저는 거기에도 의문이 들어요. 돌아와서 수많은 사람이 참전 후유증을 겪었을 거예요. 황석영 작가의 <수인>이라는 책을 보면 황석영 작가가 참전 이후에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 나와요. 황석영 작가도 70년대 초반인가 맹호부대로 참전을 했었거든요. 전투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도 자기가 어떻게 해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가를 쓰셨는데 저는 또 저희 삼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죠."

- 참전 군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참전 군인들을 베트남 문제의 대척점처럼 인지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참전 군인이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참전 군인은 국가 폭력에 동원된 또 하나의 피해자이고, 가해를 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였던 피해자예요. 시민사회에서 준비 중인 베트남전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법정에서도 피고는 참전 군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예요. 이 베트남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해요.

전에 한국의 월남참전전우회나 고엽제 피해자분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에서, '베트콩이 왔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피해자들의 증언회에 반대하는 입장의 집회를 저희 행사장 앞에서 크게 하셨던 적이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 문제가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처럼 비춰지는 측면이 있어서 정부도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하기도 하죠. 또한 현재 한국과 굉장히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외교적인 논리로 인해 이 문제가 함구되고요. 지난번에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논리로만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는 지점에서 화가 많이 났어요."

- 참전 군인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지금 생존해 계신 분들, 고엽제 피해자로 유공자 등록이 되어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그 참전 군인들에 대한 지원도 전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국가적인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지금은 재단이 베트남의 피해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점차 한국이 안고 있는 참전 군인에 대한 문제, 전쟁의 치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일이죠. 초반에 참전하셨던 분들은 다 40년대 생들이고요. 이미 연세가 70대 중반 이후로 넘어가서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데, 지금 전우회 활동하시는 분들은 사실 70년대 초중반에 참전했던, 그래도 비교적 젊은 세대의 분들이에요. 제가 또 하나의 피해자로서 생각하는 그분들 중에는 아마 생존해 계시는 분들이 거의 없을 거예요. 저는 그분들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베트남 피해자분들도 굉장히 고령화되어 있고 많이들 돌아가시고 했어요. 구술 작업도 제대로 진행을 못하고, 남길 수 있는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요. 사라져가는 것들을 빨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우리가 또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죠."

평화를 위한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

-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휴전 중이기 때문에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툭하면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게 거의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 블랙홀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평화운동이라는 것이 분단문제와 통일문제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조건이 있었던 거죠. 이제 우리는 좀 더 큰 틀에서의 평화에 대한 관점, 감수성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우리가 늘 피해의 역사만을 살아왔다고 이야기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그 전쟁에서 우리가 총을 들고 참전하게 된다면 우리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전쟁이죠. 그래서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에요.

민간인 학살이 사실은 베트남 전쟁을 굉장히 미시적으로 본 것일 수도 있어요. 그저 한 부분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평화란 가장 아프고 가장 약한 부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몸의 중심은 다른 곳이 아니라 아픈 곳이 되어야겠죠. 베트남전의 진실을 바라보기 위한 시작점은, 바로 우리가 바라보지 않았던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시선이라고 생각해요."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매일 이어지는 1인 시위 릴레이. 16일 아침에는 석미화 사무처장이 팻말을 들었다.
▲ 1인 시위 캠페인을 진행 중인 석미화 사무처장.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매일 이어지는 1인 시위 릴레이. 16일 아침에는 석미화 사무처장이 팻말을 들었다.
ⓒ 한베평화재단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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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연꽃아래, #한베평화재단, #석미화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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